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50
어느 도시는 아니겠냐마는 부산은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에게 살기 좋은 도시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으며 화려한 밤과 쾌청한 낮도 있다. 겨울엔 제법 매서울 때도 있지만 그 매운맛이 윗동네에 비길 바가 아니고 여름도 뜨겁지만 일기예보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울산과 부산은 다른 도시보다 늘 1,2도씩 낮다. 아마 수도권이나 대전에서 오는 여행객이라면 그 시원함을 체감할 수 있으리라.
딸이 크면서 계절을 가르쳤다. 달력으로 가르치지 않고 꽃으로 바람으로 음식으로 가르쳤다. 아니,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배워갔다. 동백꽃이 붉으면 추위는 물러갔지만 여전히 겨울인 것이고 매화와 목련이 피면 봄이 드디어 겨울을 밀어낸 것이며 벚꽃이 피면 봄도 깊어진 것이다. 이팝나무와 낮달맞이 꽃, 꽃양귀비가 보이면 여름이 멀지 않았고 뉴스에선 장마 이야기가 슬슬 나온다. 배롱나무꽃과 능소화가 피면 장마가 코앞인 것이고 무궁화와 함께 한여름을 버텨낸다. 그렇게 9월이 되면 불쑥 코스모스가 고갤 내밀고 시월의 평화공원은 국화가 주인이다. 그렇게 잠시 뒤 다시 겨울이 찾아온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앞선 글에도 썼듯이 메밀국수를 먹으면 여름이고 돼지국밥이 당기면 겨울이다. 물론 부산이 고향인 딸에게 돼지국밥 먹기 좋은 계절과 냉채족발을 먹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다. 회가 더 맛있는 계절과 빵이 더 맛있는 계절이 없는 것과 같다. 그나마 밀면은 여름에만 찾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딸에겐 그저 그날의 날씨가 그 음식을 부를 뿐이다.
아비랑 마흔 살이 차이 나니 추운 것도 더운 것도 체감하는 것이 다르다. 10월 말부터 아빠의 입에선 “안 추워?”라는 물음이 떨어질 줄 모르고, 5월 말부터는 “아~더워.”라는 말이 딸의 입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게다가 맛집이 몰려 있는 대연동과 광안리 주변에서 성장한 딸은 시시때때로 먹고 싶은 것이 다양하다. 먹는 것은 그저 끼니에 불과하고 그나마 기호에 따라먹는 것은 맥주와 커피밖에 없는 쉰 줄의 아빠 입장에서는 이렇게나 먹고 싶은 것이 많은 딸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체력이 넘쳐나는 딸과 무더위 속 여름 방학을 보내는 건 쉽지 않다. 8월에도 농구를 하러 가자고 조르는 딸과 농구를 하러 가야 하니 말이다. 물론 열 살짜리도 8월 무더위 앞에선 버틸 재간이 없었는지 30분 만에 집에 가자고 했으니 이 또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나마 애가 좀 크니 가야 할 곳도, 가볼 만한 곳도 다양해졌다. 덕분에 시원한 곳을 찾아 피서 삼아 가고 싶은 곳도 많아졌다. 1학년 때만 해도 이 녀석이 뭘 알겠나 싶어 기껏 작정하고 가는 곳이 물놀이 시설이나 박물관 정도였다. 그러나 열 살이 넘어가니 미술관도 궁금해하고 도서관도 궁금해한다. 코로나 시국에는 어딜 가든 예약을 했다. 인원수의 제한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어디 멀리 여행 가긴 애매한 시기에 아내는 역으로 부산의 동남권 사람은 잘 안 가는 강서구 여행을 제안했다. 강서구 하면 다대포와 을숙도 등이 있고 공항도 가깝고 김해도 가까워서 외지 사람을 위한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지만 우리가 사는 남구하고는 거리가 있어서 일 년에 한 번은커녕 몇 년에 한 번도 가기 힘든 곳이다. 어디 강서구 뿐인가. 중구의 송도 해수욕장도 난 아직 안 가봤다.
그렇게 여행을 결정하고 명지에 있는 한 호텔에 짐을 푼 뒤, 첫 날인 8월 3일에는 을숙도에 있는 현대미술관에 갔다. 현대 미술의 문외한인 아빠와 엄마도, 그 미술을 처음 접하는 딸도 이 미술이 보는 것인지 경험하는 것인지 난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딸은 전시물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머물다 가고, 가고 머물기를 반복했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팸플릿을 꼼꼼히 보며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비디오 아트 앞에선 한참을 버텨 서서 보았다.
사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지하에 있는 어린이 예술도서관 때문이었다. 이곳은 각종 동화책과 소설은 물론이고 디자인과 미술 관련 책들이 서가를 가득 메운 곳이다. 게다가 공간의 디자인 자체가 아기자기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어서 열 살 소녀에게는 놀이공원만큼 설레는 곳이 될만했다.
디자인과 그림을 좋아하고 시각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이고, 그 일을 하는 와중에 매너리즘에 빠진 이라면 더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딸은 그곳에서 작은 상자처럼 생긴 개인 서가에서, 또 엄마와 함께 나란히 계단에 앉아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난 디자인 관련 책을 몇 권 휘리릭 넘겨봤고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인 다니구치 지로가 루이비통과 손잡고 만든 베네치아 여행기 시리즈를 자세히 봤다.
이 호텔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수영장 때문이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애가 있는 부모들은 최대한 안전한 물놀이 시설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던 시기였다. 아내 또한 그러해서, 그렇게 고심 끝에 찾은 곳이 이곳 호텔이었다.
햇볕 알레르기가 있는 아내는 수영장이 내다보이는 로비에서 구경을 하고 나와 딸만 신나게 놀았다. 마스크를 쓰고 놀아야 되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이 왔다. 마스크까지 쓰고 물놀이하는 거, 그거 참 구차하고 모양 빠진다고 열 살짜리 딸에게 말해봐야 소용없었다. 그저 아빠는 열심히 놀아주어야 한다. 그렇게 여덟 시 반에 시작한 물놀이가 열한 시에 끝났다.
여름옷과 수영복은 무조건 원색이어야 한다는 것이, 래시가드 따위는 서핑할 거 아니면 입지 말라는 것이, 무채색 따위는 상가 갈 때나 입으라는 것이 아빠의 지론이라면 지론인지라, 그 탓에 원색의 수영복을 입고 논 사람은 나와 딸 뿐이었다.
그 달에 딸은 카톡에 아빠의 별명을 "갱년기 단호박 아부지"로 해 놨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빠를 잘 표현한 별명이다. 그러나 해줘야만 할 것이 있다면, 아빠 말고는 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라면 체력이 다하도록 해주려 한다. 물놀이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서점에서의 방황 또한 그렇다.
그 덕에 여름 방학마다 딸과 함께 한 물놀이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또, 그 덕에 아빠는 열심히 몸 관리를 하게 된다. 여름철 물놀이에 아빠의 동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쯤이면 운동을 그만두려나. 아직은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다만 물놀이장으로, 호텔 수영장으로, 부산의 해수욕장으로 아빠를 불러내서 여름이면 딸과 함께 갈색의 피부로 갈아 입는 세월이 더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