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을 자격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51

by 최영훈

방학이 끝날 무렵

방학 중 마지막 과제는 구강검진이었다. 집 근처에 이런저런 병원이 많아서 건강검진이든 구강검진이든 걸어서 해결할 수 있다. 제법 기다릴 줄 알았지만 금방 끝내고 점심을 뭐 먹고 싶냐고 물었다. 딸은 집 근처 유명한 우동집인 <다다우동>에서 메밀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아직 열한 시 이십 분 밖에 안 됐지만 사람들 몰리기 전에 먹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일찍 들어갔다. 딸은 메밀국수를, 난 튀김 운동을 시켰다. 딸은 혼자서 한 판을 다 먹어치웠다. 후식으로 좋아하는 청포도 에이드까지 깔끔하게.


자기는 방학이지만 아빠는 방학이 아니어서 많이 못 놀아줬다.

때론 혼자 있게 놔두기도 했다. 딸은 아빠가 놀아주길 기다리며 그 시간을 견뎠다.


사람을 잃는 것을 두려워마라

세상에 아빠는 한 명뿐인데 태어나보니 나 같은 이가 아빠여서 이래저래 곤란한 일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무를 수는 없으니 열심히 맞춰가며 사랑하며 부녀의 정을 쌓아가고 있다. 때로는 아빠가 일과 글에 치여 예민해져서 별 것 아닌 일에도 버럭 하면, 잘못한 것이 크게 없어도 먼저 잘못했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못 견뎌서 먼저 나서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손 내밀고, 안아달라고 한다.


방학이 끝나갈 때쯤 그런 일이 또 있어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줬다. 어차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고 엄마 아빠든, 친구든, 그야말로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어도 정작 없게 되면 그럭저럭 살아 낼 수 있으니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에 공포를 갖지 말고, 누군가와 불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또 어떤 인간들은 먼저 손 내밀고 마음 여는 사람을 약하다고 여겨,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 깔 보고 매번 그렇게 자기 성질대로 하는 인간들이 있으니 혹여 그런 인간들을 만나거든 굳이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널 사랑하는 사람은 있다.

어차피 사람의 품이라는 게 내외적으로 그 너비가 한정되어 있고 널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두 명 정도는 언제나 있고, 네 재능을 원하는 사람도 한 두 명 정도는 있으니 사람 한 명 한 명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아빠한테도.


아빠와 산 날보다 아빠 없이 살 날이 더 많을 것이다.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아빠의 빈자리를 응시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너를 늦게 낳아 준, 동생도 낳아 주지 못한 아빠의 탓이다. 그 빈자리의 공백이 줄 아픔을 예감하며 미리 사과를 한다. 그렇다. 아이가 서른이 되면 아빠는 칠십이다. 아내가 서른 일 때 장모님은 쉰을 갓 넘으셨고 내 어머니 또한 그러셨다. 일찍 낳아 키워 서툴고 힘들었지만 오랫동안 자식 곁에 있으면서 자식이 나이 들어가는 것도, 머리가 새는 것도 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식이 부모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의 건강을 걱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 어머니도 통화할 때마다 맥주 좀 줄이고 일은 적당히 하라고 잔소리하신다. 칠순의 어머니가 쉰 줄에 접어든 아들을 걱정하신다.


딸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긴 어려울 것이다. 딸이 그 혼자인 세월을 버티면서 외로움과 사람에 휘둘려 살지 않길 원한다. 아빠처럼 외롭게 살길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과 사랑에 목이 말라 허겁지겁 아무 사람, 아무 사랑에나 목을 메지 않길 바라고 있다. 다행히 단단하게 크고 있다. 더 단단하게 되길 바란다.


아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각한 얘기야 금방 잊고 에어컨 빵빵하게 켜 놓고 엄마랑 모동숲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게임에 빠진 딸의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저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