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에서 배운 인생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54.

by 최영훈

우연히 보게 된 러시아 그랑프리

9월 마지막 주, 월요일 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우연히 F1 러시아 그랑프리를 보게 됐다. 찾아보니 이 주 일요일에 한 경기였다. 이미 밤 열 시가 넘어 딸은 잠들 시간이었지만 몇 바퀴 안 남았기에 함께 끝까지 봤다.

F1에 대해 설명해주고 화면에 뜨는 정보를 보는 법을 가르쳐 줬다. F1 머신들의 소속 회사와 드라이버, 이들이 점수를 내는 방법, 세계를 돌면서 경기를 한다는 것과 현재의 속도와 랩타입, 시시각각 변하는 순위를 보는 법 등을 가르쳐 줬다. 요즘엔 중계 화면에 드라이버와 메카닉의 대화도 나오는데, 그것이 흘러나올 때 지금 대화 중이고, 그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대충 얘기해줬다. 딸은 금방 몰입했다.


레이싱을 좋아했던 시절

몇 번 얘기했지만 기지촌에 오래 살아서 카레이싱에 익숙하다. 애니메이션 <카>와 톰 크루즈 주연의 <폭풍의 질주>에 나온 나스카 경기를 AFKN으로 먼저 접했다. 나스카 경기는 스톡카 경주여서 더 몰입해서 봤던 기억이 있다. 아, 스톡카는 쉽게 말해 껍데기는 일반 승용차지만 내부는 완전히 뜯어고친 개조 차량을 말한다. 어린 마음에 트랙을 돌던 자동차를 미군이 타고 지나가는 걸 보면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슈마허와 하키넨의 라이벌 시대에 F1 경기를 종종 봤고 스포츠 채널이 다양해지면 파리-다카르 랠리 같은 랠리 경기도 종종 봤었다. 그러다 해밀턴이 최초의 흑인 드라이버가 됐을 때쯤부터 자동차 레이스를 챙겨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세월이 흘렀다. 그 최초의 흑인 드라이버였던 해밀턴이 벌써 99승의 베테랑이 되어 있었고 미카엘 슈마허의 아들이 이 그랑프리에 드라이버로 출전했으니 말이다.


비가 예고된 레이스

경기 전에 비가 예보됐다. 메카닉, 크루들은 드라이버와 부지런히 통신했고 타이어를 바꿀지 말지 고민했다. 약 6킬로미터의 트랙을 53바퀴 도는 경기, 랩은 이제 열 바퀴도 안 남았을 때 화면 오른쪽에 비 예보가 떴다. 잠시 후 트랙의 한편에 가랑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Pit의 크루와 메카닉들은 심각한 얼굴로 레이스를 지켜봤다. 이때 1위는 젊은 노리스였다. 2위는 리빙 레전드인 백승을 노리는 해밀턴, 둘의 간격은 십 초 안팎이었다.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쳤다. 우비를 주섬주섬 입고 있었다.


노리스의 메카닉이 물었다.

"타이어를 우천용으로 바꿀래?"

"아니 해밀턴이 꽁지에 붙었어. 그냥 간다."


이때 해밀턴은 pit in을 결정한다.

딸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 다 따라왔는데."

당연히 간격이 더 벌어졌다.


그때 빗방울이 굵어졌다.

노리스의 머신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국내 중계방송 해설자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타이어 바꿔야 돼요. 이젠 안 돼요."


노리스는 고집을 부렸다.

둘만의 레이스가 된 레이스 말미, 노리스의 머신이 한 코너에서 미끄러졌다. 트랙 아웃.

해밀턴이 추월했다. 세 바퀴쯤 남겨놨을 때, 결국 노리스가 pit in 한다. 최종 순위는 7위.

거실에 누워서 얼굴에 LED가면을 쓰고 마사지를 하던 아내도, 흥분하며 보던 딸도 장탄식을 했다.


그렇다. 나도 다시 느꼈고 딸도 느꼈을 것이다. 인생 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느 구름에서 비 올지, 그 비가 언제 올지 모른다. 모험엔 대가가 따르지만 선택은 본인 몫. 레이스도 인생도 그래서 고독한 것 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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