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은 16분 음표에 불과하다.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57

by 최영훈

수학 시험의 한 문제

시월 셋째 주, 수학 시험을 봤다. 아주 꼼꼼히 문제를 풀었고, 검산도 해서 백점을 기대한다고 했다. 은채는 3학년 들어서 수학 시험에서 한 두 번인가 백점을 맞고 나머지 시험에선 한 두 문제씩 틀렸다. 주로 한 문제를 틀려서 아쉬워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 꾸준함이 대견하니 그 한 문제 갖고 뭐라 하진 않았다. 나나 아내나 수포자였으니 뭐라 할 말이 있을까?


어제 시험지를 가져와서 보여줬는데, 한 문제 틀렸다. 서른 문제 중에 한 문제 틀렸으니 이만하면 잘한 거다 싶지만 본인 마음은 또 그게 아닌가 보다. 백 점 맞은 애가 있으니 억울한 모양이다. 게다가 제 판단엔 쉬운 문제를 틀려서 더 억울한 모양. 또 백 점 맞은 애가 와서 자랑 아닌 자랑을 한 모양이다.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오답 노트를 적다가 왜 틀렸는지 적으면서 눈물이 터졌다.


“뭐라고 적어야 돼?”

“음... 잠시 착각했었다고 해. 네 풀이와 정답 풀이를 나란히 적고.”

“그건 좀 짧잖아.”

내심 오답 풀이라도 길게 적어 차별화를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딸에게 말했다.

“은채야, 너, 하나씩 가끔 틀리니까 이렇게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시험 볼 때마다 백 점 맞으면 언젠간 교만해져서 공부도 안 하다가 엄청 많이 틀릴지도 몰라. 아 그리고 저번에 아빠가 말했지. 넌 꾸준해. 기복이 없어. 대학 점수로 말하면 2학기 내내 수학은 A플러스야.”

“아 그래? 그럼 아주 잘 함, 잘 함, 보통, 노력 요함에서 A플러스는 어디야?”

“당연히 아주 잘함이지.”

은채는 아빠의 말에 마음이 좀 풀렸는지 다시 오답 노트에 집중했다.


요즘의 수학 시험

요즘 수학 시험엔 지문이 엄청 많다. 그러니 글을 못 읽으면, 문장을 이해 못 하면 숫자 계산 단계로 진입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문이 현학적이거나 학문적인 건 아니다. 아주 실생활에 밀접한,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겪는 문제들이 제시된다. 어찌 보면 제대로 된 수학 교육 아닌 가 싶다. 일상의 문제부터 수학으로 풀 수 있어야 궁극에는 양자 물리학 같은 세계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은채는 잘하고 있다. 그러나 더 잘하고 싶어 한다. 우수함을 넘어서 탁월함을 증명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지금도 반 애들한테 넘사벽 대우를 받는다. 운동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고.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애를 낳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드려야 얻을 애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완벽을 향한 강박은 좀 내려놨으면 한다. 완벽보다 꾸준함, 견고한 기초,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춰 공부해주길 바란다.


완벽을 향한 열정

방과 후 교실, 바이올린 선생님은 은채한테 오늘 “왜 완벽하게 안 될까요?”하셨다고 한다. 은채는 그것도 나름 부담스럽다고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는데 완벽을 요구하면 그 완벽을 이루고 싶은 성향이라 피곤하다.

“은채야, 바이올린 선생님은 너를 음악가로 생각하시나 보다.”

“응? 왜?”

“음악을 시작한 이상, 음표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게 기본이니까. 아마 선생님이 너희들을 그냥 애들로만 생각하셨으면, ‘뭐 애들은 이 정도 하면 됐지.’하고 넘어가시지 않았을까? 그러니 너한테 완벽하게 연주하길 바라시는 건 널 음악인으로 대해 주시는 거야.”

은채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그러니까 80년대 중반에 막 한국에 CCM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찬양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십 대 후반이었다. 그때 리더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신 게 아직도 기억난다. “은혜로 들어달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연습이 부족해서 연주도, 노래도 듣기 싫게 하면서 왜 자꾸 은혜로 들어달라는 말을 합니까. 연습해서 최대한 아름답게 하세요.” 이 말을 교회 다니는 20년간, 성가대를 하면서 잊지 않았다. 음악이란 건 기술적으로 완벽한 뒤에야 감상적인 아름다움이 따라온다. 내가 약간이나마 음악가의 완벽을 향한 열정을 이해하는 건 이때문이다.


완벽한 삶은 없다.

삶도 그럴까? 삶은 그렇지 않다. 완벽하지 않은 삶이라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니 완벽한 삶이라는 게 애초에 존재할 수나 있을까? 음악에는 완벽을 위한 악보가 있지만 삶에는 훌륭한 삶이라는 악보가 없다. 뭘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어떤 부분에서 빠르게, 어떤 부분에서는 느리게 하라는 악상 기호도 없다. 그래서 어디에서 되돌아가 반복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조용히, 또는 크게 연주해야 할지, 어디에서 한 악장을 끝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저 사는 동안 연주가 되고, 연주하는 동안 살뿐이다. 완벽한 삶의 순간이다 하고 감탄하는 그 순간 불안한 미래가 당도하는 것, 그게 삶이다.


물론 이런 말을 은채에게 할 순 없다. 완벽하려 하지 말고 온전하고 충만하게 지금 이 순간을 누리면 된다고 말할 순 없다. 지금의 은채에겐 은채의 규칙이 있고, 다다르고 싶은 목표가 있다. 삶 전체에서 그 목표는 짧은 순간의 16분 음표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수 십장의 삶의 악보를 넘긴 아빠의 입장에서 그깟 16 음표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은채에게는 지금 그 음표가 완벽하게 연주해내고 싶은 클라이맥스의 음표다. 그러니 그 완벽을 향한 어린 열정을 응원해주고 있다. 대신 그 완벽을 향한 열정이 집착이 되지 않게, 강박이 되지 않게 관리해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