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말 단풍놀이를 갔다 왔다. 경주의 남산과 청송의 주왕산을 보고 왔다. 단풍의 색을 만끽할 줄 알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진실의 미간을 보이고, 어지간한 산은 사슴처럼 타고 넘는 딸은, 언제나 그랬듯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다.
내 학창 시절 소풍 사진은 두 장뿐이다. 수학여행도, 졸업여행도 간 적 없다. 봄꽃놀이, 여름 해수욕도 서른 중반까지 경험이 없다. 가을 단풍놀이도 이번이 처음이다. 스키장도 당연히 안 가봤다. 그러니 당연히 스키도 못 타고 스노보드도 못 탄다.
내 모든 여행은 아내를 만난 후 시작됐다. 첫 번째 해외여행이 신혼여행이었으니까. 그 뒤로 여행을 배우면서 동시에 여행의 이유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생각해 왔다. 여전히 여행의 이유는 미스터리다. 밖에서 자는 잠은 불편하고 맛 집도 심드렁하다. 그래도 애가 좋으면 아빠도 덩달아 좋다.
딸은 여행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안다. 딸은 세 살 때 미국에 갔다. 용인 에버랜드도 세 살, 도쿄 디즈니랜드는 네 살, 아빠도 안 가본 플로리다 올란도에 있는 디즈니월드는 여섯 살 때 갔다 왔다. 일본의 여러 도시를 갔고, 아빠도 안 가본 베트남도 갔다 왔다. 어린이집 때부터 숱하게 체험 학습과 여행을 다녔고, 방학 때마다 경주와 거제도, 고령, 김해, 사천 등 경남 곳곳은 물론이고 여수와 서울 여행도 다녀왔다.
다시 한번, 내 경험으로 아이의 세상을 재단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경주 남산의 수많은 불상과 보물을 쉰이 다 돼서 본 아빠와 열 살에 본 딸의 감탄은 같았다. 주왕산의 암벽과 폭포, 단풍을 보며 느낀 감동의 울림도 같았다.
대전사 경내에서 깃대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찍히는 두 여자
주왕산 입구의 대전사와 웅장한 깃대봉을 보니 벌써 멀리 온 보람을 느꼈다. 시루대, 급수대, 주왕산 산책로를 따라가며 용추폭포와 용연 폭포, 절구폭포를 본 것도 좋았다. 높은 계단 끝에 신비롭게 뚫려 있는 주왕굴과 주왕암도 마음에 간직할만한 곳이었다. 그곳을 돌아 나오면 마주하는 병풍바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딸은 단풍잎의 색에 반해 연신 사진을 찍어댔고, 모양이 온전한 단풍잎을 찾기 위해 한참을 거닐었다.
누구나 다 하는 경험
이 평범한 경험이 좋았다. 주왕산 산책 코스를 다 돌고 내려와 등산로 입구에서 호객 명함을 받았던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밥을 먹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밥을 먹는 관광객들의 흥겨운 대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는 경험은 내겐 처음이었다. 많은 관광객들과 같은 단풍, 같은 산세, 같은 폭포를 보며 감탄하고 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경주 남산에서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남산 곳곳에 있는 문화재를 구경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이 모든 평범한 경험이 처음이어서 비범했고 가족과 함께해서 특별했다.
경주 남산에서 내려오는 길
그러니, 이쯤 되면 딸은 여행의 의미와 그 이유를 배워가는 학생으로 아빠와 동문인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빠는 여행을 아직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따라다니고, 딸은 여행을 엄청나게 좋아하면서 앞서 간다는 것뿐. 때문에 딸은 어디서 사진 찍어야 할지, 어떤 표정으로 찍어야 할지 기가 막히게 안다. 나와 아내는 좀처럼 사진에 찍히지 않는다.
구입한 지 20년도 더 된 재킷이 처음으로 우중충해 보였다.
"아빠, 카메라 째려보지 마. 아, 쫌."
이런 타박을 들으며 겨우 건진 사진이 저 그늘 속에 나다. 처음으로 저 오렌지색 등산 재킷이 우중충하게 느껴졌다. 붉은색 등산 재킷이 제법 잘 어울릴 만큼 성장한 딸과 다니다 보니 빛바랜 오렌지색이 눈에 거슬렸다. 저 재킷과 내가 동행한 세월이 대충 20년쯤 되지 않을까? 이젠 버리고 딸과 다니면서 사진에 찍혀도 좀 괜찮을법한 재킷을 하나 장만해야겠다. 여전히 여행의 이유를 모르지만, 그 이유를 알고 즐거워하는 딸과 이곳저곳 다니려면, 그렇게 다니다 찍힌 사진 속에 아빠의 우중충함이 딸의 눈부신 순간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