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떤 꿈, 어떤 일은 거의 손에 들어왔었던 적도 있었다. 잠시 그 속에 몸을 담가 본 적도 있었다. 꿈을 버리면 죽을 것 같았지만 아직 살아 있다.
결국 어린 시절 꿈꿨던 어른이 된 나와 지금의 나는 거리가 멀다. 중학교 때 꿈꿨던 시인도 되지 못했고 대학 때 꿈꿨던 대통령 선거 참모나 선거 전략가도 되지 못했다. 강사 노릇 하며 꿈꿨던 교수도 못됐고 학위도 포기했다. 포기하고 버릴 때마다 죽을 것 같았고, 간신히 찾아낸 꿈의 그림자마저 놓쳐 버리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살아 있다.
부부생활도 꿈꿨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겐 부부의 표상이 없었다. 닮고 싶은 부부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여자가 좋은 여자다 하는 기준도 없었다. 그러니 신혼 때부터 그냥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보다 하고 살았다. 불만도 있고 아쉬움도 있었지만 다들 그렇게 사나 보나 했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식은 다 예쁘다고들 하니 내 자식이 예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때가 되면 뒤집고 기고 걷고 말했다. 다들 그렇게 큰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 딸이 아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밖에 데리고 나가면 다들 딸보고 예쁘다, 귀엽다, 똑똑하다고 말들을 했다. 딸을 낳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나도 저런 딸을 낳았으면 하는 딸이고, 딸을 가진 사람에게도 때론 우리 애도 쟤를 좀 닮았으면 하는 딸이라는 걸 어린이집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그러하듯, 아빠에게 이 딸은 특별한 딸이었다. 유일하게 바라던 대로, 아니 그 이상 꿈이 이뤄진 건 은채 아빠가 된 것뿐이다. 사랑스러운 딸의 아빠가 된 것뿐이다. 살면서 세상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 하나를 꼽자면 이거 하나뿐이다.
카피라이터로 20년을 살았고 칼럼니스트로 몇 년 살았고 브런치 작가로 2년 가까이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걸 하고 있는 것도 딸 때문이다.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 하나를 대라면, 결국 딸 때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삶이 기적인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져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았고 상상하지 않았던 뭔가가 내게 주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날 사랑하는 것도 기적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고 그 사랑과 힘을 합해 애를 낳고 키우는 것도 기적이라 여겨 마땅하다. 그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못 나가게 하는 것도, 돌아보면 기적이다. 지가 날 언제 봤다고...
그렇다. 태어나보니 이 사람이 내 아빠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무를 수도 없다. 그런데도 좋단다. 안아달라고 팔을 내밀고 잘 때마다 꼼지락거리며 품을 찾는다. 기적이라 불러 마땅하다.
딸 덕분에 다시 꿈을 꾼다. 아빠가 세상에 읽을 만한 책을 내서 작가의 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날이 오길 꿈꾼다. 건강을 잘 유지해서 딸과 함께 조깅도 하고 수영도 하게 될 날이 오길 꿈꾼다. 건강을 잘 유지해서.... 더 살고 싶다는.... 그런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