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썼듯, 3학년 가을에 3/4 사이즈로 바이올린을 바꿨다. 그전에 1/2 사이즈를 썼었다. 1학년 때 돌봄 교실 선생님이 본인 딸이 쓰던 걸 그냥 주셨다. 그렇게 3학년 가을. 방과 후 교실, 바이올린 선생님이 바꿔야 할 때라고 하셔서, 엄마가 면밀한 조사 끝에 새 바이올린을 사줬다. 그 뒤로 딸은 종종 가방은 앞으로, 바이올린은 뒤로 메고 간다. 평소라면 아빠가 바이올린과 가방까지 들어줬겠지만 규랑이와 함께 가는 날이면 자신의 짐을 온전히 자신이 감당하며 간다.
날 부를 때
그래도 여전히 아빠는 필요한 사람이다. 딸이랑 둘만 있는 오후, 또는 주말. 딸은 아빠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부른다. 너무 많이 불러서 엄마에게 "야, 세상에 아빠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하는 핀잔을 들을 정도다.
날 불렀던 사람도 몇 안 되고, 호칭 또한 몇 개 안 된다. 교회 다닐 때는 피도 안 섞인 사람에게 형제님이라는 호칭도 들어 봤고, 대학 다닐 땐 기숙사 동장을 하면서 동장님 소리도 들어봤다. 강사 시절엔 교수님이라는 말도 들어봤다.
이런 호칭 중에 마음까지 부르는 호칭은 몇 없다. 어머니가 날 부를 때 늘 “아들”이라는 부르셨다. 딸을 키우며 돌아보니 뭉클한 부름이다. 최카피라는 호칭도 좋아한다. 강사 시절, 학생들이 내가 없는 자리에서 지들끼리 날 칭할 때 만든 호칭인데 맘에 들어서 내가 그 뒤로 종종 사용한다. 기고하는 칼럼의 코너 제목 중 하나도 “최카피의 딴생각”이다.
요즘엔 작가님으로 많이 불린다. 고객들 입에서 최카피라는 말보다 작가라는 말이 많이 나오다 보니 아예 명함에 두 호칭을 다 넣었다. 감독도 날 소개하는 자리에선 늘 작가로 소개한다. 종종 수석 작가라는 이상한 호칭으로 소개할 때도 있는데 민망하다. 민망하나 그 호칭에 담긴 감독의 마음이 전해져, 그렇게 소개하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요즘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은 여보/당신과 아빠다. 결혼한 뒤, 아내는 오빠라는 호칭을 금세 바꿨다. 뒤에 말하겠지만, 아내가 애교가 없고 나 또한 그런 성격이라 서로를 부르는 닭살 돋는 애칭도 없었기에 호칭 전환은 비교적 수월하고 사무적으로 이뤄졌다. 물론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은 단연코 아빠다. 다른 호칭과는 비교할 수 없다.
딸이 날 부르면
딸이 부르면 바로 대답한다. 부르는 이유는 수십 가지다. 사과를 깎아 달라, 안아 달라, 내 춤을 봐 달라, 옷을 골라 달라, 간식 A와 B 중 뭘 먹을까, 수학 3번 문제를 가르쳐 달라, 영어에서 이 단어는 무슨 뜻이냐, A는 문화에 속하냐 아니냐 등등....
대체로 난 서재에 있다. 유튜브로 스포츠 영상을 보거나, 카피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그러나 언제, 어떤 용건 때문에 딸이 얼굴을 내밀고 날 부르면 바로 "응"이라 대답하고 영상을 멈추고, 책을 덮고, 커서를 정지시키고 딸의 얼굴을 똑바로 본다. 용건을 들어주고 해결해 준다. 함께 수학 문제를 풀고, 살이 안 찌는 간식을 고민하고, 입고 갈 옷을 고민한다.
필요한 사람이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렇게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나 싶다. 너 없으면 죽고 못 산다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그들 모두 잘들 살고 있다. 꽤 오래 아버지 없이 살았지만 그럭저럭 살아냈고 형제 없이도 그럭저럭 외롭지 않게, 아니 그 외로움을 긍정하며 살아냈다. 솔직히 지금 장례식을 치르면 썰렁하겠지만 사는 동안엔 그럭저럭 살고 있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냉정히 말해 아내는 나 없이도 잘 살 사람이다. 나보나 능력 있고, 세상 물정 잘 알고, 그야말로 알래스카에서도 냉장고를 팔고, 사우디에서도 오리털 파카를 팔 수 있는 사람이다. 농담처럼 "당신 광고 대행사 AE 했으면 정말 잘했을 거야."하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그래서 아내와 사는 동안 '내가 죽으면 이 사람 혼자 어떻게 사나.', '나 없으면 살 수 있을까?'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딸에게, 아주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나도 네가 필요하다.
종종 딸이 내 옆에서 잘 때가 있다. 이 해 가을에도 그랬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내 옆자리로 오더니 자리를 굳혔다. 처음엔 반듯하게 잘 잔다. 그러다 좀 열이 오른다 싶으면 이불을 차고 뒤척이고 난리다. 새벽녘, 결국 딸에게 이불을 덮어주다 잠이 깬다. 예전에 썼듯이 이불을 몸으로 깔고 있으면 좀처럼 이불이 빠지지 않아 예비로 이불 하나를 근처에 뒀다가 투망처럼 아이 몸으로 던진다. 그렇게 이불 두 개를 번갈아 덮어준다.
열 시쯤, 딸이 잠들고, 한 시간이나 두 시간쯤 서재에서 딴 짓을 한 뒤에 잠자리에 든다. 어두운 방, 아내와 딸이 자고 있다. 눈을 감는다. 잠이 안 오면 눈을 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딸의 형상을 찾아낸다. 얼굴도 찾아낸다. 가만히 손을 뻗어 머리칼을 넘겨주고, 얼굴을 쓰다듬는다. 다시 잠을 청한다. 아직 잠이 안 온다. 그러면 딸의 어깨에 잠시 얼굴을 갖다 댄다. 그 어깨로 전해지는 딸의 온기와 심장 박동 소리와 아이의 향기를 맡는다. 잠시 후, 출처 없는 불안과 맥락 없이 불쑥 찾아오는 우울, 그 불안과 우울함이 만들어낸 불면이 어둠 속으로 물러간다. 잠을 청한다. 더듬어 아이의 손을 잡고 잠을 청한다. 나도... 네가 필요하구나.
멀지 않았다.
딸의 애교가 시월말의 단풍처럼 절정이다. 혀 짧은 소리도 잘 내고, 재미있는 표정도, 희한한 액션도 잘한다. 날 때부터 애교를 장착하고 나왔다. 우리 집이나 저쪽 집이나 족보에 애교 있는 사람은 없고, 아내도 애교 DNA가 없어서 친자소송... 까진 아니고 여하간 미스터리다. 외모와 함께 애교 또한 출처 확인이 안 되니, 서로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때론 다들 자기를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내는 애초에 내가 애교가 있었던 것 같다고 우기기도 한다.
아빠 어깨쯤에 다다른 녀석이지만 여전히 안아달라고 한다. 안아준다. 안아준다. 안아준다. 애교를 부리면 받아주고, 봐달라면 봐준다. 가을 단풍이 겨울 서리에 자리를 내 준 뒤 사라지듯, 열 살의 애교 또한 짧으면 내년, 길어야 내후년까지가 절정이리라. 그러니 만끽하려 한다. 그 뒤, 봉인된 애교는 한참이 지나 지 남자 만나야 다시 나오겠지. 그 애교를 잘 받아주는 남자를 만나야 할 텐데... 사는 게 힘들어 애교는커녕 미소 짓기도 힘든 인생이어서는 안 될 텐데. 늙은 아빠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