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읽은 단어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63

by 최영훈
"운명은 죄를 감안하지 않기에,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무자비해질 수 있었다."
<남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원한 맺힌 흉터 하나가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칼의 형상>,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1월엔 에셔의 그림이 표지로 있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었다.

진중권 전에도 보르헤스를 언급한 이들은 많았는데, 다들 왜 보르헤스, 보르헤스 했는지 알 것 같다.


잠시,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해 말하자면...

진짜가 진짜인지 어떻게 진짜로 알 수 있나? 진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참과 신에 다다르는 길은 무엇인가? <픽션들>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 앞의 질문들은 전반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 실린 소설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전반부에 실린 소설들은 세상에 없는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에 없던 제2의 돈키호테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에 없는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에 각주를 단다. 심지어 언급한 작가나 학자 중에는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이 교차한다. 친절하게도 지금의 번역본에는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을 가려주지만, 이 소설이 나온 40년대에, 만약 이 각주가 없이 이 소설을 읽은 이들은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해 골치깨나 썩었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왜 그랬을까?

그는 이성의 강박, 학문의 강박을 비웃는다. 원전을 찾아내려는 강박, 세상의 모든 문제의 답을 알아내겠다는 강박, 세상의 모든 문제의 답을 갖고 있는 어떤 종교나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걸 찾아내려고 하는 강박을 말이다. 그 기원을, 그 진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바벨의 도서관>처럼 불가능한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바빌로니아의 복권>처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추첨에 의해 운명 지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린 그건 눈치챌 수 없다고, 절대로 우리 인생의 엄청난 비밀을 찾을 수 없다고, 그것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음을, 보르헤스는 말한다.


마음으로 알게 된 개념

결국 하나의 개념은 사전적 의미로는 다 알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보고 싶다."라는 말의 의미를 겨우 알게 됐다. 이 깨달음은 이제 겨우 사전을 벗어나 내 감정의 울림을 통해 그 목소리를 얻고 있다. 처음엔 딸이었다. 어느 해부터인가 밖에 있다 해가 지면 딸이 보고 싶어졌다. 단순히 밥은 먹었는지, 학교를 잘 갔다 왔는지 궁금한 차원이 아닌, ‘얼른 집에 가서 보고 싶다.’라는 감정이 들었다. 이 감정이 너무 생소해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리고 이 생소한 감정에, 난 "보고 싶다."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밖에 없었다. 보르헤스가 지적한, 우리가 이성으로 알고 있는 개념들은 그저 개념들뿐임을, 이 깨달음의 순간을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다른 "보고 싶다."라는 울림을 보르헤스를 읽던 11월의 화요일에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자식이 보고 싶다.”라는 울림을 몇 해 전 알았다면 11월의 어느 화요일에 솟아오른 "보고 싶다."라는 단어의 감정적 울림은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독도 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미망인인 박영희 여사를 인터뷰하고 포항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딸이 보고 싶었고, 그 생각이 불쑥 어머니로 이어졌다.


난생처음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그런 종류의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최소한 기억할 수 있는 시절까지는 그렇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신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이 화요일 전까진, 이 날 솟아오른 감정과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잘 계시는지, 잘 사시는지, 근황이 궁금한 정도였다. 명절 때가 되면 명절은 잘 지내고 계시는지 정도였다. 아프다고 하시면 잘 치료는 받으셨는지 정도였다.


그러나 화요일에 느낀 감정은 그 감정과 다른 감정이었다. 순수하게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문장의 울림과 여운을 쉰이 다 돼서야 느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2021년 11월 16일, 포항에서 울산으로 돌아오던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다. 이제 겨우 이 단어와 문장은 마음의 사전에 기록됐다.


"딸이 보고 싶다."라는 말끝엔 미소라는 느낌표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끝엔 ‘울컥’이라는 마침표가 찍힌다.



"이제 프러포즈하는데... 내한테 장미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책만 읽게 해 준다 카더라고. 낭만적이지 않아요?

그때 스무 살이었는데.. 그 말 믿고... 결혼했죠."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위에 가면 장미꽃 가득한 정원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라나."


이 날 인터뷰에서, 박영희 여사가 하신 말씀이다. 스물에 가시밭길에 들어선 미망인은 아흔이 넘으셨다. 곱게 늙으셨다. 기억도 생생하셨고 말씀도 정확하셨다. 두 시간 넘게 대화하는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던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셨다. 몇몇 부분에선 함께 울컥했다.


"딸이 보고 싶네."

"딸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란교?"

"죽었거나, 이혼했거나, 이혼하고 죽지 않았을까?"

포항에서 돌아오는 길...감독과 이런 대화를 했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던진 반문은 우리의 앎이, 상식이, 순리적 흐름이 우리 인생에 기준이 될 수 있는가이다. 어떤 잣대도, 어떤 구조도, 어떤 경험과 지식도 우리 인생의 내일을 예견하고 그려낼 수 없음을,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미로의 다음 코너에 답을 줄 수 없음을, 내일이라는 어둠에 빛을 던져 줄 수 없음을... 그걸 말하고 있다. 삶은, 그래서 경이로운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