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다.
은채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은채의 낯가림 때문에 엄마, 아빠는 은근히 걱정을 했습니다. 3살 가을쯤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은채는 아침에 오면 혼자 앉아서 친구들 노는데 선뜻 끼어들지 않고 우선 지켜보곤 한다고 했거든요. 심지어 네 살 반이 끝날 때까지 자기 담임선생님 말고는 다른 선생님하고는 대화도 잘 안했죠. 집에 오면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잘만 말하는데 어린이집에서는 안 그런다니 답답할 노릇이었죠. 그나마 다행인 건 예림이나 지유 같은 친구들을 사귀어서 어울려 노는 법을 익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어린이집은 네 살 반까지 있어서 부득이하게 새로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찾아야 했는데 전 동네 친구들과 많이 만나라고 집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제법 규모가 큰 어린이집에 보내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하늘빛 어린이집 다섯 살 반에 자리가 났죠.
은채는 그곳에서 서서히 사회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심, 승부욕도 보여줬고 자기가 잘 하는 것이 뭔지 서서히 알아갔습니다. 여섯 살 때는 다른 친구들은 한글을 아는 것 같다고 저보고 글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재를 사다가 가르쳐줬죠. 알고 봤더니 그 글을 안다는 친구도 겨우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는 애였지만 말입니다.
은채는 6세반 때 김미란 선생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피웠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셨고, 이 어린이집에서 원감을 맡고 계시는 선생님은 원래 내정 되어 있던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급작이 그만두게 되셔서 6세반을 맡게 됐고, 그 반을 그대로 맡아 7세까지 가르치셨죠. 김미란 선생님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 이 반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에 맞게 자신의 장점을 알아 갔고, 그러면서 개별적인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은채도 그랬고요.
그래도 초등학교에선 어떻게 생활할지 솔직히 알 수 없었습니다. 제일 궁금했던 건 사회성이었죠.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은채는 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 나 학교에서 재하네 형 봤어.”
“어, 그래? 인사 했어?”
“응. 내가 먼저 재하네 형이죠. 하고 물었어. 그랬더니 그 오빠가 너 누구니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재하랑 같은 어린이집 다녔던 은채라고 해요. 했어.”
“그랬구나. 재하네 형 이름이 뭐야?”
“아. 오빠가 자기는 현수라고 했어.”
전 좀 신선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죠. 또 동네 어린이집 친구인 재하의 형과 사전에 통성명을 하고 알고 지냈던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선배로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먼저 다가가 인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은채는 몇 번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남자 친구여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학교에 데리러 가면 어린이집 친구나, 같은 반 친구들을 보게 되는데 은채는 항상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어! 유찬이다. 야. 정유찬. 안녕?”
은채의 인사에 능목 꼭대기에 매달려 있던 유찬이도 손을 들어 인사를 했습니다.
주말, 토요일엔 부경대학교 평생 교육원에서 하는 <동화야 놀자>라는 프로그램에 참여 합니다. 오전 열시,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인 음악 줄넘기를 하고나면 열두시에 하는 프로그램까지 한 시간 정도 틈이 나죠. 그 때 우리 부녀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부경대학교 벤치에 앉자 마시면서 꽃도 구경하고 얘기도 합니다. 저번 주말에는 그곳에서 은채가 반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 조용우다. 야! 조용우(왜 애들은 다 성을 붙여 이름을 부를까요?). 안녕!”
은채는 제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용우를 불렀고 용우는 놀라서 은채를 보고 수줍게 인사를 했죠. 은채가 너무 크게 부르는 바람에 용우와 같이 있던 엄마도 절 보게 되서 본의 아니게 학부형끼리도 인사를 하게 됐죠.
등하교 길에 남자 친구들을 만나면 은채는 항상 누군지 알아보고 먼저 큰 소리로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남자 친구들은 깜짝 놀라면서 쭈뼛대며 인사를 하거나 수줍게 인사를 하죠. 엄마 얘기를 들어보니 은채는 다른 반 남자 친구들하고도 잘 알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같이 프로그램을 하거나 돌봄 교실을 하는 친구들하고도 통성명을 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채가 지나가면 엄마는 처음 보는 남자 친구들도 다가 와서 인사를 하고 은채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은채가 어린이집 다닐 때도 거리나 마트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보면 “어. 선생님이다.”, “어. 정재하다.”까지는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그러니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하는 것은 아빠가 가서 하라고 시키지 않는 이상 좀처럼 먼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7세 반 무렵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올라가서는 이젠 아예 먼저 다가가서 아는 척하고 인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언제, 어디서 생긴 걸까요? 얼마 전 학교 상담 시간에 엄마가 듣고 온 담임선생님의 말과 이전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은채는 또래 중에서 키가 큰 편에 속하고 눈도 커서 사람들 눈에 잘 띕니다. 또 은채의 재촉에 못 이겨 저한테 일찍 한글을 배워서 어린이집에서부터 친구들을 대신해서 뭔가를 써주면서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잘하는 게 있다는 걸 알기 시작했죠. 또 학교 가서는 돌봄 미술 선생님에게 그림도 잘 그리고 꼼꼼하게 색칠 한다고 칭찬도 받았고요. 담임선생님은 그리거나 만드는 시간에 약간 덜렁대기 마련인 남자 짝을 좀 도와주라고 은채한테 몇 번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은채는 쉬는 시간도 잊고 짝을 도와줬고요.
아이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뭔가 다른 친구들보다 잘 하는 게 있고, 그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또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에게 일정한 미션을 부여 받고 그걸 제대로 수행하면 자신감이 더 커지고요. 아울러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나름의 자신의 역할을 알게 되고 다른 친구들과 놀면서 자신만의 장점이나 강점을 알게 되면 그것을 중심으로 나름의 자존감이 형성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엔 아빠가 은채 등굣길을 함께 했습니다. 가는 길에 우연히 재하 형제를 만났죠. 재하는 은채를 보고 움찔 하더니 이내 슬며시 웃었습니다. 그러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은채한테 와서 아는 척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앞서가도 결국엔 횡단보도 신호등에 붙잡혔고 은채와 나란히 서게 됐습니다. 재하는 안 보는 척 하면서 곁눈질로 계속 은채를 봤고, 입술 꼬리를 위로 올리면서 싱글벙글 했습니다. 이렇게 은채만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들이 많아질수록 은채의 사회성과 자신감은 높아지고 친구를 부르는 목소리도 더 커지지 않을까요? 쉬는 시간에 종종 은채를 찾아와서 줄넘기 연습을 방해만 하고 간다는 재하. 아직은 좋아하는 마음, 반가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지만 조금 지나, 3학년쯤 되면 둘이서 나란히 학교를 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