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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ul 27. 2022

인생의 누아르, 말의 행간

쉰이 두려운 아빠, 열 살이 신나는 딸. 65

표현에 담긴 진심, 진심 어린 표현   

11월 말의 하굣길이었다. 딸이 물었다.

"아빠 나 귀여워?", 질문은 글로 묘사하기 어려운 약간의 액션이 곁들여졌고, 목소리 또한 평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응, 귀엽지. 아빠가 아는 사람 중에선 네가 제일 귀여워. 아니 네가 유일하게 귀엽지."

내 대답을 듣고, 딸은 잠시 생각했다. 다시 물었다.

"그럼 엄마는?"

"엄마? 엄마는 섹시하지."

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 날, 점심으로 어묵 라면을 먹다가 불쑥 딸이 이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있잖아. 내가 귀엽지 하고 물었더니 아빠가 내가 유일하게 귀엽다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안 귀여워하고 물었더니, 아빠가, 엄마는 섹시하지, 이러는 거야."

아내는 웃었고, 딸은 다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교와 결혼 생활은 닮았다.     

결혼 생활은 외교와 비슷하다. 다른 부부는 모르겠지만 난 캐나다와 미국 같은 사이가 적당하다고 본다. 한국과 미국은 뚝 떨어져 있지만 혈맹인 관계고, 캐나다와 미국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그냥 데면데면한 이웃이다. 싸우지도 않지만 뜨거운 사이도 아니다. 말은 통하지만 긴 대화는 안 한다. 포옹은 하지만 으스러지게 안지는 않는다. 뽀뽀는 하지만 키스는 안 한다. 그리고.... 그만하자. 여하간 이런 사이다.    

 

딸은 요즘 엄마와 아빠의 애정 표현에 민감하다. 오래 연애했고, 오랜 같이 산만큼 약속대련 같은 애정 표현인데 그 표현의 행간을 알 리 없는 딸은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토하는 행동을 한다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또는 "아, 쫌~"하는 항의 어린 외침을 하던가...     


애정 표현이라는 게 거의 말의 성찬에 불과하지만 딸은 그 말에 담긴 진의를 가려낼 만큼 크지 않았다. 그저 오가는 말의 뜻에 집중할 뿐 인사치레나 행간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다. 


표현, 그 상황과 타이밍

모든 광고 카피가 그렇듯 당연한 말도 적절한 상황, 적절한 타이밍에 하면 특별하다. 예쁘다, 귀엽다, 섹시하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등등. 또는 "당신 요즘 왜 이렇게 말랐노." 같은 아내의 걱정에, "요즘 마누라 사랑을 못 받아 그런가?”, 뭐, 이런 멘트를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하면 된다. 그럼 "글나... 이리 와봐라." 뭐 이런 전개로...     


딸은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이 양반들 아주 좋아 죽는구먼.’하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없었거나 지나갔고, 둘 다 성격상 신혼부터 무덤덤했다. 오히려 그런 탓에 지금도 이런 표현을 별일 아닌 것처럼 툭툭 던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부모 사이가 좋다고 느끼는 건, 자신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9월쯤인가, 등굣길에 불쑥 "너 아빠랑 엄마랑 따로 살면, 넌 누구랑 살래."하고 물은 적이 있다.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때 딸이 엄청 당황스러워하며, "응?  갑자기? 왜?" 이 세 마디만 반복했었다. 


아직은 이별도, 죽음도 먼 얘기고 이혼도 드라마 속 이야기로만 여기는 애한테 이런 질문을 위한 대답은 어디에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집에서 보는 엄마 아빠는 그럭저럭 사이가 좋아 보였으니 아마 더 혼란스러웠으리라.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는 데 익숙한 아비와는 달리 딸의 인생과 세상은 아직 핑크빛이다. 고작 시험에서 문제 한 두 개 틀리거나, 음악 줄넘기가 잘 안 되는 것이 인생의 최대 고민이다. 친구들도 자기를 좋아하고, 선생님도 자기를 좋아하리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딸에게 인생의 누아르를 미리 얘기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보길 원하고 듣길 원한다면 언제든 준비는 되어 있다. 그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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