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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30. 2022

속옷/란제리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옷이 서 있는 경계

모든 옷은 경계에 있다. 모든 옷은 갈등 끝에 선택된다.

이미지와 실용성, 주체와 타자의 욕망 사이에서.

옷을 사는 소비자는 이 경계에서 망설인다.      


옷은 누구, 무엇을 위해 선택되는가? 추위와 더위를 막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다음은 가림을 위해서. 그 가림이 옷에 이미지를 덧입힌다. 이 가림이 덧입은 이미지로 인해 우린 사소한 논쟁에 빠져든다. 이 가림은 나를 위한 것인가 타자를 위한 것인가? 이건 허수아비를 만들 때 공을 들일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논쟁과 비슷하다. 허수아비의 꾸밈은 새를 쫓기 위함인가 허수아비를 위함인가 아니면 그것을 만든 사람을 위해서 인가 와 같은.     


단순히 말하면 SPA 브랜드들은 옷의 근본적인 필요에 집중한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옷을 강조한다. 반면 어느 수준 이상의 브랜드들은 그 이상의 뭔가를 덧입힌다. 근본적인 필요를 넘어선 뭔가가 덧입혀지면 그것은 패션이 되고 유행이 되고, 유행의 큰 물결을 내려다보는 사치스러운 브랜드가 되기도 한다. 영어로 명품은 Luxury Goods다.     


속옷의 이쪽과 저쪽

이 두 경계의 갈등이 더 첨예화되는 것이 속옷이다. 속옷은 오직 입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시장엔 오직 아주 정직한 디자인의 흰색 면 속옷만 있으면 된다. 레이스나 망사로 엉덩이나 테두리를 장식할 필요도 없고, 엉덩이 대부분을 드러내야 하는 끈 팬티도 필요 없다. 신용카드만큼 두껍고, 큼직하게 로고가 써진 탄력 밴드가 있는 남자 삼각팬티나 드로즈도 필요 없다. 결정적으로 브랜드도 필요 없다. 좋은 면을 갖고 튼튼하게 만들면, 그런 속옷을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아무 유명 브랜드에다 란제리나 이너 웨어를 갖다 붙여 검색하면 그 브랜드의 속옷이 나온다. 그만큼 대부분의 유명 브랜드에서 속옷 라인에까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탓에, 심지어 속옷조차 유행이 있다. 디자인과 색 모두 말이다. 또 결정적으로 나이와 용도, 소비지의 기호에 따라 그 시장이 아주 섬세하게 세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제품의 디자인과 기능 또한 다채롭다. 여기서 이 세분화가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 따져볼 수 없다. 다만 성적 도구로써 속옷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보려 한다.     


성적 타자와 속옷

우스갯소리로 연인이나 배우자가 바람나면 속옷부터 변한다고 한다. 나름의 일리가 있는 말인가? 일리가 있다면 그 변함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걸까? 연인, 배우자 사이에서 속옷은 나를 위한 옷에서, 타자를 위한 옷, 그리고 다시 나를 위한 옷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성적인 대상을 만나기 전까지 그저 그 가능성만 가진 존재다. 그 존재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앞서 말한 클럽이나 나이트를 갈 때 소위 승부 속옷 같은 것을 입고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진 않는다. 볼 사람이 없을 때, 또는 보일 상황과 사람이 없을 때 속옷은 겉옷 안에 입는 첫 번째 옷에 불과하다.      


여성의 경우 신체를 보정하기 위한 기능이 첨부될 수 있지만 그것이 성적 타자를 향하지만은 않는다. 이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틀에 맞추기 위해 성적 긴장감 없이도 여성들은 자기 몸을 변형시켜야만 했다. 중세 이래로 여성들은 그런 시달림 속에서 수많은 옷을 입어야 했고, 몸을 스스로 훼손시켜 왔다. 즉 사랑의 대상으로써 존재하기 전에 이미 사회가 옳다고 규정한 신체와 외형을 가진 규격적 존재로써의 여성이 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 왔던 것이다. 얼핏 보면 자해 같지만 멀리서 길게 보면, 그건 일종의 사회적 폭력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가슴을 크게 보이기 위한 뽕과 엉덩이를 크게 보이기 위한 속옷들이 여성들을 훈육하고 재단한다. 이것은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위해 노력하라고 강요되는 것들이다. 그 강요의 바람잡이가 마케팅이다. 광고, 홈쇼핑, 수많은 패션 잡지들. 표준 이하로 마른 여성이 표준보다 훨씬 큰 가슴을 드러내고 런웨이를 걷는 모습. <빅토리아 시크릿>은 이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여성을 압박했고 남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줬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속옷

그러나 여성이 진정으로 타자를 위해 속옷을 고민할 때는 오직 단 한 사람의 성적 대상을, “자발적”으로 선택했을 때이다. 그 상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말이다. 그 타자가 전하는 텐션, 즉 긴장이 속옷을 고를 때의 텐션으로 이어지고 그 선택된 속옷은 겉옷의 텐션을 유지시키고 그 옷차림의 텐션은 타자가 던지는 시선 속에서 더 팽팽해진다.      


이 시선은 성적 상품으로써의 대상도 아니고 사회적 전시물로써의 여성을 향한 시선도 아니다. 오직 한 사람을 향한 시선이다. 결국 겉옷에서 속옷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맨살까지 타자의 시선은 꿰뚫어 온다. 이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순간을 위해 우린 화려한 은폐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밴드가 넓은 드로즈를 입고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 같은 속옷을 입는다.


그 속옷들은 벗겨지기 위해 입혀져야 하고 그 벗겨지는 소명을 이뤄내기 위해 비장하게 입혀진다. 이 긴장과 비장함은 사랑의 유효기간 동안 유지된다. 그리고 그 유효기간이 끝나면 속옷은 다시 일상의 기능으로 돌아간다. 몇 년 사귄 연인이든, 신혼의 단꿈이 끝난 부부든 이제 타자의 속옷은 그저 속옷일 뿐이다. 더 이상 상대에게 속옷을 선물하지 않는다.     


가림과 함께 사라지는 것

그렇다. 속옷 선물은 여전히 당신을 성적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양자 간에 여전히 성적 긴장, 기대,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속옷을 내 돈으로 산다거나 그녀가 당신 앞에서 위에 속옷을 입고 있지 않거나 샤워를 하고 난 뒤에 더 이상 가리려 하지 않으면, 그 텐션은 사라진 것이다.


즉 속옷의 가림은 연인, 특히 여성의 자기 신체의 가림과 은폐는 성적 대상에게 여전히 긴장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으면 당신, 특히 남자인 당신은 그녀에게 친구나 오빠, 심지어 가구만큼 편한 존재인 것이다.      


이 순서에 대해선 그 앞뒤를 구분할 수 없고 책임소재를 가리기 어렵다. 연인의 시선과 존재가 일상적이어서 속옷에 신경을 안 쓰고 벌거벗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신경을 안 쓰고 연인을 집의 가구처럼 무신경하게 취급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말이다. 이 시점 이후, 새로운 모험을 찾기도 한다. 성적인 모험, 바람을.      


에로스적 신체의 효용성

속옷은 확장된 신체, 에로스적 신체의 일부다. 그래서 전시된 속옷은 소비자를 걸러낸다. 쇼윈도의 전시된 속옷은 최적화된 에로스적 몸에게만 메시지를 보낸다. 그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몸매를 강조하기 위한 속옷은 신체를 불편하게 한다. 남자의 신체 구조상 타이트한 속옷은 걷는 걸 불편하게 하고 여자의 신체 구조상 타이트한 속옷은 가슴을 압박하고 몸에 자국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적 존재가 된 남녀는 기꺼이 에로스적인 신체에 적합한 속옷을 선택한다. 불편함은 에로스적 신체가 감수해야 될 고통이다.      


에로스적 존재로써의 능력이 소멸되면 우린 편안함을 추구한다. 하나의 홈쇼핑에서 뽕과 와이어가 들어간 브래지어와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스포츠 브래지어 같이 생긴 편한 속옷을 시간 차를 두고 파는 것은 타자의 시선도 신경 쓰는 소비자와 자신의 신체적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로스적 신체로서의 효용성을 잃어버린 사람도 종종 속옷에 신경 쓸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다 같이 라커를 써야만 하는 헬스클럽이나 수영장 등을 이용할 때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타자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이지 에로스적 타자는 아니다. 이때의 속옷은 깔끔하고 세트이기만 하면 되지 화려하거나 섹시할 필요가 없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깔끔하고 무난한 브랜드가 노출되면 된다.     


막과 막 사이의 전환 장치

생각해보면 연인들, 즉 섹스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한 연인들에게 속옷은 찰나의 시간에만 노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옷 없이 겉옷을 입고 연인을 만나지 않는 것은 그 한 장의 속옷이 연극의 막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속옷의 있음과 없음의 차이는 막과 막 사이의 사건 전환이다. 그 벗김의 행동을 통해 연인 양자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모텔이든 자취방이든 둘만의 공간에 들어가면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완전 탈의로 이어진다.      


그 반복의 결과, 모텔 밖과 안의 막만 존재하고 모텔 안에서의 속옷이라는 막은 사라진다. 이 막의 사라짐은 연인 간의 섹스에서 극적인 요소를 사라지게 한다. 이 당연시됨의 반복은 에로스를 일상적 행위로 전환-어쩌면 전락-시킨다. 이때부터 에로스는 연인이 함께하는 많은 일상적 행위 중 하나가 된다. 식사, 영화, 산책, 커피, 여행처럼 말이다. 이 일상적 편안함을 어느 한쪽이라도 권태로 느끼면 결국 그 속옷의 막을 다시 만들어 줄 대상을 찾는다.     


우리는 이 가려짐의 미학과 의미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한 꺼풀의 가려짐, 막과 막 사이의 전환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볍게 여김으로 인해 에로스를 비롯한 사랑의 많은 것이 일상화되어 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동거는 연인에게서 에로스적 의미를 앗아가고 일상적 의미를 크게 키우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연인/배우자를 알아가고 익숙해지는 것과 연인/배우자에 대한 성적 긴장을 공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모든 낡은 것은 한 때 새것이었고 모든 남편과 부인은 한때 신부와 신랑이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거실에 붙어 있던 커다란 결혼사진을 내리듯이 성적 긴장감도 그렇게 세월의 막 뒤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당연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순리라고 여기고 다들 살면 가정 법원이 바쁘지는 않겠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당연한 것이라고 스스로에 거짓말을 하지는 말자. 돌아보면,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대사처럼, 뜨거웠던 순간, 뜨거울 수 있는 순간은 아주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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