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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9. 2022

클럽/성인 나이트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일탈의 공간과 시간  

엄밀히 말하면 섹스는 사회적 주체를 소거시키는 작업이다. 알랭 드 보통이 <인생학교-섹스>에서 말했듯이 일본과 우리나라의 섹스리스 부부의 원인 중 하나도 가정이라는 사회적 주체와 섹스를 하는 야성적이고 원초적인 유희를 하는 주체와의 간극의 극복이 쉽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애할 때 그것을 즐겼던 커플도 결혼하면 변할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방패 삼아.     


이 간극을 넘나들기 위해 앞서 말했듯이, 종종 술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술은 이성을 인위적으로 느슨하게 만든다. 체온을 올려서 타자로 인한 성적 흥분과 술로 인한 고양과 고취를 혼동시켜 섹스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이런 술을 동반한 전환의 공간, 그러니까 사회적 존재에서 오직 섹스라는 유희를 원하고 실행하려는 존재로 전환시키는 대표적 공간이 클럽과 나이트다.      


닮은 듯 다른 공간

두 공간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나이트는 이제 앞에 성인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과거에는 그냥 나이트클럽이었다. 그렇다고 클럽이 미성년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성인”이라는 수식어는 같은 선수지만 신인과 노장을 구분 짓는 단어이고 골프 투어에서 정규 프로 투어와 은퇴하거나 나이 든 선수들이 하는 시니어 투어를 구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는 짓과 그 짓에 담긴 욕망의 본질은 같다.


물론 공간의 논리와 만남의 전략과 전술면에서는 차이점이 있다. 클럽은 자기애의 공간이다. 그곳에 가는 청춘 중에는 음악과 춤을 위해 가는 청춘들이 존재한다. 타자의 관심이나 섹스라는 유희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진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진심이든 내숭이든). 그러나 성인 나이트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부킹 때문이다. 부킹은 본질적으로, 그래서 시니어의 것이다. 상대적으로 클럽의 선수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성인 나이트에 부킹이 존재하는 건 왜일까? 이를 위해 웨이터들이 동분서주하는 이유는? 그것은 두 개의 공간이 내면적으로 서비스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두 공간은 표면적으로 세 개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음악, 술, 춤. 그러나 음악과 술과 춤은 본질적으로는 부수적이다. 클럽에서든 나이트에서든 말이다. 클럽에서의 본질은 불금이다. 음악과 술과 춤은 그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기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     


클럽은 청춘이 불을 지르기 위한 공간이자 매개체다. 여기서 모든 열정을 불태울 수 있고, 그곳에서 처음 보는 누군가를 만나 다른 곳에서 다른 불(?)을 지를 수도 있다. 반면 성인 나이트는 불금이든 언제든지 간에 나이트라는 공간 소비 이전과 이후의 연속성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특히 후의 시간과는 그 관계가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 요즘 4, 50대가 나이트를 가면서 "난 요즘 나이트에서 음악 듣는 게 좋더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또는 "나이트에서 춤추면 스트레스가 풀려."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춤이  성인을 위한 여흥과 스포츠의 수단이 되어 나이트로부터 분리된지는 꽤 됐다. 볼륨댄스를 배우는 곳도 많고, 방송 댄스를 시청이나 구청, 심지어 주민센터의 문화센터에서 가르치는 곳도 있다.     


결정적으로 클럽은 전단지나 포스터가 부재하거나 특별한 행사-핼러윈, 밸런타인데이, 여름의 바캉스-때나 사용되지만 나이트는 포스터가 절대적이다. 부산의 호박 나이트라는 곳은 1.5톤 트럭을 개조해 신데렐라에나 나올 법한 대형 호박을 싣고 다닌다. 홍보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어떤 클럽도, 그러니까 경성대 앞, 해운대, 서면 등의 어떤 클럽도 그런 홍보를 하지 않는다. 오직 드나드는 사람의 SNS나 그 사람의 패션, 음악, 춤 등으로 그 브랜드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갈 뿐이다.     


일탈의 의미

클럽 이후의 섹스는 클럽에서의 열기와 상호 간의 육체적 부대낌의 연장선이다. 클럽에서 옷을 입고한 육체의 대화가 모텔이나 호텔에서 옷을 벗은 채 이어진다. 그러나 그 대화의 가능성 획득은 오롯이 소비자에게 달려 있다. 누구도 다리를 놔주지 않고 주선해주지도 않는다. 클럽은 그저 열기를 만들어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클럽은 짐짓 손님들의 열기와 부대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쿵쾅댄다.     


그러나 나이트는 입구에서부터 "우리는 당신들의 일탈과 섹스를 확실히 책임지겠다." 하는 소명을 드러낸다. 부킹 실력은 웨이터들의 능력의 바로 미터다. 웨이터의 고정 고객 확보의 원천이다. 그들이 그렇게 눈에 띄는 닉네임을 장착하는 이유다.      


이런 나이트의 기능은 포스터의 메시지에 오롯이 드러난다. 출연 가수들도 익숙한 가수들이다. 이천 년대 초반, 심지어는 90년대 활동했던 가수들이다. DJ나 밴드는 몸매를 과시하고 노출한다. 나이 제한도 분명하다. “서른다섯 이하는 받지 않는다.”, “서른 이하는 받지 않는다.”와 같은 가이드라인이 있다. 클럽과 정반대 되는 출입제한이다.     


결국 나이트에서 부킹이 계속해서 이뤄지는 것은 삼자-남자 손님, 여자 손님, 웨이터(나이트)-가 이 공간의 목적과 용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섹스를 원하고, 물론 여자도 원한다. 그러나 여자는 수동적으로 버티는 척하고 웨이터는 그 수동적인 척을 적당한 끌어댐으로 더욱 도드라지게 해 주면서 그녀의 윤리 의식과 나이트에서 거래되는 성적 대상으로써의 시장 가치를 올려준다. 이것은 일종의 약속 대련, 합을 맞춘 액션씬 같은 것이다.      


‘내가 좀 버틸 테니 넌 내 손목을 잡고 끌고 가줘.’

‘괜찮은 남자한테 좀 끌고 가줘.’     


반면 남자들도 확고한 싸인을 보낸다. 나이트에서 테이블을 잡는 것보다 룸을 잡는 사람들은 더욱 우린 춤이나 음악, 심지어 술 따위엔 관심 없다는 강렬한 싸인을 보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린 다른 손님보다 더 많이 술을 마시고 더 비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싸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여자 손님을 넣어 달라는 암묵적 압박을 웨이터에게 보내는 것이다. 아니 노골적 압박이다.     


여자들도 룸에 끌려가는 것을 당연히 선호한다. 제 발로 찾아다닐 수는 없으니 웨이터가 알아서 룸으로 끌어다 주길 바란다. 나이트가 증권 시장이라면 웨이터는 일종의 딜러다. 증권사 딜러나 금융회사의 펀드 매니저들은 우수한 기업의 주식과 펀드들을 열심히 가려내어 고객에게 소개한다. 고객은 그 중간의 매개체-증권사, 딜러, 펀드매니저-가 없으면 주식회사와 기업에 대해 알 수 없고 거래도 힘들다.


나이트의 여자 손님은 남자 손님의 정보에 접근이 어렵다. 어둠 컴컴한 조명과 소음이 장애요인과 장벽이 된다. 사람이든 주식이든 이렇게 정보가 불명확하면 선택의 혼란을 겪으며 결정을 주저한다. 술과 음악과 춤이라는 긴장 완화제가 이 망설임을 일부 허문 뒤 웨이터의 안목에 기대어 움직일 때 온전히 허물어진다.      


드래프트와의 유사성

결국, 클럽을 통한 원나잇과 나이트를 통한 원나잇은 그 충동성 면에서 전자가 훨씬 강렬하다. 클럽에서의 선택은 오롯이 소비자의 몫이다. 정보의 포커스도 오로지 상대의 외모와 이미지에 국한된다. 그 시끄러운 곳에선 호구조사가 불가능하다. 클럽의 소비자들이 서로의 정보에 관심이 있기나 할까?     


반면 나이트에선 긴 호구조사가 이어진다. 물론 그 정보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나이트에선 기본이라는 게 존재하기 때문에 어찌 됐든 테이블에 깔린 술과 안주를 다 먹는 동안 대화를 하며 어쩔 수 없이 서로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음악과 춤에서 격리된 룸이라는 공간에서는 오직 상대의 정보 파악만이 유일하게 할 일이다.     


그 가늠의 시간이 길어지거나 부킹의 교환이 빈번할수록 남자 쪽 룸의 자본 출혈은 당연히 심해진다. 밤새도록 맥주 몇 병과 양주 한 병으로 버틸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여자 쪽에서도 생각해보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가치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여자 손님 입장에서는 이건 일종의 드래프트 같은 것이다. 프로 스포츠의 드래프트 말이다. 드래프트의 본질은 한 선수가 아마에서 프로로 진입하는 전환의 시점이다. 나이트도 마찬가지다. 나이트에서는 가장 성적 상품성이 높은 사람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호출되고 부킹 되어서 나이트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이름이 불릴 확률은 낮아진다. 소위 에이스들은 이미 1차 지명에서 줄줄이 불리고, 나머지는 2차, 3차로 내려간다.     


그런데 나이트에서의 드래프트는 여성의 희소성으로 인해 더 초조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프로 스포츠 구단이 남자라면 선수들은 여자라고 보면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는 팀은 적고 선수는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 나이트에서는 프로 스포츠 구단 역할을 하는 남자가 훨씬 많고 여자는 적다. 이런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자정이 넘도록 드래프트 되지 않았다면 회의감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건 룸을 차지하고 비싼 술을 테이블에 깔아 놔도 드래프트를 성사시키지 못하는 남자 쪽도 마찬가지다.      


클럽은 드래프트도, 초조함도 부재한다. 그 시도 자체가 불타는 금요일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음 자체가 그 초조함을 상쇄한다. 어차피 다음 주말은 오니까. 그러나 나이트는 다르다. 주말마다 나이트를 가는 성인은 없다. 다들 일상과 가정을 꾸려나가기 바쁘다. 나이트에 왔다는 건 정말 큰마음먹고 왔다는 것. 그러니 더욱더 성과에 쫓긴다.      


클럽은 그 자체가 성과다. 거기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젊다는 걸 의미하고, 거기에서 춤을 춘다는 것 자체가 트렌디하다는 걸 의미하며, 거기서 다른 이와 대화를 했다는 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소통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청춘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나이트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성과란 오직 부킹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실패하면 나이트의 주체는 실패한 주체가 된다.


나이 든 남녀들은 초조하다.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일탈의 밤이 흔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모처럼 차려입은 옷이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해서, 간만에 정성 들여 한 화장이 슬슬 뜨기 시작해서. 상상해보면... 서글픈 장면이다.


그러니 금요일마다 클럽에서 노는 청춘들을 뭐라 하지 말아라. 그것도 다 한 때. 근처 대학가 클럽에서 밤새 놀고 남들은 출근하는 시간, 필자의 집 근처 유명한 국밥집에서 해장을 하는 남녀 청춘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응원을 하게 된다.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이제 다른 걸 해야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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