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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6. 2022

모텔(촌)=익명성+은신처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음지의 촌락 

모텔엔 음지의 역사가 있다. 대놓고 광고를 하거나 프로모션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떤 연인이든 한 번쯤 거기를 이용했을 것이고, 특히 자신만의 공간이 없는 연인이라면 애용하리라 짐작됐지만 대놓고 단골 모텔이 어디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설령 물어본다 한들 말해주기 민망했고.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음지에 있었다. 제법 최근까지, 그러니까 야놀자와 같은 사이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오프라인과 언더월드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텔들이 혼자 존재해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외의 산 밑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모텔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모텔들은 이웃하듯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줄지어 서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모텔촌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이러한 모텔들의 밀집을 어떻게 봐야 할까?      


다른 상품을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햄버거를 파는 프랜차이즈 매장 대여섯 개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아무리 붙어 있어도 건물 한두 개 정도는 떨어져 있지 않던가? 붙어 있더라도 대여섯 개는커녕 두세 개도 붙어 있기 쉽지 않던가? 당연히 경쟁을 피하고 싶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모텔들은 왜 붙어 있을까? 심지어 우리가 모텔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말이다. 동일 품목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으면서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장소들이 있다. 용산전자상가도, 농수산 시장도, 또 몇몇 도시의 지하상가에 있는 수십, 수 백개의 옷 가게들도, 심지어 보수동 책방 골목도 그렇다. 그러나 그 가게들, 그 상가들조차 자잘한 차별점으로 경쟁을 피한다. 취급하는 제품과 브랜드가 달라 타깃이 조금씩 다르다.     


모텔이 모여 있는 이유

그렇다면 모텔도 그런가? 브랜드가 다르고 인테리어가 다르고 이에 따라 타깃이 다 다르다고 해야 하나? 우린 그 차이를 알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텔들의 군집은 그 결이 다르다. 모텔들의 모여 있음은 데이트 프로그램의 효율성과 야바위꾼의 섞음, 그 두 가지 테크닉의 혼합이다. 


연애와 효율성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데이트와 효율성은 어울린다. 앞서 말했듯, 요즘 같은 멀티플렉스 시대에는 한 공간에서 데이트의 모든 과정의 해결이 가능하다. 쇼핑, 식사, 티타임, 후식, 영화. 여기까지는 전시된 데이트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으며, 영화관을 제외하면 누군가에게 카톡이나 전화가 와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후기도 올릴 수 있다.     


해가 지고 난 후부터는 효율성이 중요하다. 아직 진도가 안 나간 커플은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러나 선을 넘은 커플은 다음 순서를 향한다. 저녁을 먹고 가볍게 한잔 한 뒤, 모텔로 향한다. 아예 노을과 함께 모텔로 향하던가.     


결국 모텔촌의 기능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기능과 비슷하다. 데이트를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지 영화를 보기 위해 데이트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멀티플렉스는 연인들에게 데이트의 공간이지 영화 감상의 공간은 아니다. 많은 영화 중에서 적당한 걸 고르면 된다. 모두가 보는 영화, 또는 연인의 취향이 맞는 영화를.

     

물론 고르는 과정에서 경제적, 성적 헤게모니가 작동할 수 있다. 누가 돈을 내는지, 또는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개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서의 영화는 모텔을 고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고르고 보는 행위가 공인된 데이트의 전시된 행위라면 모텔에서의 섹스는 은밀한 행위, 익명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고. 

    

익명성과 은신처

모텔은 익명의 공간이자 은신의 공간이다. 이 완성을 위해 수많은 모텔들이 엎어놓은 야바위꾼의 그릇처럼 모여 있는 것이다. "누가 어느 곳에 들어갔는지 찾아보시오." 모텔촌이 모텔 밖의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이 임무의 완수를 위해선 거리적 효율성이 중요하다. 술집과 식당, 멀티플렉스가 있는 소위 번화가와 유흥가와의 거리 말이다. 그 동선이 길어지면 심리적 전희의 흥분은 사라진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익명성은 사라진다.       


왜 모텔에서의 섹스에선 익명성이 중요할까? 익명성을 위한 디자인은 모텔 어디에 감춰져 있을까? 모텔에서 행해지는 섹스의 99퍼센트가 혼외정사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섹스를 하거나 “아직”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섹스를 한다. 솔직히 섹스가 미래를 보장하는 통과의례로써 그 기능을 상실된 지는 오래됐다. 섹스라는 행위가 미래를 담보하는 저당물이 되면 그것은 유희가 아니라 의무가 된다. 적금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직" 배우가 "아닌" 사람과의 섹스가 "앞으로" 배우자가 될 사람과의 섹스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고, 그렇기에 그 섹스는 공공연해질 수는 있어도 공식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자, 다시 모텔로 돌아오자. 모텔은 다시 말하지만 익명의 공간이자 무명의 공간이다. 세련된 호텔의 외양을 갖추고 있고, 자동차가 동시에 두 대 이상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입구를 가진 모텔이라도 가림막이 처져 있다. 마치 중국집의 발이나 일본 식당의 노렌처럼 말이다. 사실 일본 식당의 노렌도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을 방지하고 식당의 이름을 쓰고, 또 직사광선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커튼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텔의 그것은 그런 실용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직 시선의 가림뿐이다. 그리고 안과 밖의 경계 지음을 위해서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숨을 수 있는 소도와 그 밖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과 같다고나 할까? 모텔의 주차장 가림막은 이제 더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진화했다. 그야말로 소도와 같은 도피처의 기능을 더 보장해주는 쪽으로 말이다. 


발처럼 내려와 치렁치렁했던, 그래서 바닥에서 두어 뼘 정도는 보였던 그 발들은 이제 자동으로 내려오는 가리개로 바뀌었다. 그 막들은 자동차가 다가오면 자동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간다. 들어오는 사람들이 실수로 들어올 것이라는 예상조차 안 한다. 들어오는데 왜 들어오냐고 묻지도 않고 들어오면 일단 나갈 것을 예상치 않고 막은 내려온다. 여기서부터 모텔의 익명성 보장은 시작된다.     


모텔이 묻지 않는 것 - 이름

그리고 호텔에는 있지만 모텔에는 없는 두 가지 것 때문에 익명성은 더 보장된다. 첫째는 이름을 묻지 않는다. 당신이 호텔에 갔는데 이름을 묻지 않고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고 연락처 기재를 원하지 않으면 그건 호텔이 아니다. 호텔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모든 걸 기록해 놓는다. 


그렇다. 만일의 사태에 대한 투숙객 정보 취합, 그건 세계 모든 호텔이 동일하다. 해외여행을 가면 당연히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알겠지만 출입국신고서에 투숙하는 호텔을 적어야 한다. 즉 공식적인 여행과 호텔 투숙에서 익명이나 무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모텔은 당신에게 관심 없다. 단지 당신이 내는 돈에만 관심 있을 뿐. 그래서 단골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동네 PC방이나 노래방처럼 알바하는 사람이랑 말을 트고 농담 따먹기를 하며 친해진 뒤, 은근슬쩍 할인을 받거나 시간을 더 주거나 하는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다. 


모텔은 당신이 원하기 때문에 고객을 지구상에서 잠시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곳이다. 지금 당신이 그 모텔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장담컨대 단 한 명도 없다. 당신이 신용카드로 결제하지 않았다면 더욱더. 그래서 싸구려 여인숙에서부터 모텔까지 많은 범죄자들이 은신할 수 있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장소로 호텔이 아니라 모텔을 택하는 것이다.      


로비의 시선

익명과 무명의 존재를 유지해주기 위해서는 시선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모텔과 호텔의 두 번째 차이다. 호텔은 사회적 공간이다. 과시적이고 사치스러운 공간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부산의 롯데호텔 본점의 커피숍은 맞선의 명당이다. 그리고 서울을 포함한 거의 모든 도시의 호텔 커피숍은 상견례,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 맞선 등의 장소다. 


격식과 허식의 끝판 왕 공간이 호텔 로비와 라운지다. 호텔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이는 공간이다. 호텔 입구에서 카운터까지 가는 여정은 호텔의 이미지와 품격을 압축하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지어지는 중소형의 소위 부티크 호텔은 모던함을 추구하면서 장식도 많이 절제하는 추세지만 대부분의 호텔들은 로비와 라운지 인테리어에 가장 많은 돈을 쓴다. 


실용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기능적인 곳은 카운터 밖에 없는 휑한 공간. 그러나 그곳은 호텔의 얼굴이고 투숙객과 이용객의 품격을 압축 제시해주는 공간이다. 로비와 라운지에선, 그래서 시선이 오간다. 서로의 옷차림을 보고, 호텔 직원들도 안전과 서비스를 위해 늘 고객을 응시한다. 이 시선의 엇갈림 속에서 무명이나 익명은 존재할 수 없다.

      

모텔엔 로비도, 라운지도 없다. 체크인 절차가 없는 것처럼, 그 후에 가로지를 로비도, 그 로비를 종횡을 가로질러 내게 꽂혀오는 시선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선글라스를 낄 필요도 없다. 설령 입구 언저리에 다른 고객이 있어도 서로를 외면한다. 모두가 시선 앞에 놓이길 거부한다. 심지어 자기 아내랑 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모텔에서의 불문율이다. 서로를 무명 씨로, 없는 존재로 남겨 둘 것.     


그래서 모텔은 서로를 마주치지 않게 배려한다. 대표적인 것이 엘리베이터. 부산의 한 모텔은 엘리베이터가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한 명이라도 타면 바로 "만원" 싸인이 켜진다. 결국 위에서든 밑에서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은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이것은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사를 치르고 나온 커플과 정사를 치르기 위해 올라가는 커플이 마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섬세한 배려다.     


의외로 희소한 공간

생각해보면 흔하지 않은 공간과 시간이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장소와 시간의 누림, 그런 기회가 어디 흔하던가. 출근해서 퇴근까지,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자가용을 이용하든 우리는 모든 동선과 머무름이 기록된다. 스마트 폰이 켜져 있으면 GPS와 기지국을 통해 내 위치가 파악된다. 위치추적 애플리케이션까지 있다면, 아니 그게 없어도 구글 애플리케이션에 로그인만 되어 있어도 위치는 실시간 파악된다. 


이렇게 보이는 시선과 보이지 않는 시선의 혼재 속에서 우리는 일상을 감시 속에서 살아낸다. 한병철 씨가 말한 아주 투명한 판옵티콘의 세상이다. 그 전시된 삶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우린 소위 일상 탈출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 탈출이 상품화되면 그 상품의 구매자로 기록되고, 그 상품의 후기를 남겨야 하는 강박도 동시에 생긴다.      


모텔은 주체가 사라지는 곳이다. 설령 카드로 결제했다 하더라도 주체의 흔적이 가장 남지 않는 소비의 공간이다. 주차장이나 밀폐된 카운터 근처에는 분명 폐쇄회로 카메라가 있겠지만 그 영상의 화질은 보장할 수 없고 실제로 작동하는지도 장담할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더 하자면 모텔의 카운터는 고객과 마주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고객을 외면하는 곳이다. 그 시선을 말이다. 호텔의 카운터가 고객을 맞이하는 장소라면 모텔의 카운터는 고객을 통과시키는 톨게이트다. 굳이 얼굴을 볼 필요도 없다. 결제했으면 통과해서 가야 할 곳을 가면 된다. 카드로 긁던, 현찰을 내든.    

 

그 익명 보장, 무명 탄생의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주체의 이름은 모텔 밖에 남겨진다. 어느 장소에서 당신의 이름을 묻지 않는 건 그 공간이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이 늘 헷갈리는 건, 그 시대 중국에선 이름을 무려 세 개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부르는 아명,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 그리고 상하 관계에서 부르는 이름. 그러나 어떤 이름이든 그 이름은 타인의 것이다. 불리어야, 기록되어야, 그리고 기억되어야 의미가 있다. 이름은 주체를 기호로 전환시키는 첫 번째 장치이기 때문이다. 기호란 사회적 약속으로 그 구실을 하는데 역설적으로 인간이 사회에서 그 구실을 하기 위해선 이 약속의 세계에 들어가야 하고, 이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텔은 주체에 관심이 없다.

이름을 묻지 않는 모텔은 주체의 사회적 실체에 관심이 없다. 숙박이 아닌 대실을 하는 경우엔 더 그렇다. 모텔 카운터의 작은 창으로 대실이라고 말하는 순간, 카운터 안의 모텔 직원은 이 혼외정사라는 불법의 공범이 된다. 대부분의 대실은 섹스를 할 사적 공간의 부재나 멂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실은 숙박이 무의미한 시간에 발생하기 때문에 당연히 양자가 그 대실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모텔엔, 알다시피 대실을 할 수 없는 대실 마감 시간이 있다. 모텔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밤 아홉 시 뉴스를 전후로 한다. 그 이전에 모텔에 들어오는 사람은 결코 휴식이나 수면이 목적이 아니다. 쉬었다 가자는 오빠의 말에 쉼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고객도 있겠지만 모텔의 직원은 그런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커플이 올 경우에는.     


카운터라는 문턱을 경계로, 아니 모텔의 가림막을 경계로 모텔 공간의 소비자와 그 공간의 생산자와 제공자 모두 밀회의 공범이 된다. 이 범죄의 성립은 무명이 보장되어야만 하고 아무도 몰라야 한다. 그리고 기록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모텔의 몰카, 또는 모텔에서의 섹스 장면의 유출은 한 개인의 인격 살인일 뿐만 아니라 은둔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행해진 이름 없이 행한 일탈의 노출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노출을 통해 은폐되어야 마땅할 사회적 주체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피해자에게 아주 복잡한 상처를 준다. 더불어 모텔과 고객 간의 신뢰에 깊은 훼손을 남긴다. 모텔 사업자와 고객 모두에게 깊은 분노를 안긴다.      


파우치와 익명성

우린 그곳에서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왔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나가서 다시 누군가로 돌아가 무언가를 하는 "사회인"으로 살아간다. 그 문턱을 경계로 말이다. 이 익명성, 무명성의 보장을 위해 모텔은 작은 파우치를 건넨다. 파우치에는 마스크팩부터 콘돔, 머리 끈, 샴푸 비누, 로션 면봉 등이 들어 있다. 물론 면봉은 솔직히 용도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이런 것들 대부분은 핸드백 안에 있다. 큰 빅 백을 들고 다니기도 하는데 이런 물건들이 없을까? 그래도 모텔은 이것들을 준다. 남자들의 백엔 아무것도 없다. 거의. 스마트 폰, 지갑, 자동차 키 정도가 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종종 깔끔한 친구 중에는 손수건이나 물티슈, 구강 청정제를 갖고 다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남자들은 이 세 개를 주로 갖고 다닌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잊고 갈 일 없는 물건들이다. 


여자들이 섹스 후 샤워하고 마무리를 하기 위해 백을 뒤져 필요한 것을 찾아 사용하고 다시 돌려놓는 일련의 과정은 피곤하다. 그래서 여행을 가서 호텔에 들어가면 여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화장품이나 세안 관련 파우치를 욕실에 옮겨 놓는 것이다.


그러나 모텔은 내일은 기약하는 곳이 아니다. 내 흔적을 남기는 곳도 아니고, 남겨서도 안 된다. 혹시라도 호텔에 내 물건을 두고 가면 남겨둔 개인 정보로 연락을 주지만 모텔은 연락하지 않는다. 또 두고 가는 사람도 귀중품이 아닌 이상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귀중품을 두고 가는 사람도 없겠지만.     


필자도 이런 경험이 있다. 삿포로에 갔을 때였다.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고 해서 오래된 낡은 워커를 신고 갔다. 아니나 다를까 눈 속에서 워커는 녹고 마르기를 반복하더니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다시 가져오기도 뭐해서 그냥 호텔에 두고 왔다. 그러자 며칠 후 호텔에서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신발을 두고 갔다고. 호텔은 그런 곳이다. 그러나 모텔에선 절대 연락하지 않는다. 수상한 물건이 있으면 오히려 경찰한테 연락한다. 당신의 연락처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공간의 탈윤리성

우리는 그곳에 갔다가 나온다. 무명으로 갔다가 무명으로 머물다 무명의 존재가 되어 가림막을 헤치고 나온다. 나온 뒤에야 우린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이름을 얻는다. 이름은 윤리적 존재의 외적 표상이다. 이름이 없는 인간은 윤리적일 수 없다. 이름값은 결국 사람다움을 의미하고 사람다움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규칙을 지킴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지킴을 어려운 말로 윤리의식이라고 한다.      


혼외 섹스라는 불법, 결혼 전의 섹스라는 모험을 하기 위해 우린 이름이 거세된 채로 모텔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윤리의식도 모텔 밖에 두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과 무명의 존재.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써의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인간,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다. 그래서 우린 모텔에서 사회적 존재, 자본주의적 주체의 의무에서 벗어난다. 뭔가를 생산하고, 의미를 만들고, 시간을 효율성 있게 쓰고,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행위에서 해방된다.      


그래서 모텔 TV마다 나오는 수많은 채널, 심지어 모텔 카운터 옆에 있는 DVD 진열장은 대부분 연인에겐 무용지물이다. 티브이는 섹스가 끝난 후 그녀가 씻으러 갔을 때나 보는 것이다.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카톡을 확인하는 것도 그 후의 일이다. 세상으로 열린 두 개의 창, 티브이와 스마트 폰을 들여다볼 때 우린 잠시 이름 있는 존재로 돌아온다. 그 뒤, 섹스 후의 머쓱함을 수습하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입거나, 침대로 다시 돌아가 이름 있는 존재를 소거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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