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Sep 25. 2022

오일/러브젤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클레오파트라의 비결

클레오파트라는 피부가 좋았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해관계자마다 주장이 다르다. 어떤 이는 올리브 오일을 발라서 그렇다고 하고 어떤 이는 시어버터를 많이 발라서 그렇다고 한다. 어떤 오일이든 그녀가 오일을 많이 바르긴 했던 모양. 어쩌면 그 오일 바른 몸에 시저가 헤어 나오지 못했을지도.


이제 소위 러브젤이라고 하는 윤활제는 집 앞 약국에서도 살 수 있다. 그만큼 흔해졌다. 게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일 섹스는 포르노 업계의 장르로 정착했다. 마치 공포영화의 세부 장르 중 하드 고어가 있는 것처럼.     


아이를 키운 사람은 알겠지만, 베이비오일을 많이 사용한다. 온몸에 정성껏 발라준다. 그 촉감으로 인해 아이의 뇌는 더 깊이, 더 빨리 깨어난다. <슈퍼맨이 온다>와 같은 프로에서 촉감 놀이가 많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1세 이하의 영아들의 손끝은 소뇌와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손은 뭔가를 집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느끼기 위한 기관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아기들이 촉감을 감지하는 속도는 성인보다 8배 정도 느리다. 이 처리 속도가 1세쯤 되면 좀 향상되고 6세가 되어야 성인 수준에 도달한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많이 만지는 아이일수록 뇌가 더 빨리 발달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세상과의 접촉이 데이터로 저장됨과 동시에 그 데이터를 처리하는 뇌도 발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데이터를 머리에 몰려 있는 기관들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 있다. 눈, 코, 입, 귀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정보들은 뇌로 빨리 전달되기 위해서 뇌에 가까운 기관들이다. 반면 피부와 손, 발은 멀리 있다.          


상실된 터치

어느 순간부터 타자의 터치감을 상실하고 살게 된다. 물론 여자들은 샤워를 하고 오일이나 유사 종류를 바르기도 하지만 남자들은 잘해야 얼굴만 몇대 때릴 뿐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타인이 발라주는 오일의 터치감을 상실하고 살긴 매한가지다. 그래서 몸을 터치하는 서비스업이 많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동남아 관광의 필수 상품 중 하나도 마사지다. 여기서도 당연히 오일을 사용한다. 터키의 전통 목욕인 하맘도 오일을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사지샵에서도 오일을 사용한다. 그 오일의 용도는 당연히 피부 위를 부드럽게 손가락이 훑어 나가면서 근육 속까지 풀어주기 위함이다.     


이쯤에서 우린 이런 오일을 오직 섹스만을 위해 사용하는 포르노 장르가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몸의 기능을 원활하게 해 주기 위한 오일이 아니라 유희의 도구로서의 오일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촉촉한 터치의 세계

오일은 터치의 확장성을 확보해준다. <엠마뉴엘 2>를 보자. 이 영화는 1975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이 영화에는 약 7분 동안 대사가 한마디도 안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바로 홍콩의 마사지샵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정사씬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섹스보다 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의 터치다. 흔히 콩글리쉬라고 하는 스킨십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터치가 그 장면에서 나온다.


그 장면에서 손은 타인을 감각하는 신체 기관 중 하나일 뿐이다. 온몸이 타인의 몸을 만지기 위해 존재하고 기능한다. 심지어 머리칼까지도. 그 만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물질들이 사용된다. 물, 거품, 그리고 오일...


결국 우리가-물론 주로 남자겠지만-그런 류의 포르노 장르를 보는 이유는, 그리고 구글에서 영어로 마사지와 섹스를 함께 검색하면 관련된 야한 이미지와 영상들이 수두룩하게 뜨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부드러운 만짐을, 손과 온몸을 사용한 그 행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사실 타인과 멀어지면서 습기를 잃었다. 건조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도, 은유적으로도 그렇다. 건조한 인간. 그것은 까뮈의 이방인에 나온 뫼르소 같은 인간일까?      


접촉이 사라진 건조한 손

접촉을 싫어하는 사람 하면 <몽크>가 떠오른다. 미국의 드라마 주인공인데 결벽증에 온갖 강박증과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물건을 집던가, 다른 사람하고 악수를 하면 자기를 따라다니는 조수에게 물티슈를 달라고 한다. 그래서 제일 많이 하는 대사가 Wipe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 그가 닦아 내는 건 타자의 흔적과 함께 자신의 수분과 유분이다. 아기를 키우면서 물티슈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은 더러움과 함께 손의 촉촉함과 윤기도 앗아 간다.      


지문은 손가락 끝에 유분과 수분이 있음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즉 공간과 물체, 타자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수분과 유분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강박은 타자와의 육체적 소통,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많은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한다. 소통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건조함은 관계의 소멸로부터 발생한다. 그 관계의 소멸은 가장 건조하고 황폐한 상태, 고독을 만든다. 고독사의 그 고독을.


결국, 수많은 포르노에 물과 오일, 침과 땀 같은 타액과 애액이 범람하는 것은 접촉과 관계가 결핍된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그것의 과잉을 시각적으로나마 대리 만족시키고, 그 욕구를 충전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프로 부족하다는 음료의 광고 카피보다 우린 더 갈증을 느끼고 있다. 생리적 갈증이 아니라 정서적 갈증, 그리고 관계의 갈증이다. 오일, 땀, 비누 거품 등을 활용한 타자와의 유희는 우리에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감각을 살아나게 한다.


해석 너머의 타자 / 주체의 건조함 

우린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뭔가를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편안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슬라임이라는 액체 괴물을 갖고 노는 것이고 스피너 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돌려가며 뇌를 쉬게 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뜨개질, 퍼즐 맞추기도 그 본질은 손가락과 사물과의 끝없는 조우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타자를 알기 위해 머리 중심의 기관들을 먼저 사용한다. 아니 그전에 이미 모니터로, 스마트 폰 화면으로 타자를 받아들인다. 사진, 프로필, 글, 태그, 인증샷으로 말이다. 그동안 육체적 실체와는 점점 멀어진다. 타자에 대한 정보는 어쩌면 피부에 몰려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이 긴장했는지, 거짓말했는지 아는 탐지기도 결국 땀과 심박수로 체크된다. 당연하게도 타자가 나를 욕망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기 위해선 우린 접촉해야만 한다.


표정, 말, 태도 등은 해석이 필요한 기호다. 그것은 조건반응도, 생리적 반응도 아니다. 머리로부터 발생한 의미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학습된, 사회적 기호다. 그러기에 그것은 오직 나를 향한 기호가 아니다. 결국, 타자 앞에 선 수용자는 모호함과 불안을 느낀다. 저 표정은 오직 나에게만 오는 것인가. 저 말은? 목소리는, 손짓은?

    

이 모호함의 기호를 건너 타자를 통째로 내게 전달시키는 것은 어쩌면 육체와 육체의 접촉뿐일지 모른다. 씨름 선수들이나 격투기 선수들은 한번 잡아보면 상대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상대의 근육이 얼마나 잘 갈라져 있고 몸에 얼마나 험상궂은 문신들이 잔뜩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기호로 타자를 속이려는 위장복에 불과하다. 진짜 가늠은 부딪힘과 부대낌에서 판단된다. 몸과 몸으로 서로의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 육체적 정보교환의 가치를 많은 이들이 잊고, 모르고 산다. 연인의 몸과 접촉하기 전까지 말이다. 아니 접촉해도, 타자의 습기와 함께 만들어내는 끈적함을 터부시 하면, 그 촉촉함과 미끌거림은 어른의 것이 될 수 없다. 사랑을 해도 건조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면과 외면, 모두.


이 건조함이 여전히 만연한 세상이, 이 매끄러움과 촉촉함이 결핍된 어른들이 오일, 땀, 물, 애액과 타액이 넘쳐나는 포르노그래피 시장을 창출한다. 모든 장르는 시장이고, 시장은 소비자의 군집을 바탕으로 정착하고 성장한다. 포르노 제작자들은 건조한 주체, 주체의 건조함을 알고 있다.     


접촉을 통해 오는 타자

우린 섹스에 정신적인 가치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놀이로서의 섹스를 즐기는 사람은 퇴행적/퇴폐적 존재로 인식한다. 결국 섹스를 육체적 유희, 성인을 위한 촉감 놀이로서의 섹스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으로만 국한시킨다. 행위로부터 의미가 발생하지 않거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행위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이건 섹스의 협소하면서도 인위적 규정이다. 사랑을 동반한 섹스가 촉감 놀이로서의 섹스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촉감이나 오감 놀이를 하는 행사나 이벤트가 얼마나 많은지 절감할 것이다. 밀가루, 나무, 흙, 고무, 물 등 소재도 다양하다. 이런 놀이와 그 소재가 이렇게 많고 다양한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그것 자체가, 만지는 것이 순수한 유희이고 미숙한 인간의 경험과 감각, 지능을 개발시키기 때문이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이 만짐의 유희를 잃어버린 채, 두 손은 주로 일하는 데만 사용한다. 그러면서 비싼 돈을 내가면서 마사지를 받는다. 진짜 마사지든 퇴폐 마사지든 말이다.      


타인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맘껏 만지라고 지불하는 비용은 비싸다. 마사지를 받기 위해선 수만 원에서 수십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타인을 만지기 위해서도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한 적이 있던가? 타인을 만지기 위해 우린 내 몸을 마사지사에게 맡길 때만큼 비용을 지불할 수 있을까?


매춘? 매춘은 성기 중심의 접촉일 뿐이다. 타인을 마사지사처럼 정성스럽게 만진 기억은 아마 가물가물할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취학 전 아동일 때나 가능하다. 그마저도 학교를 가면 부모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내아이도 있다. 뽀뽀를 하면 돌아서서 입술을 슥~ 닦는다.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면서 타인을 만질 기회도, 그 만짐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기회도 상실한다. 타인의 육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이성과 사회화로 인해 박탈당하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에서 만짐의 존재로

연인, 부부간의 성을 다룬 책들에 나오는 조언 중 가장 흔한 조언 하나가 서로의 몸을 만지라는 충고다. 성기 중심의 섹스, 오르가슴과 사정이라는 성과 중심의 섹스에서 감각을 깨우고 서로가 타자를 감각하는 섹스로 전환하라고 촉구한다.


그 전환을 위한 도구로 손과 몸, 그리고 물과 거품, 그리고 이름도 긴 젤들과 오일들이 있다. 우리는 만짐으로써 자신의 육체로 서로를 즐겁게 해 줄 수 있고, 타자의 손길에 내 몸을 맡김으로써 무력함 뒤에 오는 쾌감을 비로소 얻을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을 오직 만지고 부대낌으로만 감각하는 것은 인간의 전지전능함, 그것을 가능케 했던 이성의 장막과 레이더를 잠시 꺼두는 것이다. 무기력한 하나의 원시적 동물, 생명체로 퇴행하는 것이다. 그 무력감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예리하게 벼려 놔야 했던 이성의 날을 육체의 칼집 안에 집어넣고 오직 고깃덩어리, 감각 덩어리, 달팽이 같은 원시 동물,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본능적인 동물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깨어난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나오고, 한 번도 흐르지 않았던 액체가 흐른다. 땀으로 젖어본 적 없던 곳에 땀이 흐른다. 타자의 피부 밑에 기꺼이 내 몸을 미끄러트려 넣고, 타자의 축축하고 매끄러운 손에 내 몸의 모든 굴곡을 맡긴다. 내 손으로도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곳까지 만짐을 허락한다. 이성으로, 마치 그린벨트처럼 봉해져 있던 육체의 곳곳이 해제된다. 그리하여 그 타자의 손길로 인해 난 비로소 개발된다. 이성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만짐을 당하는 육체로써.     

이전 05화 스타킹 or페티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