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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03. 2022

스타킹 or페티시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스타킹의 역사    

스타킹의 역사를 구구절절 다 알 필요는 없다. 요약하면 수많은 중세 유럽을 다룬 영화에서 익히 봤듯이, 스타킹은 원래 귀족 남자들이 신기 시작했고, 귀족 여자들이 신은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는 것, 평민 여성들이 신은 건 16세기 들어와서였다는 것 정도다. 스타킹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하고, 감사해야 할 사건은 1938년 미국의 듀폰사가 나일론을 개발해서 그것이 스타킹의 소재로 사용되어 1939년에 나일론 스타킹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특정 남자들은 이 물건에 유독 더 흥분하는 페티시즘을 보이고  있다. 페티시즘은 쉽게 말하면 우상숭배, 물신숭배다. 그것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데 특정 사람과 사회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 다른 물건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다.     


페티시를 느낀다는 것은 그 물건이 가진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그것에게 성적 대상, 즉 사람(보편적으로) 보다 더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현상이 과해지면 성애의 타자, 즉 연인은 없어지고 스타킹만 부각된다. 그 결과, 대상 A가 스타킹을 신었을 때 흥분하는 것인지, 어떤 대상이든 스타킹만 신으면 흥분하는 것인지 흥분하는 자신도, 또 A도 알 수 없게 된다. 즉 A는 자신이 스타킹을 신는 마네킹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격을 갖춘 연인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런 사태는 스타킹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과 사랑이 사물화 되면 주체는 내가 사물인지, 사물이 나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성과 인간의 사물화

성매매는 성의 사물화를 자본주의적으로 공식화한다. 이런 사물화가 연인 사이, 부부 사이에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나 가족애와 눈가리개로 은폐된다. 누구도 00 때문에 너랑 사귄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물론 애 때문에 산다거나, 예뻐서 사귄다, 성격이 좋아서 사귄다는 말이 다 빈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럴 수 있다.      


반면, 자본주의화된 섹스는 좀 결이 다르다. 대 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 명품 때문에, 돈 때문에 잔다면 그것 사람을 자본으로 치환시키고 육체를 화폐 화한다. 그래서 소위 스폰서라는 단어에 우리가 윤리적인 의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이건 페티시즘보다 더 인간을 사물화 한다. 당연히 섬김을 받지도 않는다. 이때, 인간은 사물 뒤에 온다.     


페티시즘은 이런 교환 관계가 아니다. 그저 성적 흥분의 격발이 그 사물로 인해 이뤄지는 것이다. 왜 하필 이것이 있어야만 하고, 그럼 앞에 있는 나의 구실은 도대체 뭐냐와 같은 질문은 크게 의미 없다. 어떤 특정 물건이나 상황이 부재할 경우 섹스를 할 수 없다면 성적 대상 A는 그 물건과 상황에 필요한 소품에 불과하다. 성적 장면이라는 한 특수한 장면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소품인 것이다. 


트리거? 스위치?

이 현상은 사람을 섹스의 목적에서 동기 유발의 사물로 전환시킨다. 물론 연인 A는 오롯이 자신의 존재만으로 상대를 흥분시킬 수 없음에 좌절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떻게 하면 그/그녀를 최고로 흥분시킬 수 있는지 확실한 트리거, 격발장치를 알고 있기에 편리할 수도 있다.     


한 방송에서 허지웅이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고 있다. 포르노가 아니라 일상에서 나를 흥분시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그녀가 스타킹을 입은 당신에게 흥분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이다. 최소한 당신은 그/그녀의 스위치를 켜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문제 삼을 필요 없지 않나? 그런가? 여기,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스위치가 본체보다 더 비중이 커질 때의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스타킹을 입는 마네킹인가 마네킹이 스타킹을 입은 것인가의 문제 말이다. 이 문제는 좀 더 큰 문제로 발전한다. 스위치가 없으면 본체가 켜지지 않을 때의 문제다. 즉 스타킹이 없으면 흥분을 할 수 없고 그녀/그가 전혀 성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그건 스위치가 본체를 점령한 것이다. 마치 <기생수>나 <베놈>, 그리고 전설의 <에일리언>처럼 말이다.      


성적 자존감

성적인 매력은 주체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을 사물이 대신하면 주체는 사물을 벗어나서는 섹시해질 수 없다. 그것이 돈이든, 명품백이든, 포르셰든, 돈다발이든, 스타킹이든 말이다. 이 모든 사물에서 벗어나 주체 본연의 의미와 매력으로 섹시한 존재가 될 때 주체는 존재로써의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다. 아무것 없이도 탐닉될 수 있는 존재감을 획득한다.      


이것은 예를 들면 고명 없이도 훌륭한 국수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잔치국수의 국물과 소면보다 그 위에 얹어진 고명을 먹기 위해 잔치국수를 먹거나, 또는 그 고명이 잔치국수의 맛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잔치국수의 국물과 소면은 자신들의 자존감-만약에 존재한다면-을 상실할 것이다.     


페티시즘은 이렇게 본말이 전도되어 성적 주체를 섹스의 공간과 상황에서 소외시킨다. 성적 주체는 페티시를 일으키는 사물을 다른 주체, 즉 연인이나 배우자, 파트너에게 전달하는 미디어로 전락한다. 미디어로 전락한 주체는 티브이나 포르노를 틀어놓고 섹스하거나 스마트 폰의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섹스하는 파트너와의 섹스할 때처럼 회의와 환멸을 느낀다. 누구도 메시지, 그 자체가 되길 원하지, 미디어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자 옷을 걸친 여자, 그 환상

스타킹과 유사한 환상이 남자의 옷이다. 무슨 말이냐면 여자와 남자가 하룻밤을 지내거나 남자의 집에서 섹스를 한 후 여자의 옷 대신 남자의 옷을 입고 있는 환상을 말한다. 물론 이것도 미디어가 조장한 환상이다. 이 환상에는 절대적 신체 사이즈의 차이를 전제로 한다. 즉 남자가 여자보다 덩치가 큰 게 당연하고 이에 따라 남자의 옷, 특히 셔츠를 입은 여자는 가녀려 보이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이를 통해 남자의 성욕을 자극할 수 있다는 환상 말이다.     


이 환상은 오랫동안 굳어져서 이미 신화가 됐다. 남자의 넓은 어깨와 가슴에 안길 수 있는 작은 신체를 가진 여성. 이런 신화들은 대중매체와 콘텐츠를 통해 지난 수백 년간 재생산되어 왔다. 그 결과 작고 마른 남자와 덩치 좋은 여자로 구성된 커플은 어떤 콘텐츠나 대중매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다(물론 드물게 있긴 하다).      

이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엄청난 압박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압박이 남자와 여자 모두를 헬스클럽, 요가, 필라테스 스튜디오로 보내고 있다. 가는 곳은 유사해도 목적은 다르다. 남자는 근육을 만들어 여자의 크기와 몸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여자는 남자의 크기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는 이 아주 오래된 신화의 노예가 되어서 현재까지 다이어트와 근육 만들기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려고 만나?

다시 스타킹 얘기로 돌아오자. 스타킹으로 인한 주체의 사물화보다 더 무서운 건 섹스에서 사라져 버리는 주체다. 종종 연인이나 파트너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나 이러려고 만나?"


이런 대사는 주로 만날 때마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그 끝이 섹스로 귀결되면 나오는 대사다. 이건 솔직히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다. 물론 성욕의 차이로 인해 여자에게 주로 나오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의 확인을 상대에게 묻는 건 남녀 공통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문제는 사물화 된 성적 주체의 논쟁에서 벗어난 질문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소위 “이러려고” 만나는 시기가 아주 짧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소위 정상적인 윤리와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타인을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시간은 아주 짧다. 기본적으로 미성년의 시기는 오롯이 빼야 한다. 또 중장년 이후에는 체력이 안 된다. 성욕과 그것을 실현할 능력, 더 나아가 그걸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시간은 전 생애를 걸쳐서 아주 짧다. 


남녀 모두 에로틱한 시선 앞에 놓일 수 있는 시간은 정말, 아주 짧고, 솔직히 그런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흔치 않다. 그래서 아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의 애인-남자든, 여자든-이 당신만 보면 어떻게 하질 못해서 안달이 난다면 오히려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의 몸을 볼 때마다 흥분하고 좋아했던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좋아할 사람은 당신의 기대보다 적다. 2017년 9월, 미국 야후에 인용된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평생 섹스파트너의 숫자는 평균 7.2명이다. 유럽은 5.4명. 이런 조사를 매년 하는 영국의 미첼이라는 박사가 있다. 재미있는 건 영국 남자는 평균 14.14명이라고 답하는데, 여자들은 7.12명이라고 답했다는 점이다.     


소위 성에 개방적이라고 기대되는 북미나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부풀려 말할 정도로 평생의 섹스파트너 숫자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많지 않다. 열 명이 되질 않는다. 한국일보가 2016년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남녀가 첫 번째 섹스하는 나이는 평균 22.1세다(어디까지나 평균이다. 십 대 때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서른이 넘어서도... 그만하자). 심지어 경험 없음도 10.8퍼센트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진귀한 경험이다. 해외여행보다 더 겪기 어려운 경험이 어쩌면 섹스일 수 있다는 얘기다.      


발명된 사랑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볼 때마다 흥분하는 연인을 보는 건 불편할 수 있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니까. 내가 성애를 위한 존재로만 인식되고 사용되는 것은 이성적 인간에겐 수치스러운 경험이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그런 존재여도 당연히 수치스럽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이성적 인간이 동물적인 성적 존재로 전환되는 그 당황스러운 경험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양자 - 성욕을 느끼는 사람, 성욕을 불러일으킨 사람- 모두 스스로 인간으로서 회의감이 들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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