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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4. 2022

땀-아이러니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땀의 본질

땀은 더럽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과는 거리를 유지한다. 사우나에서 맑은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 곁에도 바짝 붙진 않는다. 게다가 누구도 타인의 땀을 닦아주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줄 뿐이다.      


잘 때 흘리는 땀은 허약함의 증표이고 악몽의 부산물이다. 낯선 공간, 낯선 자리에서 기분 나쁘게 스며 나오는 땀은 내면의 불안함과 자리의 불편함을 나타내는 증표다.


운동할 때의 땀은 사적 유희의 결과물이다. 그 땀으로 인해 우린 더 나은 건강, 근육, 혈관을 얻는다. 선수는 훈련 중에, 시합 중에 땀을 흘린다. 선수가 획득한 승리에 대한 찬사는 종종 그 땀의 노고에 받쳐진다. 그러나 그 땀은 훈련의 메타포일 뿐,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전장에서 돌아오는 승리한 기병대에게 보내지는 찬사가 말이 아니라 병사에게 헌사되듯 말이다.


노동과 봉사의 땀과 같이 신성한 땀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 땀을 유발한 행위가 신성하고 위대한 것이지 그 땀 자체는 여전히 더럽다. 아무리 숭고한 행위를 하여 땀을 흘린 사람이라도 땀에 젖은 몸을 방치하지 않는다.      


땀은 신체의 움직임, 육체와 마음의 동요와 흔들림의 결과물일 뿐이다. 또는 날씨라는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항상성의 결과다. 체온 조절을 할 수 있다는, 그래서 뜨거운 여름도 버텨낼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존재의 저항이자 항변이다. 어떤 형태, 어떤 자리, 누구의 땀이든, 대부분 땀은 응시의 대상이 아니다.      


땀, 싸인

섹스에서의 땀은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싸인이다.

흥분했다는 싸인, 몸과 마음이 준비됐다는 싸인, 당신을 받아들이고 들어갈 준비가 될 만큼 몸이 이완됐거나 단단해졌다는 싸인이다. 너로 인해 심장박동이 올라가고 몸에 열이 올라가고 있다는 싸인이다. 용도를 몰랐던 골반의 근육과 그 외 무명의 잔근육들이 너로 인해 “열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싸인이다. 포털이 열리듯이, 이 차원에서 저 차원으로 내 육체와 정신이 옮겨가고 있음을, 그래서 조만간 오르가슴이라는 놀라운 경험이 다가올 것임을 알려주는 싸인이다.      


섹스에서의 땀은 이렇게 다르다. 그것은 윤활유이자 광택제다. 한 번의 섹스가 끝난 후,  땀을 흘리는 육체는 탐욕스러운 시선을 붙잡아 둔다. 예리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흑표범을 닮은 연인의 습격을 부른다. 섹스 후 땀을 흘리는 육체는 사냥감이다. 땀에 젖어 무방비 상태로 너부러져 있기에...먹음직스럽다.      


섹스로 난 땀을 뒤집어쓴 상대에게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 땀은 내 육체와 타인의 육체가 아무런 마찰 없이 뒤 섞일 수 있게 하는 물질이자, 첫 번째 섹스에 잔존했던 심리적/육체적 긴장마저 없애어 타자에게 아무런 마찰도, 저항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물질이다.


당신의 육체가 나로 인해 뜨거워졌음을, 그래서 당신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도 흘려 본 적 없던 성질의 땀임을, 이 땀은 당신이 다른 일, 다른 운동으로 인해 흘린 땀과는 성분이 다른 땀임을, 그 땀을 흘리게 한 사람이 바로 나임을 알려주는 자랑스러운 훈장이다.


오직 나만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런 땀을 흘리게 할 수 있다는 뿌듯한 감정을 저 골반과 허벅지 아래쪽부터 올라오게 해서, 결국엔 새로운 오르가슴을 향해 서로를 안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두 번째 판을 위해 더 부드럽고 더 빠르게 몸을 준비시키는 촉매제다.      


수건의 용도

결국 모텔의 타월-모텔의 수준에 따라 다르지만 크기 별로 최소한 대여섯 장은 있는- 들은 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 타월들은 섹스를 위한 최소한의 청결을 위한 샤워 후의 물기를 닦아 내는 역할, 그리고 두세 번의 섹스가 끝난 후 다시 사회적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야만의 향기를 없애는 샤워 이후의 물기를 닦아 내는 용도다. 그 야만의 향기.


그렇다. 모텔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는 커플이 만들어낸 야만의 향기를 없애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샤워를 하지 않고서는 연인이 만들어낸 향기를 없앨 수 없듯이 그 공간의 배인 야만의 향기 또한 그러하다.      


땀의 아이러니

땀의 효능이나 효과는 그 성분과 기능을 중심으로 논의된다. 인체의 노폐물을 없애주고 체온을 유지해준다. 그러나 섹스에서의 땀은 그 화학성분과 신체 내부의 독소 제거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앞서 말했듯, 그 땀은 섹스를 위한 윤활유이자 두 번째 스테이지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싸인이다. 그래서 섹스에서의 땀은 혐오의 대상도 아니고, 기피의 대상도 아니다. 과학이 입증했듯 끌리는 이성은 땀도 향기롭다.


이쯤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결벽증이 있는 연인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문제는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면 땀이 난다는 점이다. 내 말이 아니라, 학자들에 의하면 오르가슴을 느끼면 반드시 땀이 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피부가 수막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왜 그럴까? 인간의 성중추가 발한 중추 바로 옆에 존재해서 이 두 중추가 공명효과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땀에 젖지 않는 오르가슴은 거짓이다. 그러니 만약 여자가 땀에 대한 결벽증이 있다면 자신에게 나는 땀도 경멸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당연히 오르가슴은 먼 얘기가 된다.     


이건 아주 묘한 얘기다. 경멸이나 혐오는 이성의 영역이다. 즉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을 싫어한다는 건 경험에 기인한 것이고 그 경험의 누적이 오늘의 선택을 결정한다. 설득 커뮤니케이션에선 이를 태도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버섯을 싫어하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댈 수 있지만 그건 합리화일 뿐 합리적이진 않다. 이성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미신을 섬세하게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반면 섹스로 인한 땀은 이성의 영역, 그 너머의 오르가슴을 향한 필수 요소이자 동반 요소다. 즉 땀 없는 오르가슴은 없고, 오르가슴 없는 섹스에서의 땀 흘림은-한여름 에어컨 없는 모텔이나 자취방에서의 섹스라면 또 몰라도-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땀을 흘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 특히 여자가 자신의 땀과 타인의 땀 모두를 경멸해 마지않는다면 자신을 오르가슴이라는 경험으로부터 배제시킨다. 하지만 땀 없는 쾌적함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그/그녀의 인생에서 오르가슴은 개념으로만 존재해도 된다. 그 개념이 피와 살을 갖고 현존하기 위해서는 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달짝지근하다 같은 표현과 같다. 이 단어는 ‘달콤하다’, 나 ‘달다’하고는 다른 어감이다. 이 단어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적절한 표현으로 등장해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짭짤하다는 표현의 스펙트럼이 소금에서부터 젓갈까지 폭넓게 적용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르가슴도 마찬가지다. 이성으로, 사전적으로 설명해봐야 의미 없다. 그것은 느낀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표현, 한 번도 안 느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느껴본 사람은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결국 오르가슴은 근본적으로 스스로가 만든 터부를 허물 때 다다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생리학적으로, 비뇨기과 의사와 산부인과 의사들이 오르가슴의 필수조건으로 내거는 것이 18분 이상의 피스톤 운동이다. 대략 20분가량 해야 한다는 게 중론. 20분 만에 땀을 흠뻑 흘릴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을까? 심박수가 그렇게 빨리 올라가는 운동은? 아마 나이가 들수록 그 종류는 줄어들 것이다.


어찌 됐든 땀은 에너지를 썼다는 증거이자, 오르가슴의 증거이고, 서로의 땀을 탐하고 핥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혐오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당신의 모든 것을 탐닉한다는 싸인이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알게 모르게 홍조가 오르는 그녀나 그를 연인으로 뒀다면 이미 상대의 체온을 내가 올리고 있다는 증거이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다른 차원의 땀      

그전까지, 그러니까 한 인간이 섹스를 하기 전까지의 땀은 자기를 위한 땀이거나 착취의 부산물이다. 자본 획득을 위한 노동이거나 자기 건강을 위한 운동의 증거다. 자신을 위해 애를 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고대 이후로 힘 있는 자를 위해 자신의 육체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처였다. 지금도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흘리는 대부분 땀은 노동 때문이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의 모든 땀은 자본주의라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간에 흘릴 수밖에 없는 땀인 것이다.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든, 소외당한 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든 말이다. 그 자본주의로부터 착즙 된 땀 밑에 흐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집에서, 클럽에서 흘리는 땀도 결국은 자본주의 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 채 살아내기 위한 땀이다.      


그렇다면 운동할 때의 땀은 자신을 위한 것인가? 오롯이 그렇다고만 볼 수 없다. 가꾼 몸은 타자의 시선 앞에서 평가받으니 말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은 전시된다.  어떤 동물도 영혼을 보여줄 수 없고 내면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그것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인간을 제외하곤 말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을 겉의 것으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 안에 있는 것이 문화적/성적 취향, 정신세계/세계관, 철학, 직업, 전문성이든 뭐든 됐든 말이다. 이것은 또 진화론적으로 여성은 가장 건강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할 확률이 높은 존재임을, 남성은 건강한 유전자를 갖고 있고 출산 이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인간의 외면은 동물과 다르면서 또 같은 것이다. 그 출발점에 몸이 있다. 얼굴이 있고.     


우린 이 몸과 얼굴에 돈을 쓴다. 그래서 여자들이 작은 음료수 크기의 크림 하나에도 몇십만 원을 지불하는 것이고, 남자들은 일상에서 전혀 들 일 없는 무게인 4, 50킬로그램의 쇳덩어리를 들면서 운동하는 것이다. 남자들에게 일터에 나와 그 정도 무게를 드는 일을 한 시간만 하라고 하면 아마 거부하거나 높은 비용을 청구할 것이다. 그러나 헬스클럽에선 자기 돈을 내가면서 그런 육체적 고통을 자청한다. 그건 여성도 마찬가지고. 결국 섹스를 제외한 남녀의 모든 땀 흘림은 모두 사적인 생존의 행위이자 공적인 자리매김과 버팀을 위한 행위의 부산물이다.     


매춘의 비윤리성과 땀

그러나 섹스에서의 땀 흘림은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성적 존재로서, 수컷으로서, 암컷으로서 기능한다는 징표이다. 노동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움직임, 동시에 고통스럽지 않은 행위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래서 매춘은 섹스에서의 땀의 의미를 노동으로 전락시키는 비인간적 행위다. 물론 그것은 그 이전에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의 문제를 갖고 있지만 말이다.


만약 남자든 여자든 매춘으로도 오르가슴을 느낀다면 그건 직업적 성취이지 성적 성취가 아니다. 이 맥락에서 매춘의 오르가슴은 카피라이팅과 비슷하다. 카피라이터가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저작권도 없고 엔딩 크레디트도 없다. 그 만족은 광고 속에서 소멸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광고로 이어지고.


즉 직업으로서의 섹스와 자본주의를 위한 카피라이팅은 그 행위로부터 주체를 떨어뜨려 놓는다. 그 만족감, 오르가슴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돈과 교환된 일종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매춘은 반복해서 인격을 소멸시킨다. 땀 흘리기 전에 구매자를 절정에 이르게 하거나 사정에 이르게 하면 직업적 소명은 끝난다. 프로젝트 1단계 완성. 결국 쌍방의 오르가슴이 만족스러운 섹스의 전제조건이라면 구매자의 오르가슴과 절정은 매춘으로서의 섹스의 결제 조건이다. 판매자의 땀과 절정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판매자의 신음과 절정, 오르가슴 등은 의사 그것이 된다. 일종의 시뮬라시옹. 구매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눈치채더라도 모른 척해야 하고. 그래야만 구매자의 성적 만족감 중 하나인 정신적 고양도 함께 성취된다.      


땀의 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언제 이렇게 타인의 야만스러운 땀 속에서 허우적댈 수 있을까? 신성시해야  될 땀은 아주 사적인 공간에 있다. 그 공간에서 성취된 결과는 보이지 않는 훈장, 저장된 비명, 문신처럼 남겨진 손 끝,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축축해지는 신체의 어느 부위, 빨라지는 맥박과 호흡, 보기만 해도 달아오르게 하는 카톡 속에 있다. 하루키가 1Q84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린 저 야만의 시간을 추억하며 그 추억의 열기로 몸을 덥히는 나이를 맞이한다. 그 나이가 오기 전까지, 오늘, 야만스러운 시간을, 그녀가 내게 주문-접영 하듯이 와줘-했던 것처럼, 땀에 젖은 육체 속에서 접영 하는 시간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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