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Sep 23. 2022

거울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섹스

거울의 쓸모

거울은 주체의 현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물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어서 확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찍는 순간의 나이지 이 순간의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거울이 많은 곳은 어디일까? 헬스클럽, 댄스/발레 스튜디오 같은 곳, 그리고 모텔이 있다. 필자가 다녔던 동네의 허름한 헬스클럽의 한쪽 벽도 거울이 차지하고 있었다. 헬스클럽의 거울 벽, 필라테스나 발레/댄스 스튜디오의 거울 벽, 모텔의 거울방, 그리고 인증샷엔 공통적으로 자기 확인과 자기 과시, 자기 관음증이 뒤섞여 있다.


우선 거울은 자기 확인의 도구다. 내 시선은 외부를, 타자와 세상을 향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예쁜지, 옷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내 눈의 색깔, 피부, 머리 스타일 등의 확인은 거울이 없으면 타자에게 물어야 한다. 결국, 거울로 본 나는 내가 아니라 밖에 있는 나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상징으로서의 나.     


입기 전의 옷은 사물에 불과하다. 입혀진 옷과 사물로써의 옷은 다르다. 그래서 우린 종종 사물로써의 옷을 사서 입은 후 후회하는 것이다. 입혀진 옷은 신체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의미는 타인의 시선 앞에 놓이면서 비로소 획득된다. 그 획득의 가능성을 사전에 예상하기 위해 우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는 것이다.     


용도의 진화

헬스클럽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헬스클럽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에서의 거울은 자세 확인 용도로 먼저 쓰인다. 운동이라곤 요즘 친구들 말로 1도 안 해봤을 것 같은 사람-의외로 정말 마른 청춘 남녀들이 많이 온다-이 오면 관장은 그들에게 몇 가지 기본 동작을 가르쳐준다. 이 동작들은 헬스장에 가득한-러닝머신과 사이클을 제외한-기구들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 근력 강화 운동들이다. 스쿼트, 플랭크, 그리고 1킬로그램짜리 아령과 바만 갖고 하는 운동들이 주를 이룬다. 이런 운동을 가르칠 때 관장은 회원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간다. 아마 어떤 사람은 운동을 위해 몸을 쓰는 자신을 처음 목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헬스클럽 거울의 첫 번째 목적은 자기 확인이자 목격이다. 운동하고 있는 나, 바르게 하고 있는 나, 그리고 얼굴이 벌게지고 있는 나를 목격하는 것이다. 그것이 버릇이 되면 거울 앞에서 하던 운동은 계속 거울 앞에서 하게 된다. 덤벨이나 바벨을 갖고 하는 운동들 말이다.


이 자기 확인의 단계를 넘어서면 우린 자기 추적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때 거울은 자신의 변화를 추적하는 유일한 도구가 된다. 외적인 변화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적인 변화까지도. 어쩌면 그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 또한 거울일지도 모른다.


스님들의 말처럼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제 밖에 있는 것인 양 물끄러미 바라볼 수가 없다. 안이 흔들리면 밖도 흔들린다. 결국 안의 흔들림을 밖의 흔들림의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번진 마스카라, 퀭한 눈, 내려온 다크 써클, 부르튼 입, 들어간 볼, 튀어나온 광대, 푸석푸석해진 피부. 이런 것들은 내면의 슬픔, 절망, 아픔을 드러낸다. 그 드러난 것은 내면의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한다.   


헬스클럽에서 꾸준히 운동해서 몸을 변화시켜나가는 사람은 거울을 통해 자기 변화를 확인한다. 그건 비단 몸의 변화뿐만 아니라 몸의 변화로 발생한 내면의 변화도 포함된다. 오래 운동해서 몸이 변한 사람들은 서서히 헬스클럽 티셔츠에서 벗어나 몸에 딱 맞는 전문 헬스 복장을 입게 되고 그 색상 또한 점점 더 화려해진다.      


거울은 이제 자기 확인, 자기 추적의 역할에 이어 자기 감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린 거울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시선은 렌즈에 불과하다. 시선은 뇌의 착각이다. 객관적 시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자기를 향한 시선은 자기 비하 아니면 자기도취, 둘 중 하나다. 자기 자신을 냉정히 본다는 건 소위 속세를 떠난 사람만이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헬스클럽에서의 거울은 시선, 그리고 시선들, 특히 상호 비교와 자기도취와 최면이 담긴 시선들이 혼재하는 곳이다. 이 논리가 필라테스, 발레 스튜디오, 모텔의 거울에도 적용된다.


성적 경쟁의 출발점          

섹스를 위한 거울의 시작은 집에서 시작된다. 그곳의 거울은 자기 확인과 자기도취가 동시에 이뤄진다. 종종 김치녀/한남충 논쟁을 벌일 때 데이트 비용을 갖고 논쟁할 때가 있다. 그때 일부 여성들이 펼치는 논리가 자기는 꾸미는데 돈을 들이지 않았느냐, 그러면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내도 되지 않느냐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맞고 틀림을 떠나서 집에서부터 데이트가 시작되는 건 맞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남자든 여자든 옷을 사거나 운동을 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성적인 긴장감, 에너지, 호기심이 있을 때의 소비와 운동의 목표는 타자를 향한다. 성적 타자. 그 타자가 없으면 우리의 쇼핑과 운동은 방향을 잃는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인간도 그러하다. 동물의 힘과 외모가 짝짓기를 할 때 더 과잉되듯 인간도 그렇다. 다만 동물들은 거울 없이 과시하는 것이고 인간은 거울을 통한 자기 확신 없이는 경쟁자와의 투쟁의 장에 나서지 못할 뿐이다.      


이것은 성인 나이트를 가는 3,40 대 미혼 남녀나 유부녀 유부남, 그리고 핫한 클럽을 가는 이십 대 초반 남녀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런 곳은 아프리카의 초식 동물들이 초원의 서식지에서 공개적으로 짝짓기를 위한 경쟁을 벌이는 장소와 흡사하다. 사람은 뿔을 앞세워 머리를 박거나 싸움을 하는 대신 클럽이나 나이트에서 공작새처럼 옷을 부풀리며 춤을 출 뿐이다.


이런 공인된 장소, 즉 짝짓기를 하기 위해 탄생한 장소 밖의  일상에서도 이런  노력들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부질없다는 것, 또는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을 때까지, 짝짓기가 끝나 그런 노력을 할 필요 없어지거나, 이와 관련된 생리적 능력이 끝날 때까지 그런 노력은 계속된다.

     

그 결과, 중년 여성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은 유사해지고, 몸매 또한 유사해진다. 그 유사함은 성적 긴장감의 부재함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래서 서로가 성적 경쟁자이지 않다는 걸 서로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성적 비무장의 신호다. 그 성적 경쟁의 전선에서 물러난, 퇴역한 존재임을 서로에게 알려줘 그 긴장감을 사전에 없애는 장치일 수도 있다. 이런 긴장감의 부재로 인해 더 많은 야한 농담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경쟁의 장에 뛰어들고 싶은 남녀나 이런 경쟁의 장에서 물러나 있고 싶은 남녀나 모두 그 전선의 참전 여부는 외출 전에 결정 난다. 즉 외출 전 거울 앞에서 결정 나는 것이다. “난 이성에 관심 없다.”, “난 연애나 섹스에 관심 없다.”하고 표현하기 위해 중성적으로 옷을 입거나 외모나 옷차림에 무심함을 표현한다.


어떤 외모나 옷차림은 이성에 대한 무심함과 성적 관계에 지쳐 있었음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반면 여전히 그런 경쟁의 장에서 경쟁하고 싶은 존재들은 거울 앞에서 무장을 끝내고 나온다. 여자의 백에는 수시로 이 무장을 재장전할 무기들로 가득하고 남자들은 지갑이나 자동차로 그걸 대신한다.     


승리의 확인

모텔의 거울은 승자를 보여준다. 자기 확인과 점검의 시간이 끝나고 자기도취의 시간까지 보낸 후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는 공간, 그 승리의 공간에 거울이 있다. 사방의 벽, 천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거울들 속에서, 성적 경쟁을 위한 무장을 완전히 해제한 홀가분한 신체는 승리를 만끽한다. 샤워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누워서,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심지어 방 한가운데 서서 경쟁에서 성공한 자신을 확인하며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승리한 신체는 움직인다. 모텔의 욕실, 화장대의 거울과는 다른 기능을 가진 거울들은 정면의 내가 아닌, 정지된 내가 아닌 움직이는 나를 보여준다. 움직이는 신체, 신체를 움직이는 나를 내가 보는 경험은 드물다. 어린 시절 유치원 재롱잔치를 촬영한 영상이나 피아노 학원 다니던 시절에 찍힌 서툰 공연 영상이 자신이 움직이는 걸 보는 첫 번째 경험일 것이다.


사실 아기들은 거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영아기 시기의 아기들에게 거울이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또 프로이트 같은 학자들의 생각이지만 자신의 현존과 부재를 확인하는 자신과 하는 숨바꼭질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앞에 서서 얼굴을 뜯어보고 머리새와 옷매무새를 다듬는 일 따위는 당연히 하지 않는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보기 위해 머무는 순간 이후, 아이는 얼굴이 타자를 향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이후로 아이는 거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 움직임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은 드문 경험이 된다. 헬스클럽이나 발레/댄스 스튜디오 등을 다니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나체로 움직이는 걸 확인하는 경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성인이 옷을 다 벗고 거울 앞에서 춤을 추거나 요가를 하거나 하겠나? 성인 크리에이터나 BJ 중에는 그런 이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신체를 타자의 시선 앞에 전시하는 것이기에 자기 확인의 시간은 아니다.     


처음 보는 나를 훔쳐본다.

모텔의 거울은 자기를 처음 보는 경험, 자기를 훔쳐보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성행위를 몰래 촬영한 후 나중에 혼자 보는 경험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 따위, 타자의 허락 없는 몰카는 싸구려 포르노보다 더 주체를 처량하게 만든다. 그런 행위는 오래전에 딴 훈장이나 트로피를 벽에 잔뜩 걸어 놓고 틈날 때마다 그걸 닦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퇴역 군인이나 은퇴한 운동선수의 자기 위로와 같다. 현재는 그 능력이 없음을, 뜨겁게 실행할 수 없는 쾌락을 향한 재처럼 남은 욕망을, 퇴적된 추억을 휘저어 떠오르는 부유물로 자위하며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텔의 거울, 그곳의 화장대와 욕실의 거울을 포함한 모든 거울은 축하의 장치다. 성적 경쟁에서 이겼음을, 그 수확물이 여기 있음을,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있음을. 그것은 남자에게만, 여자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누려야만 하는 찬사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크리스챤 베일이 거울을 보며 포즈를 취하는 장면 때문에 우린 양자 모두에게 가는 거울의 이 찬사와 혜택을 왜곡한다. 체위를 바꾸면 여자도 얼마든지 거울을 보며 정복감을 느낄 수 있다. 아마존 체위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평범한 여성 상위 체위만으로도, 또는 누워서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서도, 천장의 거울로 자신의 신체를 보며 승리감에 젖을 수 있다. 한 명의 건장한 수컷이 나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몸을 움직이며 애쓰고 있는 걸 보는 경험. 이런 경험은 사무실에서 무거운 복사 용지를 들고 갈 때 동료 남자 직원이 도와주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거기에 다른 내가 있다.    

모텔/호텔 거울에 비친 나는 내가 알던 내가 아니다. 그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내가 아니다. 문명화되고 이성의 지배를 받는 합리적 존재로서의 나도 아니다. 일분일초를 계량해 가며 촌각을 다투며 살던 나도 아니다. 행위-일, 취미 등-의 완성을 위해 효율성을 따지며 살던 나도 아니다.


거기 보이는 건 유희하는 나다. 어린 시절, 비생산적인 놀이에 몸을 움직이며 흠뻑 땀에 젖어본 이후로 거의 몇십 년 만에, 오로지 유희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몸, 그 몸, 내 몸을 목격한다. 결국 모텔 거울에 비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 보는 나이고, 그로 인해 나에게 반하는 묘한 나르시시즘의 현상이 일어난다.


몸매와 나이도 상관없다. 그 거울 속의 존재는 낯선 나다. 나이도, 몸도, 콜레스테롤이나 혈압이나 당뇨도 부재하는 순수한 몸뚱어리로서의 나이다. 섹스만을 위한 공간인 그곳에 거울이 많은 이유다. 다른 나를 만날 수 있기 위해. 우린 그 거울에 도취되어 그곳, 그 방을 다시 예약하고 섹스와 보는 행위를 반복한다.      


여기서 아주 큰 위반이 일어난다. 보통 남자는 시각, 여자는 그 외의 모든 감각으로 인해 흥분한다는 게 통설이다. 즉 남자는 여자가 보내는 시각적 자극에 흥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흥분을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 없다. 눈으로 타자를 보면 되는 것이다. 거울은 이 규칙을 깬다. 거울엔 세 사람이 보인다. 하나는 섹스하는 나, 다른 하나는 그/그녀와 함께 섹스하는 나, 그리고 그/그녀.     


“하는 나”와 “함께 하는 나”는 다른 존재다. 하는 나는 자기만족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시선에 놓인 주체다. 거기에 타자는 없다. "하는 나"를 보는 시선은 <아메리칸 사이코>의 바로 그 시선이다. 행위를 하는 전지전능한 자신만 존재한다. 자신의 능력 과시다. 이 시선 앞에서 타자는 사물화 된다. 일종의 섹스토이, 하는 나를 연출하기 위한 소도구로 전락한다. 이런 그/그녀는 후배위나 정상위를 하며 자신만 보고, 타자에겐 하는 나를 보는 쾌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과 타자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사물은 시선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두 사람이 모두 거울에 비치길 바라는 이들이 있다. 이때, 타인은 함께 의미를 만드는 존재이기에 나만큼 중요하다. 아니 나보다 중요하다. 타인의 얼굴, 몸매, 가슴, 엉덩이, 이런 것이 자신과 함께 보인다. 그/그녀는 옷을 입었을 때의 그/그녀가 아니다. 타자 또한 스스로 알고 있다. 모텔의 문턱을 넘은 순간 사회적 존재는 밖에 두고 온다. 그건 영화 <다크 타워>에 나오는 포털 같은 것이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는 구멍.       


경계를 함께 넘는 공범

경계를 넘어온 그/그녀는 일종의 공범이 된다. 성적 주체가 된 두 사람을 훔쳐보는 공범, 아니 그전에 저 문밖의 세상과 구분되고 격리된 공간에서, 다른 이들이 일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집에 가서 자거나 하는 시간에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던 모든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오직 동물적 쾌락에 몸을 맡겨 순수하게 육체적 존재가 되는, 사회에서 금기시된 뭔가를 저지르고 있는 공범. 범죄를 저지르며 범죄를 목격하고, 일탈을 하면서 일탈을 목격하고, 연기를 하면서 뷰파인더로 자신의 연기를 동시에 보는 이상한 경험을 함께하는 공범.     


모텔의 문턱은 그래서 저항의 문턱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문턱이다. 사회적 존재인 나로부터 해방되어 동물적인 나, 암컷과 수컷으로서만 기능하는 나로서 탈피하는 문턱. 그 문턱을 넘으면 밖과 안이 달라야 하기에, 이 공간과 저 공간이 달라야 하기에 조명, 냄새, 벽지, 침대, 욕실, 모든 게 달라진다. 그리고 사람도 달라진다. 그 다름의 결과를, 그 현상을, 만들어내기로 결정 한 두 사람에게 보여주는 스크린이 거울이다.     


그렇다. 모텔의 거울은 스크린이다. 자신도 낯선 자신을 관람할 수 있는 유일한 스크린. 다른 모든 곳의 거울이 사회적 존재인 자신을 다듬고, 그런 존재로 버티고 살아갈 수 있게 격려하는 자기 최면과 검증과 확신의 도구인 반면, 모텔의 거울은 그 모든 껍데기를 밖에 두고 온, 오직 성적 존재로만 존재하는 그런 자신을 보게 하는 스크린이다. 그 어떤 포르노보다 자극적이고, 그 어떤 훔쳐보기보다 은밀한, 낯선 시선을 만드는 도구다.     

성적 취향은 없다.

불을 끄고 하든 켜고 하든, 거울방에서 하든 거울이 없는 곳에서 하든, 스타킹을 신고하든 벗고 하든, 양말을 신고 하든 벗고 하든, 다 성적 취향일 뿐이다. 그건 문제 될 것이 없다. 진정한 문제는 그 취향을 스스로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취향은 아주 모험 정신이 투철하고, 모든 것에 열려 있는 마인드를 가진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도 그 존재를 모른다. 아니 없다. 다시 말한다. 없다.


이런 취향의 발견은 마치 컴컴한 방에 불을 켜는 스위치가 어딘가 있는데 정작 그 방의 주인은 불을 켜는 데도 관심이 없고, 그래서 그 스위치를 찾는 것에는 더욱 관심이 없었는데, 누군가 그 방에 들어와 열심히 온 사방을 더듬거려 그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버리는 것과 같다.


켰는데, 그저 단순히 형광등 하나가 들어올 수도 있고, 무드등 하나만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미러볼이 돌아가고 사이키 조명이 들어오고 레이저 쇼가 펼쳐질 수 있다. 그러니..... 살아온 방식으로 오늘의 나를, 다가올 나를 함부로 규제하지 마시길. 누군가 스위치만 찾으면..... 당신도 매일 거울방에 갈지 모른다.    

이전 02화 콘돔-기능/소비/혜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