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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Sep 22. 2022

콘돔-기능/소비/혜택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콘돔의 제품 가치

콘돔의 향과 색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콘돔의 가치는 그 두께에 있다.

포장도 여러 방식이고 그 디자인도 천차만별이지만 그것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500원짜리 동전 만한 수상한 고무 쪼가리, 그 자체가 중요하다. 포장지 겉면엔 콘돔의 브랜드가 요란하게 쓰여있지만 강조되는 건 두께다. 오래 할 수 있다. 향이 좋다. 돌기가 있어서 상대가 좋아한다 등등의 특장점은 두께 그다음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점조차 큰 의미 없다. 역설적이게도 콘돔의 질은 사용자에 의해 결정된다. 슈퍼카의 성능 발휘가 드라이버에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처럼 말이다.      


콘돔에 향이 있다고? 뜯을 때만 잠시 풍길뿐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헤이즐넛 커피의 그 향처럼 말이다. 그 향은 이내 두 사람이 이미 만들어낸 향기에 묻혀버린다. 아니, 솔직히 그 향을 맡을 감각은 이미 다른데 사용되고 있다. 향은 감각되어야만 향이라 할 수 있다. 감각되지도 않는 향이 무슨 의미가 있나. 연인의 후각은 이미 서로를 향해 있다. 모텔이든 자취방이든 그 제한된 공간에서, 섹스 전에 짜장면이나 양념치킨을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과메기나 홍어 삼합을 먹었어도 상관없다. 섹스의 향기가 공간과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니 콘돔의 향기는 섹스 전에 급히 가글 한 독한 리스테린의 향보 다도 쓸모없다.      


그래도 향의 쓸모

물론, 향은 거부할 수 없는 자극이다. 보기 싫은 게 있으면 눈을 감으면 되고, 듣기 싫은 게 있으면 귀를 막으면 되지만 맡기 싫은 게 있다고 코를 막을 순 없다. 숨이 막히니까. 마라톤을 하면서 안 것 중 하나가 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한 줌의 산소를 원해서 헐떡이며 뛸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데 향기로 먼저 존재를 알게 된다. 그럴 때면 달리기 연습의 집중도는 떨어지고 이 향의 미스터리한 출처를 찾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결국 페이스는 떨어지고 리듬을 잃는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가 아침에 주로 열리는지도 모른다. 도시에 향이 가라앉기 전, 어젯밤의 향기는 모두 새벽이 가져가 버린 후.


흑사병의 원인 중 하나가 공기 중의 악취에 있으리라 짐작했던 중세의 의사들은 까마귀 같은 가면 안에 향수 통을 부착했다. 공기와 냄새를 막은 것이 아니라 향수로 덮은 것이다. 1차 대전 때 방독면이 등장한 후에야 외부의 공기를 차단한 뒤에도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론, 공기 중 해로운 것이나 싫은 향은 다른 향으로 덮거나 걸러내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콘돔의 향은 자극적이지 않다. 콘돔이 코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고 입으로 들어 올 수도 있기 때이다. 게다가 공간의 향을 해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종 너무 자극적인 향수를 뿌리고 와서 공간의 향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이기 전에 이미 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 사람이나 향이 좋을 때는 상관없지만 그 사람이 싫을 때는 그 향의 객관적인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그 향은 회피의 대상이 된다. 마치 흡연가에겐 담배 향이 좋은 향이지만 비흡연자에겐 고통인 것처럼 말이다. 나처럼 담배 냄새가 싫은 사람은 돌아가기도 한다.      


콘돔의 향은 오히려 향이 없을 때 더 의미가 있다. 밤, 술에 취한 커플에겐 이미 도시의 향이 잔뜩 묻어 있다. 싸구려 생맥주나 소주의 향, 그리고 삼겹살, 패밀리 레스토랑 스테이크의 흔한 소스의 향. 그리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누군가의 향까지. 밤의 모텔은 이미 다른 사람의 향이 머물러 있다. 한가한 중년 불륜 남녀의 긴장되면서도 농익은 향, 점심때 짬을 낸 커플의 분주한 향, 수업을 끝내고 온 대학생 커플의 서투른 향까지. 잘 되는 모텔일수록 방 안엔 이미 몇 커플의 향이 포개져 있다. 그런 모텔에선 비싼 콘돔의 맛있는 딸기향은 꽉 막아 놓은 모텔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보다 존재감이 없다.     


두께의 가치

어찌 보면 콘돔의 디자인과 두께 또한 무의미하다. 그건 마치 언더레이어의 디자인보다 그걸 입는 사람의 몸매가 중요한 것과 같다. 언더레이어는 헬스 하는 사람들이 주로 입는 몸에 꽉 끼는 상 하의다. 워낙에 타이트하게 디자인되어서 디자인의 입체감으로 외형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입는 사람의 몸으로 그 외형이 결정된다. 꼴이 없는 형체는 덧씌워지는 것으로 그 형태와 그 퀄리티가 결정된다. 사실상 대부분의 옷이 그러하고, 콘돔 또한 그렇다.


사실상 우리가 구매하고 사용하는 모든 사물의 가치와 품격은 물건 그 자체에는 없다. 사용자에 의해 결정된다. 명품은 명품 스스로 명품일 수 없고, 명작이라고 우기는 아파트도 그 스스로 명작일 수 없으며, 슈퍼카나 럭셔리도 스스로 슈퍼 해질 수도, 사치스러워질 수 없다. 모든 의미는 전시된 사물에 있지 아니하고 주체와 주체의 실행 속에 있다.


특히 몸에 착용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더욱 그 주인의 소위, 태(態)에 의해 가치가 드러난다. 살 빼기 전의 조세호(물론 살을 뺐다고 해서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만)가 목 아래부터 신발까지 명품으로 휘감아도 사람이나 명품이나 명품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에게 싸구려 양복을 입혔는데 그것조차 명품처럼 보여서 곤란했다는 유하 감독의 불평은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예다.


특히 몸에 밀착되면 밀착될수록 그렇다. 팬티만 해도 그렇다. 길을 가다 속옷 가게의 쇼 윈도우를 보면 기가 막힌 디자인의 속옷을 늘씬한 마네킹들이 입고 있다. 마네킹들은 비현실적인 비율과 몸매를 하고 있다. 남자 마네킹이든 여자 마네킹이든 말이다. 그런 마네킹에 입혀진 팬티들-화려한 무늬와 레이스로 꾸며진 손바닥만 하거나 탄력이 좋은 밴드로 무장한-은 그 착용의 목적이 입은 주체가 아니라 입은 것을 보는 타자를 위한 것임을 드러낸다. 실크 또는 실크를 가장한 합성섬유의 번쩍임, 천과 천 사이를 위태롭게 지탱하는 망사, 용도를 알 수 없는 새끼손톱만 한 리본 등, 속옷 본연의 기능을 위한 디자인과 그 기능과 상관없는 장식까지 말이다.


허벅지의 파임에 깊이만 다를 뿐 이십 대 아가씨를 위한 팬티 중에도, 50대 아줌마를 위한 팬티 중에도 기능적 요소와 전시적 요소는 혼재한다. 남자 팬티도 마찬가지다. 넓은 밴드 위에 똑똑하게 새겨진 브랜드, 허벅지를 꼭 조이는 드로즈, 호랑이와 얼룩말의 무늬를 흉내 낸 패턴. 그런 속옷들은 겉옷 안에 입는 속옷이 아니라 겉으로 보여줘야 비로소 그 가치를 다하는 맨살 위에 입는 최후의 겉옷이다. 그러나 그런 겉옷이 용도대로 쓰이기 위해서는 신체가 그 디자인에 맞아야만 한다. 몸이 그 용도를 발휘하게 하는 최종 요소이자 절대적 요소다.


콘돔도 마찬가지다. 콘돔은 언더레이어처럼 스스로 형태 없는 무형의 주머니다. 그런 이유로 기능성 콘돔이라는 말은 성립 불가능하다. 콘돔의 기능 여하가 그 스스로에게 있지 않고 사람, 특히 성기의 외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품의 기능이 항상 일정해야 그 기능성을 인정받는다면 콘돔의 기능성이라는 것은 결국 얇은 보호막, 피임도구에 국한된다. 돌기가 있던 끝에 깃털이 달렸던 말이다.     


성적 기능성의 출처

콘돔의 기능이 착용자에게 달려 있듯이 착용자의 기능 또한 타인에게 달려 있다. 성적 흥분을 가능케 하는 타자 말이다. 콘돔을 입는 남자의 신체 부위는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근육이기 때문이다. 혈관도, 살도, 안의 근육도 자기 것인데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타자이다. 아무리 건강한 남자의 것이라도 외부의 자극 없이, 하다못해 자기 손으로 건들지 않는 이상. 그것은 비뇨기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비뇨기에서 성기로의 전환이 이뤄지기 위한 조건이 주체 밖에 있다는 사실이 콘돔의 기능이 남자의 신체 부위로 인해 결정된다는 말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비단 성기뿐 아니라 신체의 많은 부위의 성능이 타자로 인해 새롭게 발견되고 깨우쳐진다. 카마수트라 같은 성을 다룬 교과서를 독파하지 않아도 안다. 섹스를 하게 되면 불필요해 보였던, 또는 이런 기능이 있는 줄 몰랐던, 아니면 그런 용도로까지 쓰는 줄, 쓰일 줄 몰랐던 신체의 새로운 영역을 알게 된다. 그곳에 우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더 나아가 연인 앞에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내밀게 된다. 그것이 어떤 부위든 말이다.     


즉 콘돔은 인간의 신체가 자기의 것에서 벗어나 타자의 성애의 대상일 때 그 신체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그리고 성애를 할 때 내 신체를 누구의 것으로 인식해야 성애가 완성되고 즐거울 수 있는지도 묻게 한다. 나라는 주체 자체(신체와 정신을 포함한)를 타자에게 훌쩍 떠맡길 때, 신체의 성적인 기능이 백 퍼센트 발휘되는지 모른다. 콘돔이 스스로의 모형을 고집하지 않은 채 페니스의 모형에 따라 그 기능을 발휘되듯이 말이다. 결국, 성을 위한 신체는 오로지 타인을 통해서만 개발될 수 있다. 그것이 유연성이든, 발기력이든, 유지력이든지 간에 말이다. 그건 스스로 개발할 수 없는, 독서나 자습, 사교육을 통해서도 해결이 안 되는, 평생 교육원이나 문화센터를 다닌다고 해서 습득될 수 없고 개발될 수 없는 것이다.


쾌락을 향한 의지를 스스로 깨달아 펼쳐 보이려 해도 맞장구쳐줄 타자가 부재하다면 그 의지는 쓸모없다. 마치 케냐산 프리미엄 고급 원두로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가 최고의 커피를 팔겠다는 의지를 갖고 문을 연 카페에 손님이 찾지 않는 것과 같다. 바리스타의 능력이 그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존재할 때 발휘되고 가치를 획득하는 것처럼 성적인 신체 능력 또한 타자의 손길과 호응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마케팅의 문제   

섹스가 생식을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쾌락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둘 다 이기도 하기에 콘돔은 약국에서도 팔지만 편의점에서도 판다. 그러나 콘돔은 섹스에서 생식의 기능을 제거하고 쾌락만 남기기에 본질적으로는 약국에서 팔게 아니라 편의점에서 파는 게 당연하고 자판기에서 파는 게 더 낫다. 또 마치 껌이나 캔 커피를 사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사고, 애연가가 면세점에서 담배를 보루 채 사듯이 즐거움을 예상하며 박스 채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담배 하고는 달라서 당연하게도, 앞서도 말했듯이, 콘돔은 혼자서 쓸 수는 없는 물건이다. 담배는 많으면 많을수록 헤프게 쓸 수 있고, 적으면 아껴 쓸 수 있는 물건이지만 콘돔을 쓰기 위해선 성적 파트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양이 많은지 적은 지 가늠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열두 개들이 한 박스를 일주일 안에 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여섯  개들이 한 박스를 일 년 동안 쓸 수도 있다. 그 행위를 애호하는 것과 그 행위를 위한 도구의 기능 활용, 그리고 그 도구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렇게 구매자의 통제 밖에 있는 제품도 흔치 않다.          


생각해보면 섹스를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잘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즉 좋아하는 사람이 잘하고 많이 한다는 보장도, 또는 싫어하는 사람이 적게 하고 못 한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흑인이면 당연히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고 그것이 클 거라고, 미신처럼 믿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콘돔이라는 물건은 아주 부조리한 마케팅 상황에 직면해 있다. 콘돔에게 어떠한 마케팅 규제, 광고 규제가 없다더라도 그것을 마케팅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마케팅에는 구매자와 소비자가 다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기저귀를 구매하는 사람은 엄마나 아빠지만 그것의 사용자는 아기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아빠일 수 있지만 구매 결정권자는 엄마나 아이들일 수도 있다. 또 호텔이나 여행상품도 마찬가지다. 콘돔은 이런 제품 중에서도 가장 애매한 제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이것의 사용자는 당연히 남자다. 발기될 수 있는 남자. 그러나 이것 때문에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섹스에 몰두할 수 있는, 그러니까 제품으로 인해 가장 심리적인 혜택을 받는 소비자는 여성이다. 그렇다면... 이걸 누가 사는 게 좋을까? 누구한테 파는 게 좋을까? 광고는 그럼? 이래저래 난감하다. 그저 은밀하면서도 눈에 잘 보이게 전시하는 수밖에.


콘돔의 기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품의 혜택도 혜택이지만 제품의 성능, 기능, 질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문제다. 예를 들어 초박형 콘돔은 누구를 위한 얇음일까? 향이 나는 콘돔의 향은 누구를 위한 향일까? 앞쪽에 돌기가 돋아 있는 콘돔은 누구를 위한 돌기일까? 그건 모텔 어매니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모텔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의 모텔에선 파우치 안에 어매니티를 넣어 준다. 그 안엔 정말 별의별 것이 다 들어있다. 샴푸, 치약, 마스크 팩, 비누, 목욕 거품제, 일회용 면도기, 칫솔 등이다. 그런데 이 중 두 가지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애매하다. 나만 그런가?


일단 그중 하나가 머리 끈이다. 이 머리 끈은 거의 모든 모텔의 파우치마다 있다. 머리 긴 여자나 남자가 사용하겠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사용하지 않겠나 싶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까? 일단은 세수하기 전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여자의 가방에 머리 끈 하나 안 들었을까? 섹스가 끝난 후의 맨 정신이라면 가방에서 끈 정도 찾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파우치의 끈은 그야말로 비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섹스 과정에서 그녀, 또는 그의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울 때, 늘어놓은 파우치 속 내용물 중에서 얼른 뜯어 사용하라는 것. 모텔을 자주 가는 커플이라면 파우치 안에 머리 끈이 있다는 건 잘 알 테니 당연히 가방 속을 뒤적거리는 동안 열기가 식게 하진 않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콘돔도 넣어주는 것일지도.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도 아니다. 머리 끈처럼 커플의 섹스를 위한 보조제이다. 그래서 그것은 누가 누구를 위해 사도 별 문제없는 물건이다. 파우치의 물건 중에 여성용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남성용인지도 불확실한 물건은 그것뿐이다. 콘돔은 임신의 공포를 없애주면서 섹스의 쾌락을 높여준다. 그래서 우린 콘돔 사용의 주저함을 없애야 하고, 더 나아가 콘돔을 구매하는 데서 오는 민망함까지 제거해야 한다. 일단 해야 결과가 나오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섹스리스와 저출산 시대에, 일단 뭐라도 해야... 하늘을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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