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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Oct 05. 2022

몸;짓

사물의 우연 : 첫 번째 서랍 - 섹스

몸-도구

몸이 섹스를 위한 물건이냐는 물음에 “그렇다.”하고 대답한 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가, 하고 반문을 돌려준다. 아무것도 입지 않거나 누가 봐도 작정하고 고른 속옷을 입거나 목욕 가운으로 그 몸을 숨기거나, 모텔과 호텔의 조명이 신경 쓰이거나, 아무도 맡을 수 없는 부위에 향수를 뿌리고 대부분은 옷에 가려있을 게 뻔한 신체의 부위를 운동으로 가꾸는 행위 모두가 결국 성적 도구인 몸의 실행력 상승을 위해서다.      


물론 향수나 운동, 의상, 메이크업 등은 주체와 신체가 사회적 존재로써의 구실을 돕는다. 그러나 그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냉소적으로 했던 말처럼 “현대인의 가면”으로써의 몸이다. 사회적 존재로써 버텨내기 위한 투구, 갑옷이다. 더 나아가 전통극의 탈 같은 기능이다. 맨얼굴로는 비판할 수 없었던 윗사람들을 흉내 낸 탈을 쓰고 윗사람을 비판함으로써 정작 윗사람들에겐 저 비판이 내게 오는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하게 하고 심지어 웃고 넘어가게 하는, 그러면서 비판하는 존재 자체를 은폐시키는 기능 말이다.     


신체의 신성함

우리 몸이 사회적 생존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몸 자체로 적나라하게 의미가 있는 순간은 수술대 위나 침대 위, 둘 중 하나다. 전자는 생존을 위한 메스 질 앞에서고, 후자는 타자의 에로스적 시선의 해부 앞에서. 이보다 덜 적나라한 의미 있는 순간은 신체를 신체를 위해서 쓸 때다. 발레, 필라테스, 헬스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운동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신체의 움직임, 몸짓이다. 그 몸짓은, 플로서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하지 않는 신체, 소통하지 않는 신체, 정치적이면서 사회적 위상을 차지하기 애쓰는 신체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신전의 제사장으로서 오직 그 신을 위해 드리는 예배이자 찬양이다.      


이러한 신체, 자기 스스로에게 섬김을 받아 마땅한 신체는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잃어 갔다. 전쟁이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에 남자의 몸은 폭력의 도구였고, 여자의 몸은 점령자의 약탈물이었다. 결국, 남녀 모두 몸의 주권을 권력에게 뺏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과 야만의 시대와 멀찍이 떨어져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도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만 하고 가족의 구성원, 사회의 구성원, 조직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흔한 말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존재, 주체는 삶 속에서 분열된다.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를 만들어낸다. 아바타가 나인지 내가 아바타인지 모를 정도로.     


마이클 키튼 주인공의 20여 년 전의 영화인 <멀티플리시티>는 이런 수많은 나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주인공은 직장과 가정에서의 바쁜 일상을 대신할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며 살아내고 있다. 만들 때마다 옷, 얼굴, 메이크업, 향수, 심지어 몸도 바꾼다. <23 아이덴티티>에서의 정신분석학자의 주장처럼, 또 영화의 주인공이 괴물이 되면서 몸을 변신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에 따라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 바꾸며 사는지 모른다.     


히어로/변신의 일상성

이런 설정의 유치한 버전이 <특명 계장 타다노 히토시>다. 이 사람은 대형 광고회사의 있으나마나 한 부서에서 있으나마나한 직함을 달고 있다. 말은 계장인데 딱히 하는 일이 뭔지는 모른다. 그저 회장실과 가까운 사무실에서 일할 뿐. 그의 비밀 업무는 회장이 부탁하는 다양한 민원의 해결사다.     


이 있으나마나한 계장과 해결사는 한 사람이다. 드라마에선 이 상반된 두 역할을  헤어 스타일과 타인을 대하는 자세, 특히 여성을 대하는 태도로 구별되어 표현한다. 한 사람이 어떻게 보이고,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멀게는 <슈퍼맨>에서부터 시작해서 <23 아이덴티티>와 <특명 계장 타다노 히토시>까지 이어지며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현실에서도-이렇게까지 극적이진 않지만-우리 또한 어찌어찌 변신하며 살고 있다.      


몸을 모른다.

이런 변신의 삶에서 우리가 던져야만 하는 질문은 어떤 것이 진짜 나인 가이다. 이 질문을 신체, 몸에 국한해 던진다면 어떤 상황에서의 몸이 진짜 내 몸인가가 될 것이다.


우린 몸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몸과 실제 몸이 할 수 있는 능력과는 괴리가 있다. 요즘 부쩍 발목에 깁스한 사람이 눈에 많이 띄던데, 이렇게 가을에 정형외과가 붐비는 건 아이들 운동회나 직장 야유회에서 옛날 생각만 하고 달리고 축구를 하다 다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직 마라토너 이봉주도 아이 운동회 때 단거리에 출전했다가 3등을 했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인식하고 있는, 기억 속의 몸은 과거의 것이거나 왜곡되어 있다.      


그 몸을 움직여 뭔가 땀 흘리며 그 구실을 한 기억을 찾으려면 한참 기억 속을 뒤적거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몸은 언제 제 구실을 하는가? 또 내 몸은 언제 가장 본연의 모습을 보이는가? 언제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몸이 몸답게 써지는 순간, 플루서가 <몸짓들>에서 말했듯이, 노동이나 소통, 사회적 책무를 위한 몸이 아니라 그 몸이 온전히 자신을 위해, 몸답게 써지는 순간 말이다.     


앞에 말했듯이, 몸이 그 자체로 가장 기능적으로 아름답고 제대로 쓰이는 순간은 당연하게도, 몸의 기능을 최대한 쓸 때이다. 발레, 춤, 암벽 등반,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라. 난 실제로 이들 모두를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고 암벽 등반은 오랫동안 했었고, 수영은 지금도 하고 있지만 그걸 하는 이들의 몸은 그 장(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몸이다.      


이렇게 그 장 밖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몸, 가장 그러한 몸, 그러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몸은 섹스하는 몸이다. 포르노의 상품성은 바로 이 가장 볼 수 없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우리는 쓰임새를 몰랐던 근육의 쓰임새를 알고 유연함이 필요 없던 곳에 유연함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그래서 모든 몸을 만드는 운동-헬스, 요가, 필라테스-을 하게 되면 당연히 섹스하는 신체로써의 능력이 탁월해진다. 그런 운동들은 승부를 위한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몸을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를 개발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당연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몸에 대해서 모른다. 근육의 이름도 다 모르고 몸 안에서 암이 자라도 모른다. 증세가 있기 전까지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체를 누리는 순간은 오로지 신체를 움직일 때뿐이다. 그러나 움직일 줄 모르면 움직일 수 없다. 


움직임은 당연하지 않다. 최근 1:1 PT를 해주는 헬스클럽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헬스클럽을 다녀보면 많은 이들이 신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른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뭉쳐야 찬다.>를 봐서 알 수 있듯이 한 스포츠 종목에서 전설이 된 선수들도 축구를 배워야 한다. 쓰는 근육, 달리는 방법과 거리, 운동 두뇌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운동을 평생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오죽하겠나.     


그래서 당신이 걷기 이외에 다른 운동을 해 본 적이 없다면 PT를 추천한다. 예전에는 그것이 사치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엔 그 생각을 바꿨다. 몸의 움직임을 배우는 건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큰돈을 들여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기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절대 비싸지 않다.      


당연한 말을 다시 하면, 몸은 섹스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우린 그 몸, 에로스적 신체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몸이 그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시한부 수명과 제한된 장(場)과 타자의 숫자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도구 된 신체의 능력의 상승과 활용에 대해 자기애적인 관점으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섹스와 관련한, 내가 알기로는, 퍼스널 트레이닝 공간이나 커리큘럼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어디 음지에는, 또는 승인받지 않은, 자격증 없는 사람과 장소, 학원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에 관한 공공연한 광고나 홍보를 본 적은 없다. 


그러니 그 신체의 훈련과 수련은 순전히 주체와 상대의 몫이다. 내 몸과 타자의 몸을 애정을 갖고 개발/계발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모든 신체의 단련과 숙련이 그렇듯이 경험이나 횟수만큼 그 행위에 대한 몰입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그 행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 행위 자체를 더 낫게 하려는 열정이 필요하다.      


“섹스 따위에 열정이라니”할지 모르겠다. 그 열정을 대신 어디에 쓰는지 궁금하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질 신체를 갖고 어디에 열정을 쓰는지 말이다. 아, 물론 더 고상하고 고차원적인 일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구를 살리거나, 이웃을 구하거나, 미래를 바꿀 기술을 준비하고 있거나 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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