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15년 넘게 일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해봤다. 다큐멘터리 작업도 두 번 해봤다. 하나는 울산의 달동의 변천사에 관한 1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였고, 다른 하나는 닭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전자는 일제강점기 때의 조사 자료가 발견되어서 그 자료에 담긴 모습과 비교하여 현재는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담아낸 것이었다. 지리적, 환경적 변화는 물론이고 삶의 변화상도 담는, 일종의 민속지학적 다큐멘터리였다.
후자의 경우엔 다른 프리랜서 PD가 기획했지만 감당하지 못하던 차에, 마침 촬영비를 못주고 있던 감독에게 그 돈 대신 준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지만 당시 사무실을 꾸려가던 것이 어려웠던 감독은 그 일을 해야만 했고 그 일의 진행을 위해선 내가 필요했다. 물론 나 또한 처음 해보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였기에 의욕이 있었고.
그때만 해도 아직 젊어서였는지 의욕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덕분에 감독은 양념치킨을 처음 만든 사람을 인터뷰했고, 우리 문화 속 닭이 갖고 있는 닭의 의미를 담기 위해 서울의 <닭 문화관>을 찾아 꼭두닭에 대한 인터뷰, 부산의 유명한 민화 작가를 찾아가서 민화 속에 담긴 닭의 의미도 담았었다. 그뿐인가 경주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천마총에서 나온 알을 촬영하기도 했다. 김해 국립박물관에선 유리 목걸이를 한 시간 동안 촬영했었고, 수로왕비릉에선 파사 사탑을 오랜 시간 찍었다.
여기에 치킨으로 유명한 수원, 닭강정의 메카인 속초, 치킨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대구, 부산의 유명한 치킨집을 두루 취재했다. 게다가 우리 닭의 원류를 찾아 베트남 북부까지 갔다 왔다. 얼마 안 되는 제작비 신경 안 쓰고 시나리오에 담고 싶은 건 다 담아서 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무책임한 결정들
더 놀라운 경험을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될 수도 있었고 4,5년 전에 책을 낼 수도 있었다. 그것들은 낯선 것이었지만 가능한 시도였다. 그 가능한 시도들이 엇갈렸던 시기를 정리해보자.
그렇다.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의 순서를 정리하고 있다. 우선 지금부터, 독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나와 일하고 있는 감독, 저 다큐멘터리를 함께 했던 감독은 서감독이라고 부르고, 내 첫 번째 회사였던 대행사에 만난 감독은 박감독이라 부르자.
파일을 보니 2006년 여름이다. 내 기억도 그렇다. 박감독이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경성대학교 앞의 술집이었다. 맥주 몇 잔을 마셨다. 박감독이 본론을 꺼냈다. 자기가 이직을 했는데 거기 작가가 없어서 일이 제대로 안 된다. 또 자기가 영화 작업도 해야 하는데 그 또한 마땅한 작가가 없다. 그러니 영훈 씨가 함께 일하면서 영화 시나리오도 같이 쓰자는 제안이었다. 그래, 그때는 어렸다. 이제 막 삼십 대도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철이 없었다.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는 아내를 믿었다. 애를 안 낳기로 약속했으니 부양의 책임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렇게 무책임했다.
그렇게 박감독을 따라 세 번째 직장으로 향했다. 사장은 야망이나 포부가 없는 사람이어서 적극적인 영업도, 로비도 하지 않았다. 고정적인 일 몇 개로 회사를 유지하고 먹고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 회사에 서감독이 있었다. 촬영과 편집을 맡고 있었다. 그때는 서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찌 됐든 회사는 한가했고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은 많았다.
잡힐 것 같았던 꿈
박감독은 분명 유망한 사람이었다.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했고 단편 영화로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 그의 직속 선배이자 시나리오만 들고 오면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선배 감독은 최근 <경관의 피>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 감독의 상업 영화 데뷔작인 <리턴>인데, 개봉했던 해가 2007년이다. 박감독은 그 선배의 시나리오 초안을 내게 보여줬다. 그 파일은 아직도 있다. 원래 초안의 제목은 <천 개의 혀>다.
어찌 됐든, 될 것 같았다. 그때는 부산 출신 영화인들이 막 각광을 받을 때였고 박감독도 국내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신예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그가 서울에서의 일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취업한 곳이 대행사였고 그곳에서 날 만났던 것이다. 그가 내게 뭘 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도 나와 함께라면 되리라 믿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해 여름부터 틈날 때마다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둘 다 스릴러를 좋아했기에 연쇄 살인을 소재로 삼기로 했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구축해나갔다. 그렇게 가을이 지났다.
혈기 왕성했던 세 사람
어느 날 박감독이 또 전화했다. 만나자고 했다. 어떻게 서감독을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회사를 차려 나가기로 했고 나를 작가로 “고용”해서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땐 무책임했다.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울산에 갔다. 세 사람은 작업실을 보러 다녔다. 결국 옥동, 법원 밑, 한 상가 건물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실내는 검은색으로 칠했는데 나와 두 감독이 손수 칠했다.
잘 될 리가 없었다. 다음 해 난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그 얘기는 앞서 했으니 일단 생략하고 넘어가자. 2007년의 파일을 보면 8월까지 쭉 이어진다. 분명 일은 있었는데 하청에 재하청이었거나 거의 돈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제법 큰 홍보 영상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준 사람이 제 때 돈을 안 줬다. 그 돈을 받기 위해 서감독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여하간 이 해 여름을 기점으로 두 감독은 한계에 달했다. 박감독이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서감독에게 했고 서감독은 회사 이름과 기자재를 그대로 받는 조건으로 그를 놔줬다. 당연히 내게 월급을 줄 여력이 없었으니 나 또한 프리랜서로 풀렸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그야말로 삼십 대 중반에 서울로 대학원을 다니는 무책임한 백수가 된 것이다.
욱해서 날아간 시나리오
영화 시나리오는 어떻게 됐을까? 언제 영화의 꿈은 사라졌을까? 박감독과 헤어진 이후에도 시놉시스와 그것을 좀 발전시킨 트리트먼트 원고를 메일로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그 가을쯤인가... 감독이 수정한 트리트먼트를 보냈을 때, 난 메일을 열어서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열어보진 않았다. 그 며칠 후 박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도 이 전화 내용은 기억한다.
“영훈 씨, 좀 보셨습니까? 어떻든교?”
“아, 예, 자세히는 못 봤는데... 음...”,
난 그제야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그런데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암호가 걸려 있었다. 감독이 걸어 놓은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파일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물어본 것이었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웃고 넘어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 핑계를 대거나, 뭐 여하간 능청스럽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땐, 다시 말하지만, 철이 없었다. 게다가 박사 과정의 2학기에 접어들어서 한참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공부의 양도 많았고 통학도 힘들었다. 가을 학기부터는 모교에서도 두 개의 강의를 맡아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날 갖고 놀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었다.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박감독의 번호를 차단한 뒤, 그 뒤로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다. 거기서 내 시나리오 작가의 꿈도, 그 사람의 영화 입봉 꿈도 멈췄다. 그 뒤로 딱 두 번 봤다. 두 번 다 길에서 우연히. 박감독은 현재 부산의 한 제작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은 걸로 알고 있다.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는 웹 드라마는 제작했다고 하는 데 영화는 손을 놓은 걸로 알고 있다. 서감독은 그 뒤로 대략 7,8년을 버텼다. 그가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한 건 2017년 이후다. 그 뒤, 내게 정규직 제안을 했고 함께 일하면서 갑자기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가도 이유는 모른다.
그때, 왜 그랬을까? <달콤한 인생>의 대사처럼,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본 적은 없다. 그때, 우린 서로에게 모욕감을 줬을까?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 우리가 꿨던 꿈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여러 차례의 시놉시스를 거쳐 시나리오 직전 단계인 트리트먼트까지 다다른, 그 과정, 그 결과물들을 하나씩 열어 봤다. 분명, 그에게나 나에게나 영화는 꿈이었다. 어쩌면, 둘 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재주나 재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어떻게 됐을지는 모른다. 과거로 돌아가 보는 영화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일 것이다. <어바웃 타임>이나 <나비효과> 같은 영화 말이다.
최선의 선택이 최고의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 최고의 결과가 늘 최선의 선택으로부터 나오지도 않는다. 언제나 이성적인 선택만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그 확률이 좀 높아질 뿐, 여전히 기분이 이끄는 대로, 우발적으로 선택하는 일들이 있다. 아직은 그 “사건”을 감당할 수 있어서일까? 정신적, 육체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이성적 판단의 확률이 높아지는 건, 바꿔 말하면 그 “사건”을 감당할만한 여력이 없어서일까? 결국, 어른의 지혜라는 건 그 여력이 바닥을 보인 뒤에나 찾아오는 것일까?
우연히 마주친 젊은 날의 나
오늘 폴더를 헤집고 파일을 들추다가 재미있는 파일을 찾았다. 잡글이라는 폴더에 영화 일기라는 파일이 있었다. 수정 날짜는 2004년 10월 24일. 열어 봤다. 56페이지에 달하는 문서. 전체가 영화 감상문이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본 영화들의 감상이 거기 있었다. 심지어 본 도시와 영화관까지 쓰여 있었다. 집에서 비디오로 봤는지, 비디오방에서 봤는지도. 어쩌면... 할리우드 키드였는지도... 몇 개의 감상문을 읽으면서 울컥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내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