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Dec 06. 2022

베테랑이 베테랑을 찾는 이유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17

함께 합을 맞혀온 세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연차가 비슷하다. 감독과 내가 얼추 20년차고, 잠실의 롯데월드타워 뒷동네에 웅크리고 있는 조명하는 백 감독도, 부산 사는 지미집 김 감독도, 종종 CG를 맡기는 강남의 윤실장도 감독과 삼십 대 때부터 함께 알고 지낸 사람들이다. 다들 속된 말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대충 군대 갔다 온 뒤부터는 이 바닥에서 어슬렁거렸고 서른 넘어서는 자기 재주 하나에 올인해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는 그나마 5년 안쪽으로, 인연은 맺은 세월이 짧은데 부산 화명동에 큰 메이크업 살롱을 운영하는 미모의 백 실장이 그 주인공이다. 이 양반 스토리와 나와의 인연도 희한하다면 희한할 수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얘기해보겠다.


베테랑의 효율성

종종 영상 업계에 있는 후배들이 직접 하거나, 또는 그런 모임에 갔다 온 후배들이 간접적으로 전하는 말이 있다. 왜 우리에게 일을 안 주냐, 왜 우리하고는 일을 같이 안 하냐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한다. 감독이나 나나 마음은 같다. 그러나 경력이 짧거나 경험이 적은 사람과 일하는 것이, 그러기로 결정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CF가 됐든, 홍보 영상이 됐든 모델이 나오는 연출 장면을 촬영해야 할 경우 각지에 있는 전문 스태프들을 불러 모은다. 모델도 당연히 서울의 전문 에이전시를 통해 섭외한다. 다들 시간이 돈인 사람이고 우리 또한 시간만큼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촬영은 동틀 무렵부터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타이트하게 진행된다.      


야외 촬영의 경우엔 날씨와 햇빛의 눈치도 봐야 한다. 촬영 장소가 여러 곳일 경우엔 가장 이동 시간도 생각해야 한다. 예를 태화강 국가정원 홍보 영상을 촬영할 때는 분명 그 안에서 다 촬영했지만 촬영 장소는 그 내부 여러 곳이었고, 때문에 이동시간과 컷과 컷 사이의 촬영 준비 시간, 장소 변화에 따른 모델의 의상 변화와 메이크업 정돈 시간이 들었다.      


결국, 현장에선 뭘, 어떻게 촬영할지 고민하는 시간은 없다. 감독은 촬영 며칠 전에 이미 세세하게 콘티를 구성한다. 그 콘티는 스태프들에게 사전에 배포되고, 스태프들은 그 콘티를 보고 나름의 최고/최선의 방법들을 연구해서 준비해 온다. 조명 감독은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지 체크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에 따라 어떻게 조명을 조절해야 하는지 구상을 끝낸다. 지미집 감독도 콘티와 촬영 장소를 보고 카메라 무빙을 어떻게 해줘야 감독이 생각하는 그림이 나올지 사전에 구상을 하고 온다.      


군더더기 없는 회의

현장에서 이들의 대화를 보고 있으면 군더더기가 없다. 회의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다. 조명 이렇게 치면 되겠네? 카메라 무빙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케이? 이 정도의 말들만 오간다. 신속한 세팅이 끝나고, 모델이 등장하면 촬영이 시작된다. 물론 몇 테이크를 가지만 그것은 불안 때문이 아니라 베스트를 위해서다. 한 장면이 끝나면 이동, 다시 짧은 대화, 촬영, 이동...     


물론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다. 그러면 제삼자를 부른다. 그러니까 영상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걸 물어보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대숲에 고즈넉한 분위기의 오솔길이 있는데 그 길의 저 방향에서 보는 것과 이 방향에서 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지 묻는 정도다. 대체로 전문가들의 의견은 일치하는데 갈리는 경우, 내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다.      

이래라저래라,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조율하고 회의를 하고 심사숙고할 시간이 없다. 어렵게 모인 만큼, 최대한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려 한다. 그 에너지가 오롯이 촬영과 제작에 쏟아지길 원한다. 그야말로 척척 합이 맞는 고수들이 만들어가는 현장에 신출내기가 낄 자리가 없다. 티칭과 코칭의 시간이 거기엔 없다. 이런 이유로 젊은 친구들과 일을 하기가 힘들다.


조선소 홍보 영상의 극적인 오프닝

2011년도 폴더를 열어보고 웃음이 나왔다. 한 대형 조선소의 홍보 영상 파일이 보였다. 자잘한 일을 하면서 사무실을 꾸려오던 감독에게 모처럼 들어온 큰일이었다. 규모 있는 홍보 영상의 기획과 시나리오에 자신이 없었던 감독의 선배가 하청을 준 일이었다. 베트남에 새로 연 도크와 야드도 담아야 했다. 모처럼 들어온 큰일이기에 감독은 오프닝에서 확실한 임팩트를 줘서 눈도장을 받고 싶어 했다.


감독이 이 오프닝에 대한 아이디어 회의를 하러 부산에 왔었다. 당시 CG를 하던 윤실장이 마침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 경성대학교 앞 센츄리 빌딩에 터를 잡고 있었다. 우린 윤실장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실없는 농담을 몇 개 주고받은 뒤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 이야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했겠나? 근황을 묻고 건강을 묻고 잡담이 한참 오간 뒤 오프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내가 낸 아이디어는 지금 생각하면 진부하면서도 간단했다. Ship of bottle, 병 속에 범선을 모티브로 제안했다.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한 홍보 영상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병 속에 범선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지 예나 지금이나 상상도 안 간다. 분명한 건 엄청난 집중력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 그런 장인 정신으로 거대한 선박을 만든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일종의 거대함과 섬세함의 대조를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고나 할까?      


세 사람은 누가 들으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갈 만큼 가볍게 이 오프닝의 디테일을 논했다. 공간은 어떤 공간이 좋을지, 누가 만들면 좋을지, 배의 종류는 무엇으로 할지, 아이가 주인공이라면 소년이 좋을지 소녀가 좋을지, 어디까지 CG로 하고 어디까지 실사로 촬영할지, CG로 한다면 배와 병을 실제처럼 만드는 것이 가능한지, 배 모형은 실사로 하고 그 만들어지는 과정만 CG로 하면 어떨지... 여하간 그런 논의 끝에 얼추 오프닝 시퀀스의 디테일이 완성됐다. 세세한 부분은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다듬기로 했다. 막 자리를 파할 무렵, 윤실장인가 감독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배, 거북선으로 하자고 하면 어쩌나?”     


결론부터 말하면, 거북선이 됐다. 그러니까 병 안에 배가 거북선이 됐다는 말이다. 조선소의 대표인지 중역인지가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 선주들이 거북선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모형, 아직도 작업실에 있다.


쟁이의 욕심

베테랑이 모여서 일 얘기를 하면 짧게 끝난다. 견적을 파악하고 데드라인을 생각하면서 일의 난이도를 염두에 둔다. 그 안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얘기하고 가능한 것은 더 세련되게 하는 법을 찾고,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게 만들 법을 찾는다. 대안들 중 가장 나은 대안을 향해 의견을 좁히고 그 대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인력과 기술, 적절한 장소와 공간을 생각한다. 나 같은 작가/카피라이터가 오가는 이야기를 기억하거나 메모를 하여 나중에 간단한 제작 브리프나 시나리오에 첨삭하여 공유한다.      


그 후 더 세부적인 사항은 이 브리프나 콘티, 시나리오를 보면서 조절한다. 모델의 의상, 헤어, 메이크업 톤도 이때 결정된다. 조명의 종류, 지미집이 쓰이는 장면, 짐벌과 같은 도구를 사용한 핸드 헬드로 찍을 장면, 드론을 이용한 항공 촬영 장면을 나눈다. 물론 각각의 세부 견적도 논의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끼리 일하는데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쿵하면 짝하고, 척하면 착하는 사람들끼리 편하게 일하는 것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다들 키우는 직원이 있고 다들 한 두 명씩 현장에 데리고 오지만 막상 큰 프로젝트를 할 땐 자기가 조명을 잡고 지미집을 잡고 카메라를 잡는다. 실수를 줄이고 완벽한 결과를 만들려는 욕심이 있어서다.


다들 이걸 언제까지 하겠나 푸념하거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힘들다며 의욕 없이 앉아 있다가도 일단 일이 시작되면, 놓치기 아까운 장면이나 제대로 하면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장면이 만들어질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 나선다. 쟁이의 정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신이 있는 후배라면 우리도 언제나 같이 일하고 싶다. 다만,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


*두 개의 사진 속에 감독, 조명 감독, 지미집 감독,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모습이 있다.

나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