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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08. 2022

현장에 있었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18

모처럼의 현장

어젠 현장에 있었다. 구의회 홍보 영상 인트로 촬영을 했다. 부산 수영구에 사는 조감독의 차를 얻어 타고 울산에서 합류했다. 배우는 KTX로 서울에서 내려왔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백실장은 부산 화명동에서 승용차로 왔다.     


규모가 있는 촬영은 아니었다. 의장실에서 이미지 컷 몇 컷, 의회 본회의장에서 이미지 컷 몇 컷이었다. 얼굴보다는 실루엣이 나오는 콘티여서 백실장은 얼굴의 메이크업만큼 헤어를 정성 들여 만졌다. 모델은 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컸지만 몸무게는 십 킬로는 적어 보였다. 검은색 구두, 흰색 셔츠, 체크무늬 넥타이, 오뚝한 콧날, 하얀 피부, 정돈된 머리칼. 눈대중으로 봐도 95 사이즈로 보이는 프렌치 네이비 슈트가 마네킹에 입혀 놓은 것처럼 딱 맞았다. 메이크업을 끝낸 모델이 구의회가 있는 구청의 5층 복도를 서성이자 의회 사무처 여직원들이 분주하게 복도를 오갔다. 심지어 모델을 구경하러 촬영 준비를 하는 의장실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새로운 장비의 등장

출발 전, 작업실. 감독은 새 장비를 보여줬다. 

“오, 이거 패닝 할 때 쓰는 건가요?”

“집 슬라이드라고...그렇죠. 그럴 때도 쓰고, 지미집처럼 쓸 수도 있고.”

우린 아직도 서로 존대를 한다. 호기심 많은 독자라면 지금쯤이면 검색을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검색을 귀찮아하는 독자를 위해 이 장비를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올림픽 단거리 육상경기를 보면 트랙을 따라 놓인 작은 레일 위로 카메라가 빠르게 횡으로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레일은 액션 영화에서도 종종 쓰인다. 지미집 슬라이드는 이 레일을 슬라이드 형태로 만들어서, 그러니까 트랙을 어느 정도 길이로 만들어 카메라 삼각대 등에 올려놓고 카메라를 좌우(패닝), 상하(틸팅)로 움직이게 하는 도구다. 아마 검색해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이 슬라이드의 길이는 보통 1미터 안팎이다. 감독이 산 건 1미터 6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아마 중고로 샀었도 몇 백만 원은 줬을 것이다.


감독과 함께한 현장들

이 일을 하면서 많은 촬영 현장에 있었다. 대 여섯 곳의 대형 찜질방에도 있었고, 대형 피트니스 센터의 현장도 지켰었다. 분양광고를 위해 건물의 흔적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분양 대행사 관계자의 열변을 들은 적도 있다. 또 같은 이유로 건물이 들어설 번화가 사거리에 서서 이 도로 위에 구현될 CG를 감독과 함께 상상한 적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때는 청도, 부산, 김해와 경주 박물관의 촬영 현장에도 있었다.      

태화강국가정원 일을 할 때는 감독과 거의 매주 그곳을 갔다. 계절마다, 스폿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어서 어제 본 그곳이 오늘과 같은 느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곳에 있는 십리대숲을 입구에서 멀리 볼 때와 안내센터 옥상에서 볼 때, 태화루 방향에서 걸어오면서 볼 때와 태화강을 건너 동굴피아 방향에서 볼 때의 느낌이 다르다.


또 그곳은 당연하게도 계절마다 다른 꽃을 심어 피우고, 나무들도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은행잎도 나무의 위치마다 물드는 순서와 속도가 다르고 계절마다 찾아오는 새들도 다르다. 당연히 사람들의 옷차림도 달라진다. 이런 이유들로 감독과 난 잠시 틈만 나면 그 앞에 사는 동네 사람들처럼 산책하듯 그곳을 둘러봤다. “언제 수레국화가 만개합니까?”, “꽃양귀비가 지금 어느 정도 핀 거죠?” 감독은 정원에서 일하시는 분을 붙잡고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카피라이터/작가의 역할

감독과 함께 하는 촬영 현장에선, 내 역할이 크지 않다. 물론, 현장에서 카피나 대본을 고쳐가며 촬영해야 하는 경우엔 내 역할이 있다. 예를 들어 시장이나 구청장의 신년인사, 명절 인사 같은 걸 촬영할 때는 그 멘트를 내가 직접 써 간다. 평소 그분들의 말투나 발음,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단어를 고르고 문장의 길이를 선택한다. 이렇게 준비를 해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쉽지 않다. 유독 씹히는 발음이 있고 생각보다 길게 느껴지는 문장이 있다. 이런 경우엔 그 자리에서 수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촬영 현장에선 할 일이 없다. 약간의 짐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젊은 조감독이나 스태프들이 하지 말라고 말린다. 흠... 이럴 땐 나이 먹은 게 실감 난다. 대부분의 시간은 촬영 현장을 본다. 말 그대로 응시한다. 그러나 내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감독은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것 같다. 또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고 촬영에만 몰두할 수도 있다.      


고객 응대 전문

담당 주무관이나 고객이 촬영 현장을 찾을 때가 있다. 그들은 은근히 감독을 보고 갔으면 한다. 그러나 촬영하다 말고 그들을 맞을 수는 없다. 현장에 몰입하고 있는 스태프가 몇 명인가. 이때 내가 슬쩍 나선다. 담당 주무관과 인사를 하고 악수하고 날씨 얘기를 하고 현재 촬영하는 장면에 대해 설명한다. 지금 어느 정도 촬영했고 앞으로 몇 장면 남았는지도 얘기한다.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스태프들과 점심을 먹을만한 식당 이야기도 하고 저녁 회식 이야기도 한다.


은근슬쩍 이 촬영을 위해 새로 산 장비 이야기를 하면서 감독이 얼마나 정성 들여 찍고 있는지도 어필한다. 조명감독이나 지미집 감독이 어제 다른 드라마나 예능 촬영 때문에 밤을 새우고 왔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서 이 스태프들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나고 업계에서 인정받는 베테랑인지도 스리슬쩍 자랑한다. 이 정도 대화를 하면 담당 주무관이나 고객은 고생하시라는 인사를 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긴장 이완 전문

다른 역할도 있다. 한 장면의 촬영이 끝나고 다음 촬영을 준비할 때 슬쩍 감독 옆에 선다.

“어때요?”, “아, 잘 나올 것 같아요.”,

“물 한잔 할래요?”, “커피 있는교?”, “아, 아까 조감독이 사 왔어요.” 

그렇게 함께 커피나 물을 마시며 잠시 긴장을 푼다.


다음 장면에 대해 의견을 물으면 의견을 말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모든 장면의 모든 디테일은 그의 머릿속에 있다. 그저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을 한번 툴툴 털어 정리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나 또한 너무 심사숙고해서 답해주지 않는다. 야외 촬영의 경우엔 그저 날씨 이야기를 하고, 햇빛 이야기를 하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해가 지는 시간을 미리 알려주는 정도다. 점심시간 전이면 점심 메뉴 이야기를 하고, 촬영 종료가 가까워오면 저녁 메뉴 얘기를 하는 정도다.      


올 해의 마지막 현장

그런 역할 정도지만, 감독은 내가 현장에 오는 걸 좋아한다. 어제도, 딱 그 정도의 역할이었지만, 현장에 있었다. 올해 마지막 현장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문화예술회관일 것이다. 그때도 딱히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짐 몇 개 들어주는 시늉을 한 뒤, 앞에 놓인 악기와 그 색에 대해 감독과 잠시 상의하는 척을 하고, 점심 메뉴와 저녁 메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친해진 예술회관 팀장이 오면 이 날 새로 투입될 고가의 렌즈-감독은 이 촬영에 새 렌즈를 사서 투입하기로 했다-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함께 현장에서 보낸 한 해의 마무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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