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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23. 2022

쉰이 넘어서도 더 나아질 수 있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23

연말까지 꽉 찬 일정

몇 년 전부터 연말까지 바쁘다. 2019년도에는 감독이 문화예술회관 송년 음악회의 중계를 맡아하는 바람에 마지막 날까지 그야말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나마 올 해는 송년 음악회 중계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      


보통 회식은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한다. 계절이나 분기별로 정해 놓고 하는 건 아니고 좀 규모가 있는 촬영을 하거나 큰 프로젝트가 완료 됐을 때, 그리고 연말에 종무식 겸 한다. 연말 회식은 많이 모이면 여서 일곱 명 정도, 아니면 감독과 나와 조감독, 이렇게 셋이서 하곤 한다.     

 

올해 송년 회식은 마지막 주 월요일로 잡혀 있다. 이 날, 우리 팀의 마지막 촬영이 있다. 주인공이 문화예술회관 무대와 콘트라베이스여서 따로 모델은 섭외하지 않았다. 다만 서울에 조명 감독과 그 팀이 내려오고 영화 촬영 때 쓰는 고급 렌즈를 대여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회식은 이 날 촬영이 끝난 후 할 것이라 모처럼 멤버가 풍성할 것 같다.      


연말 회식 때 감독과 나누는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지난 프로젝트들을 돌아보고 개선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한 점은 우리끼리라도 칭찬하고 아쉬웠던 점은 보완하자고 다짐한다. 필요한 장비나 기술, 인력에 대해 논의하고 최근 본 광고나 영화, 영상물을 언급하면서 그 안에 담긴 크리에이티브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대화는 보통 회식이 시작하고 이삼십 분 안에 종료되고 나머지 이야기는 그냥 사는 이야기, 더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어 하곤 한다. 회식의 마무리 즈음 내리는 결론은 내년엔 더 잘 됐으면 좋겠다, 내년에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내년에도 우리 실력이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이런 내용이다.  


달라진 수영 실력과 몸

수영을 다시 한지 4개월 정도 됐다. 마스터 B반에서 A반으로 옮긴 지는 한 달 정도 됐다. B반엔 나보다 어린 사람이 없다. 6, 70대 어르신과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들이 주류다. 당연히 스피드는 느리고 운동량은 적다. 


A반에선, 나이를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액면가로만 보면 내가 제일 연장자로 보인다. 최소한 나보다 서너 살 이상 많은 사람은 없지 싶다. 1번 주자의 속도는 B반의 1번 보다 서너 배는 빠르고 세트와 세트 사이의 휴식은 몇 초 안 된다. 당연히 운동량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난다. 대충 40퍼센트 정도?


처음엔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네 세트를 하면 한 세트를 쉬어야만 했다. 자유형을 하면 1,2번 주자와 한두 사람 간격이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저번 주부턴 이 간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속도도 붙었고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배는 납작해졌고 수영복은 약간 넉넉해졌다. 복근과 허벅지를 이어주는, 우리가 흔히 치골이라 부르는 장골근에는 처음 보는 윤곽이 잡혔다.      


쉰 너머에 있는 가능성

쉰이 넘어서도 나아질 수 있다는 것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수영 실력도, 신체 능력도, 심지어 몸매도 더 나아졌다. 감독과 내가 연말에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업을 위한 능력도 나아질 수 있을까?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래야만 한다. 안주하지 않고 지금의 위치에 도취되지 않은 채, 더 괜찮은, 더 믿을 수 있는, 더 뛰어난 프로가 되고 싶다. 감독과 내가 별 탈 없이 긴 세월 함께 일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공통 된 바람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취미가 독서였다. 재미로 읽었다. 소설이 됐든 인문 사회 과학 책이 됐든 시간이 나면 읽었고 저녁 시간엔 보지 않아도 TV를 틀어 놨었다. 칼럼을 쓴 이후로는 독서도 일이 됐다. 읽기 싫으면 안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만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 읽을 때도 있다. 저녁마다 숙제를 하는 딸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도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저녁을 먹을 때부터 꺼져 있던 TV를 다시 켜진 않는다.     


돈을 버는 일이 다 그렇듯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생계가 걸려있으면 시큰둥해지고 지겨워지고 지칠 때가 있지 않던가? 그래도 먹고살려면, 더 나아가 그 바닥에서 앞서가고 자리를 지키고 싶으면 노력이라는 걸 해야 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마음일 것이다. 아마 프로게이머도 그럴 테고, 포르노 배우도 그럴 것이다. 좋아서 하던 것도 일이 되면 더 잘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한다.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그 업으로 계속 돈을 벌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다.     


고수의 능력

2019년, 송년 음악회 때, 감독은 카메라 팀을 맡았다. 감독과 난 음악회가 시작하기 한참 전에, 해도 지기 전에 도착했다. 난, 세팅 구경만 하고 집에 갈 참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무대 세팅은 다 됐고 무대 양 쪽으로 인사말을 하는 내빈과 연말 카운트다운을 하는 숫자를 보여줄 대형 LED 전광판이 설치되는 중이었다. 전광판 업체 관계자는 감독이 나타나자, 함께 전광판 방송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조정 부스는 객석 맨 뒤에 있었다. 잠시 후, 그 관계자의 표정이 변했다. 왼쪽에 있는 전광판을 한 번 보고, 다시 영상을 틀었다. 그러더니...


“하나가 나갔네.”혼잣말을 하고 전광판을 향해 걸어갔다.

“뭐가 나갔다는 거예요?” 감독에게 물었다.

“아, LED 모듈에서 라이트가 하나 나갔겠지.”

“엥? 그게 여기서 보인다고?”


감독과 난 그 왼쪽 전광판을 뚫어지게 봤다. 아무리 봐도 나간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봤고, 새 모듈을 자기 차에서 가져와 바꿔 꼈다. 그때, 새삼 각 분야의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실감했다.      


자아도취의 무서움

자아도취는 말 그대로 자기에게 취한 것이다. 뒤의 도취(陶醉)의 의미는 항아리에 있는 술을 모두 마셔 취했다는 것이다. 은유적으로는 그렇게 취한 것처럼 뭔가에 취해 흠뻑 빠져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야말로 술에 만취된 것처럼 사리분간을 못할 정도로 예술이나 일, 취미, 사람 등에 푹 빠져 있을 때 이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러니 자아도취는 생각보단 심각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 빠진 후배들의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업에 발을 들인 후 몇 개의 일을 그럭저럭 처내면 제법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후배도 있다. 자기 영상이 번화가 전광판에 나오고 지면 광고가 신문 전면에 나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후배도 있다. 결과물이 자기 주변 사람들이나 관계자, 고객에게 몇 번 칭찬을 받으면 자신이 완성됐다고 여기는 후배도 있다. 그러나 우린 아직 나아질 여지가 있다.     


쉰이 넘어서도 수영 실력이 더 나아질 수 있다. 쉰이 넘어서도 글 솜씨가 더 나아질 수 있다. 쉰이 넘어서도 카피라이팅 재주와 기획이 더 날카로워질 수 있다. 오늘 내놓은 결과물에서 보인 부족함과 여러 번 고친 후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칼럼에도 좌절하지 않는 건, 어제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쉰이 넘어서도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무슨 힘으로 책장을 넘기고 타이핑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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