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훈 Dec 21. 2022

전문가가 필요한 순간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23

앞서 썼듯이 올 해는 라디오 카피를 한 개 썼다. 썼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 윤문을 해줬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노동 관련 비영리 단체여서 그런지 조금 딱딱한 부분만 부드럽게 바꿔줬다. 이 일을 하면서 비영리단체의 일을 한 경우는 손에 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영리 단체의 홍보와 광고는 늘 내 시야에 어른거린다. 아내가 의료사회복지사여서일까?


TV나 유튜브, 포털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다 보면 의외로 비영리 단체의 광고를 자주 볼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아 보일 것이다. 이렇게 자주 보일 정도면 매체비도 엄청 쓰겠구나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린피스나 초록우산, 사랑의 열매, 세이브 더 췰드런과 같은, 그러니까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비영리 단체만 이럴 수 있다. 촌스럽지 않게 광고를 만들 수 있고 쉽게 눈에 띌 정도로 온라인/오프라인 할 것 없이 광고를 집행할 수 있다.


비영리 단체의 속사정

대부분의 비영리 단체는 이럴 여유가 없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십몇 년 전일 것이다. 아내랑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내가 불쑥, 자기 대학원 동기가 집에 올 거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간단히 요약해 말해 준 내용은 이랬다. 그 동기는 어린이 관련 비영리 단체의 간사였는데 그 단체는 재정 사정이 넉넉지 않아 그동안 제대로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명, 일에 대해 광고나 홍보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한 군소 신문이 전면 광고 지면을 후원 형태로 비워줬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단체 내부에 광고 제작팀이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아는 디자인 회사나 광고 회사도 없었던 모양이다. 물어물어, 건너 건너 한 회사와 겨우 연결되어 시안을 맡겼던 모양이다. 게재일을 며칠 앞두고 시안이 왔다. 그런데 아마추어가 봐도 뭔가 이상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담당자는 초조해졌다. 그때, 남편이 카피라이터인 동기가 생각난 것이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그 동기가 진짜 왔다.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먹던 저녁상을 물렸다. 사정은 아내에게 들어 알고 있으니 시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기억이 맞는다면 담당자는 실제 사이즈가 아니라 A4 사이즈로 축소해서 갖고 왔던 것 같다. 들여다봤다. 속된 말로 눈탱이를 맞았다.      


전문 분야의 깊이

디자인이나 광고하는 사람 중엔 경험 없는 고객을 기만하는 이들이 있다. 솔직히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지 않는 이상 누가 광고를 집행해 본 경험이 있겠는가? 대기업의 홍보실이나 판촉팀이나 영업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지 않는 이상 아무리 회사 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광고나 홍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심지어 필자가 광고홍보학과에 진학할 당시만 해도 “그런 건 책 몇 권 읽으면 알 수 있지 않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업의 세계가 그렇게 지도책 펼치듯 한눈에 펼쳐 볼 수 있던가? 구글맵 킨 스마트 폰을 앞세워 모르는 곳 찾는 것처럼, 낯선 분야에서 목적한 바를 쉽게 찾을 수 있던가?      


전문가를 찾아야 할 때가 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홍보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제조업체에 미팅을 하러 가면 담당자는 대체로 경영 지원팀, 관리부, 총무부 같은, 그러니까 생산부서가 아닌 사무부서 중에서 가장 만만하거나 한가한 부서의 직원이나 간부다. 공공기관이나 구청, 시청도 마찬가지다. 홍보실에서 직접 발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담당자는 광고와 홍보에 무지하다.      


예를 들어 도시 경관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 치자. 어느 날 시장님이 실국장 회의에서 도시 경관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홍보 영상을 만드는 건 어떠냐며 무심히 한마디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국장은 이 부서에 그런 영상을 만들라고 지시를 한다. 그러면 부서에선 아무 주무관, 특히 여성이나 젊은 공무원에게 이 임무를 맡긴다.


여성이라고, 젊다고 영상에 대해 잘 알리 없다. 영상을 즐겨 보는 것과 만드는 건 다른 차원이고, 만드는 것과 잘 만드는 건 또 다른 차원이며, 잘 만드는 것과 그 영상에 메시지를 담는 건 또 다른 차원이다. 돈과 사람이 넉넉한 조직도 이런데 하물며 영세한 비영리 조직의 속사정은 어떻겠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 말할 수 없다.

아내의 동기가 가져온 시안엔 기본이 없었다. 어떻게 얻은 전면 광고 지면인가? 얼마 만에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낼 기회인가? 분명 여러 항목의 예산에서 끝자리 돈을 힘겹게 끌어 모아 제작비를 마련했을 것이다. 이후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관련 회사를 찾았을 것이다. 아마 디자인 전문 회사라고 자임하는 회사 아니었을까? 그러나 실상은 팸플릿과 브로슈어 정도 만드는, 아니 어쩌면 겨우 명함 정도 만드는 회사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시안에 기본이 없었다. 헤드도 서브도 없었고, 그 넓은 지면을 채울 바디 카피도 부실했다. 이미지와 카피가 아무런 전략 없이 무분별하게 던져져 있었다. 아내의 동기를 비롯해, 단체의 사람들도 분명 잘 못 됐다는 걸,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다만 뭐가 잘 못 됐는지 탁 꼬집어 말할 수 없었기에 이렇다 할 항의를 못하지 않았을까?     


결국, 우리 집 거실에서 헤드와 서브를 써 주고 바디의 살을 붙여줬다. 이미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고, 아직 결제를 안 했으면 이런 방향으로 해달라고 강력하게 얘기하라고 했다. 그 동기는 당연히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비영리단체의 광고를 많이 본다. 개중엔 문법도 안 맞고 광고의 기본도 안 지키는 광고가 제법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부산 지하철 내부엔 사랑의 열매 부산 본부의 광고가 있다. 후원을 독려하는 광고다. 메인 카피부터가 눈에 거슬린다.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나눔에 동참해 주세요."다.


이 카피는 문법도 엉망이고 목적도 없다. 고쳐보자. 일단 “마음만 있다면”을 그냥 두면 뒤를 고쳐야 한다.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나눔에 동참할 수 있어요."로 말이다. “누구나”를 “누구라도”로 고치면 더 좋다. “누구나 나눔에 동참해 주세요.”를 그냥 두려면 앞을 고쳐야 한다. “마음 있는 분 누구나, 나눔에 동참해 주세요.”로 고치면 그나마 좀 낫다. 그러나 이것도 “누구나”를 “누구든지”나 “누구라도”로 고쳐야 더 좋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나”다. "누구나"는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기에 앞부분을 "마음이 있는 분"으로 고쳐도 그 효과를 감소시킨다. 광고 카피의 고전적 규칙 중 하나는 소비자를 최소한 2인칭으로 부르라는 것이다. 1인칭이라면 더 좋고, 이름이나 호칭을 부르면 더 좋다. 이 광고는 “누구나”를 써서, 주어가 빈약해졌다. 차라리 “누구나”를 빼고 “마음이 있는 분은”으로 고치는 게 최상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메인 카피의 지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계좌번호가 있으니 모금 광고인데, 그것치고는 카피가 순하고 밋밋하다. 동참이라는 단어도 추상적인데 그 동참이 마음만 갖고 있어도 된다는 느낌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모금 광고 일 수록 카피는 한 명을 향해야 한다. 모두의 지갑을 열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지갑을 활짝 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한다.  


사실 비영리 단체의 광고는 예산이 남아서 한다는 느낌, 광고/홍보 관련 후원금이 들어온 김에 한다는 느낌이 있다. 남는 돈, 남에 돈으로 광고하니 그 절박함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하는 광고는 돈 낭비다. 결국 단체의 선의를 흐릿한 광고와 그걸 만든 아마추어가 훼손한다.


쓴 사람도 이상한지 몰랐고 조직 내부에서도 이상한 걸 몰랐을 것이다. 당연히 이걸 대행한 교통광고 대행사들은 이런데 관심이 없다. 아내에게 저 단체에 아는 사람 있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서 한마디 하라고 했다. 이런 대화를 한 지 꽤 됐는데, 광고는 여전히 걸려 있다.


선의의 확장을 위해 프로를 찾아라

요즘엔 포토샵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많고 카메라를 들고 영상 좀 찍어 봤다는 사람도 많다 보니 살림살이가 빡빡한 비영리 단체의 경우엔 이런 광고들은 내부에서 해결하려는 경우가 있다. 아내의 선후배 사회복지사들이 일하는 단체에서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그런 광고물들엔 아마추어의 미숙함이 있다.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는 관련 학과 1, 2학년 학기 중 과제와 같은, 그런 수준의 어설픔이 있다.  


아무리 비영리 단체라 하더라도 때론 프로페셔널의 손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전문가의 재능 기부나 후원, 봉사만 기다려서도 안 된다. 차라리 검증된 전문가를 찾아가 광고와 홍보의 목적을 분명히 알리고 투명하게 예산을 공개한 뒤 예산과 목적에 맞게 광고와 홍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게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진정한 프로라면 적은 돈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방법을 찾는다. 작은 프로젝트라도 내 회사와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라면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프로다. 속된 말로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전문가와 상의해야 할 것은 많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광고는 나 같은 이와.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가는 놈이 강한 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