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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Dec 16. 2022

오래가는 놈이 강한 놈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21


요즘 감독은 시네마 렌즈와 8K 카메라, 신형 드론 중 어떤 걸 먼저 구매할지 고민 중이다. 그렇다. 순서만 있을 뿐, 어차피 다 살 것이다. 그렇게 지난 십몇 년간 작업실 안의 장비들은 꾸준히 늘어났다. 개중엔 판 것도 있겠지만 내 책처럼 판 것보다 산 것이 많기 때문에 줄어드는 속도가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감독의 비결

내가 한동안 궁금해했던 건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면 사용법을 어떻게 익히는 가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카메라나 영상 장비는 대체로 설명서와 매뉴얼이 한글로, 그것도 친절하게 잘 되어 있다. 물론 그조차도 제대로 안 읽고 일단 사용하면서 사용법을 익혀나가는 것이 한국사람 스타일이고, 전형적인 보통의 한국 사람인 내 아내도 그렇다.


그러나 전문가용의 경우 영어로만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설령 한글로 된 설명서나 매뉴얼이 있더라도, 또는 영어를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읽는 것과 사용법을 익히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게다가 감독은 새것이 아니라 중고를 사곤 - 영상 장비의 가격은 자동차와 비교도 안될 만큼 신형과 유사제품이 많이 등장하고 제품 수명과 교체 주기도 짧은 편이다. - 하기 때문에 저런 매뉴얼조차 없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감독이 영상 장비를 사고 그 사용법을 익히는 동안 내게 영어를 해석해 달라는 부탁은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감독은 내 학력에 대해서 잘 안다. 영어 원서로 공부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고, 검색을 할 때도 영어로 하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뭐, 내가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는 건 아니고 일반적으로 공부를 제대로 시키는 사회과학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라면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실력 정도다. 전공 원서를 읽고, 쉬운 영어를 알아듣는 정도.


살아남기 위한 노력

난 감독의 학력을 모른다. 그의 이력서를 본 적도 없다. 아마 그는 내 이력서를 본 적이 있겠지만. 그나마 아는 건, 그가 초중고를 울산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후 여러 힘든 직업과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역의 모 방송국에 들어가 음향팀의 보조로 입사하게 됐다는 것, 그곳에서 운명처럼 영상 일을 만나 무지막지할 정도로 무식한 방법으로 영상 기술과 이론을 파고들어 가 스스로 자신만의 이론 체계와 영상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 그 정도다.      


그의 비밀을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었다. 어느 날, 작업실에 가니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썰매 날 같은 것이 한 쌍 있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드론의 랜딩 스키드라고 했다. 그러니까 왜, 헬리콥터 밑에 달려 있는 스키 같은 거 말이다. 이것이 소형 드론의 경우엔 안 달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자체적으로 제작해주는 전문 공작소가 있었던 것이다.


회의 테이블 위에는 물건이 담겨 왔을 택배 박스가 놓여 있었다. 다 영어로 쓰여 있었다. 캘리포니아 어느 동네였다. 미국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어디서 온 거냐고 물어보니 감독이 홈페이지를 열어 보여줬다. 온통 다 영어였다. 샘플을 보고 기종 별로 관련 부품을 주문 제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주문 요청서도 영어로 기입해야 했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했다고 한다.


이번뿐만이 아니다. 그 뒤로도 감독은 영어로 주문을 하고 받고, 배송이 좀 늦으면 영어로 메일을 써서 독촉도 했다. 그것도 자주 하니까 늘었는지 옆에서 지켜보면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았다.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 실제로 난 해외 주문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다. -  안 할 텐데 감독은 영상 장비뿐만 아니라 영상 장비를 담는 캐리어나 트레일러, 가방, 심지어 자기 옷까지 척척 주문했다. 그는 애초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낡은 노트와 빼곡한 메모

그가 그렇게 학력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 계기를 최근에서야 알았다. 작년 초, 감독이 후배 양성을 해보겠다고 직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직원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다가 게으름을 피우는 걸 보더니 잔소리를 하기 전에 어디서 노트 한 권을 꺼내 왔다. 그리고 그 노트를 들고 최선을 다하는 것과 시간을 때우는 것의 차이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 노트엔 영상의 기초가 빼곡히 메모되어 있었다. 감독이 처음 영상을 했을 당시, 촬영과 편집 장비에 쓰여 있던 다양한 기술 용어의 해석과 용법이 쓰여 있었다. 그 옆에는 감독의 메모가 있었고, 문장마다 줄이 쳐져 있었다. 노트는 해져 있었다. 이걸 몇 번이나 봤던 걸까? 감독 안지 십몇 년 만에 난 그 노트를 처음 봤다.      


감독에겐 콤플렉스가 없다. 나와의 학력 차이도 크게 개념치 않는다. 물론 나도 개념치 않는다. 우린 서로가 가진 기술과 각자의 분야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열망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배움

앞서도 얘기했듯이 이 일은 새로운 분야와의 싸움이다. 같은 분야의 광고주를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새로운 분야의 광고주를 만난다. 특히 프리랜서의 경우엔 더 그렇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들어와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절박하니까.      


백서와 기업 역사와 이념을 담은 긴 문서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특히 2013년엔 유서 깊은 기와 업체 작업을 하면서 그 분야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그전까지 기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고령에 있는 한 업체의 40년 사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이 계기로 우리나라 기와의 역사는 물론이고 기와 전반에 관해 많은 공부를 했다.


한중일 기와의 차이, 처마의 높이가 저마다 다른 이유와 삼국의 기후와의 상관관계, 일본의 기와와 토양의 관계, 왜구가 꾸준히 침입해서 기와 기술자와 도공을 납치해 간 이유, 유럽의 기와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지금도 이 전문 자료와 관련 책자를 몇 권 갖고 있다. 덕분에 이 이후, 딸과 함께 박물관에 갈 때마다 기와에 대해 유창하게 설명해준다.


완벽을 향한 강박

감독과 난, 콤플렉스는 없지만 초조함과 강박은 있다. 아마 우리와 일하는 대부분의 베테랑들이 같은 강박을 갖고 있을 것이다. 홍보 영상이나 광고를 볼 때,  일반인에겐 보이지 않는 실수가 우리에겐 보인다. 당연히 우리가 만든 결과물에 담긴 실수도 우리 눈에는 물론이고 다른 전문가들의 눈에도 보인다. 이런 인식이 우리를 완벽주의로 내몬다.      


그러나 완벽주의가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진 않는다. 인간은 애초에 상황이나 세상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촬영 현장 또한 마찬가지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애쓸 뿐, 우리가 만든 것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것일 수는 없다.


설령 완벽한 걸 만들었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이 시대의 완벽일 뿐이다. 아무리 최고의 광고와 홍보 영상을 만들었다 해도 몇 년 후 보면 촌스럽다. 새로운 영상 기술과 표현 방법이 매일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게으를 수 없는 이유

기술을 가진 사람은 평생 게으를 수 없다. 다른 생업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들 그 일을 그만둘 때까지 초조함과 강박을 달고 산다. 신기술이 언제 나올지 모르고, 그 기술로 무장한 후배들이 언제 등장하며 뒤에서 쫓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그 일을 그만둘 때까지 공부하는 삶이 이어진다. 책을 한 글자도 안 읽고 뒤늦게 무슨 대학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철학이나 사상에도 관심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내가 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다들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농업, 어업, 조선업, 원자력, IT, 예술할 것 없이 자기가 터득한 그 고유의 기술과 지식으로 삶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더 나은 기술자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일단 이 바닥에 들어온 이상 삼류로 살다갈 수 없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마음이 없다면 어떤 전문직, 어떤 직업을 갖고 있어도 중간에 그만두게 되어 있다. 반대로 어떤 기술이나 직업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직종에 들어가서 거기서 버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세월을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전문가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영화 <짝패>에 나온 대사던가?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가는 놈이 결국 살아남는 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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