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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an 12. 2023

20년차! 올해도, 늘 그랬듯 묵묵히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27

다를 게 없다.

올 해로, 진짜 20년 차가 됐다. 그렇다고 새삼 무슨 기념을 할만한 일이나 선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저 얼마 전 감독과 다섯 시간 동안 술을 마신 것이 다였다. 그렇게 오래 마셨다는 것도 깬 다음 날 아침에서야 체감했다. 삼산의 참치횟집에 들어간 시간이 분명 다섯 시였는데 집에 들어온 건 열한 시가 넘어서였으니까.


애초에 연말연시를 유난스럽게 보내지 않는다. 한 해가 끝나는 것에 큰 아쉬움도 없고 새해에 큰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한 해의 마지막 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밤길을 서성여 본 적도 없고, 광안리와 해운대가 지척이고 심지어 30분만 운전하면 간절곶에 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지만 새해 첫 해돋이를 본 적도 없다. 젊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저 나이를 먹고 신체의 노화를 통해 세월을 체감할 뿐이다.     


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은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 감독도 마찬가지다. 작년엔 연말까지 일이 달라붙어 울릉도에 갔다 왔지만 예년엔 그저 편집을 하거나 송년 음악회 촬영을 해주는 정도였다. 정초엔 그래도 가족 모임이나 여행을 가곤 하는데 그마저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나서는 것이다. 올 해도 그래서 무주에 갔다 왔다고 한다.      


조용하지만 가열찬 스토브 리그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대형 광고 대행사라면 새해 첫날부터 정신없이 바쁘겠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다. 대체로 우리 일은 설 이전까진 조용하다. 물론 몇 통의 전화가 오고 문의도 오지만 실질적인 일은 설 이후부터 진행된다. 기업이나 관청, 시군구의 광고/홍보 예산 집행은 봄에 주로 집행된다. 그래서 관련 미팅도 설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잡힌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멍하니 있진 않는다. 또, 그렇다고 조바심에 여기저기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 내 경우엔 칼럼을 준비하기도 하고 작년에 진행되지 못했던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다시 검토해보기도 한다. 손에 잡히는 대로 독서도 한다. 감독은 해를 넘겨서 편집하던 영상을 편집하고 장비도 점검한다. 특히 장비 점검은 감독에게 일종의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다. 새로운 장비를 구입했을 땐 이 의식이 더 길어진다.      


어찌 됐든, 이번 주 작업실에 가보니 포장도 안 뜯은 새 드론이 있었다. 드론 경주에나 사용되는, 그리고 좁은 주방에서의 격투씬을 찍을 때 사용 되곤 하는 소형 드론이었다. 대형과 중형 드론으로 다양한 영상을 제작했던 감독이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녀석이다. 안 그래도 작년 가을부터 컨트롤러와 VR로 조종 연습을 한다고 했었는데 좀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제 조종할 만해요? 스포츠카처럼 힘들죠?”

“신경 쓸게 너무 많아요. 너무 예민해.”

이후 감독은 한참 조종하는 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어려움과,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만 구현될 수 있는 영상에 대해 설명했다. 올해부턴 콘티에 더 현란한 장면이 추가될게 분명하다.     


점심을 먹은 후엔 조명이 택배로 왔다. 이건 중고 사이트에서 산 것이다. 감독은 바로 뜯어서 물건 상태를 체크했다. 봉과 프레임, 조명의 개수를 확인한 뒤 직접 설치까지 했다. 세팅이 끝난 조명 중 하나엔 빛을 부드럽게 만드는 디퓨저까지 끼워서 테스트를 했다. 가볍고 세로로도 가로로도 쓸 수 있어 유용해 보였다.  


쏟아지는 중고 매물

감독 말에 의하면 감독이 들어가는 중고 영상 장비 거래 사이트에 매물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유튜브에 뛰어들었다가 물러난 사람들이 내놓은 매물이 많고, 영상 제작을 배우겠다고 비싼 장비부터 사들인 후 학원을 전전하다 포기한 사람이 내놓은 매물도 많다고 한다. 또 단가 후려치기를 견디지 못해 이 업을 접거나 당장의 생활비와 사무실 및 스튜디오 운영비용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매물도 제법 많다고 한다.      


광고나 영상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다 화려하진 않다. 어느 일, 어느 분야나 그렇듯 낮은 단가를 무릅쓰면서도 일을 하고 사무실과 작업실, 스튜디오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 말라고 뜯어말릴 일은 아니지만 하라고 추천하고 싶은 일도 아니다. 물론 모든 일이 그렇듯 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었으면 중고장비 사이트가 늘 호황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이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다. 그러니 더 업계에 투신하는 젊은 친구들이 적은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영상 쪽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모두 워낙에 변화도 많고 발전이 빠르다 보니 은퇴할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 영상에 필수인 카메라뿐만 아니라 카메라 운용에 도움 되는 각종 장비와 조명, CG 및 편집 프로그램에도 능숙해져야 한다. 최소한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굴 시켜도 시킬 테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 같은 카피라이터/작가는 한가해 보인다. 유튜브나 온라인 쪽 광고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심의도 비교적 느슨한 편이라 좀 과격한 카피도 쓰고 그야말로 병맛 광고에 막장 콘티도 내지르지만 우리의 고객 중엔 그런 걸 좋아하는 고객이, 아직은 없다.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달라는 고객은 있지만.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이 부지런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덩달아 나도 노력이라는 걸 한다. 또, 어떤 글을 쓰든 글 쓰는 사람치고 더 잘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올해도 아마 쌓아 놓은 책을 읽는 속도와 쌓아 놓은 책들의 눈치도 안 보고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경쟁을 할 것이다. 매년 읽는 속도가 지는 게임이긴 하나, 올해만큼은 읽는 속도가 근소한 차이로라도 이기길 바란다. 책을 좀 덜 사면 가능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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