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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04. 2023

일인칭 단수-무라카미 하루키

동해선에서 읽은 책 4


누구에게나 하지 못한 이야기는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그녀가 말했다. 벽에 적힌 글자를 낭독하듯이 담담한 목소리로.-하루키, 돌베개에, <일인칭 단수> 중에서


"내가 처음 어떻게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됐는지 알아? 들으면 아마 기가 막힐 거다."

지난주 셋이 저녁을 먹다가 이렇게 이야기의 운을 띄우자.

"어, 나도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감독이 물회 한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다가 멈추고 놀랐다.

"응? 내가 이 얘기 안 했던가?"


뭐든 일단 해보지 않으면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른다고 조감독에게 이야기해 주다가 내 첫 번째 강의 얘기가 나왔고, 그 뒤로 내가 처음 카피라이터가 된 이야기, 처음 백장이 넘는 백서를 쓰게 된 이야기, 처음 다큐멘터리 대본을 쓰게 된 이야기 등... 처음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물론 그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기준이 좀 모호해서... 여하간...


오늘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와 우치다 타츠루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을 받았다. 아내의 독서모임에서 책 두 권을 공짜로 주는데 아내 몫의 책을 내가 읽고 싶은 책으로 해서... 여하간 그렇게 두 권이 왔고 그중 먼저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지난주 금요일이 생각났다.


첫 번째 단편을 읽다 보니... 대학 졸업사진 찍던 날, 그날 밤의 일이 새삼 생각났고... 올 겨울 회식 때는 이 이야기를 해줘야겠군... 다짐했다. 그러면 감독이 또 이러겠지.

"응?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십 오 년을 알고 지냈고 내 이야기는 거의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서로 놀랐던 금요일이었다.


오늘 점심 나절에 던져준 단편집을 맥주를 마시며 훌훌 다 읽었다. 가볍게 넘어가지만 가장 진솔한 얘기 아닐까?


#돌베개에처럼 예상치 못한 잠자리에 휘말린 적이 있다.

이 정도 나이 먹으니 편한 점 하나는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게 됐다는 거 아닐까? 물론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는지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하루키처럼 그녀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 못 하지는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사노바과는 아니어서다. 성격이 특이해서인지 그런 사람과 연락이 안 되면 그러려니 한다. 대체로 내가 잠자리에서 별로였거나 진지한 사람과 사귀고 있겠거려니 하고 나도 일상을 살아간다. 대체로 프레드릭 포사이드나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적당히 그녀를 잊으려 노력한다. 하룻밤 사건으로 그녀의 일상에 끈적한 불안을 남기는 건 여러모로 내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나 같은 남자를 한 번이라도 품어준 데 대해 감사하며 일상을 살아낼 뿐이다.


#크림과 같은 기묘한 사건을 겪은 적은 없다.

또 주제넘게 나에게 인생이란 이런 거라고 훈수를 둔 노인네나 선배도 없다. 그래서 나도 후배나 제자한테 인생이란 말야라고 시작하는 훈수를 둬본 기억은 없다. 그저 연애에 대한 적당한 조언을 했다. 물론 대체로 아무 도움이 안 됐겠지만 절박한 쪽에서는 나 같은 이의 조언도 잠언처럼 듣기 마련이다. 그 핑계로 공짜 술도 얻어마시고.


#찰리파커_플레이즈_보사노바를 읽는 동안 뭔가 짠했다.

재즈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커티스 풀러의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나 에디 히긴스의 Shinjuku Twilight의 앞부분을 흥얼거릴 수 있다. 뭔가, 사랑했던 뭔가의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건 한 시절의 소멸을 의미하는 지도...


#위드_더_비틀스 속 이야기처럼 미스터리 한 사랑의 기억이 있다.

아니 그 사랑을 가능케 한 미스터리 한 여인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나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들 자체가 어찌 보면 미스터리라고 해야 할지도. 아니.. 어쩌면 생판 모르는 두 남녀가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인지도. 사랑은 시작될 때는 스릴러지만 끝나고 나면 미스터리가 된다.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스스로 자신하는 하루키조차 사랑을 했고, 그 사랑 속에서 하루키는 삶의 미스터리를 발견했다. 도대체 왜 이 여자가 날 사랑하는지 자체가 인생의 커다란 미스터리 아니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놀랐던 사실 하나는 하루키가 나열한 비틀즈의 노래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나왔던 수많은 팝송들, 그러니까 하루키가 청소년기를 보낸 60년대 후반의 팝송들을 거의 내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하루키는 나보다 스무 살쯤 많지 않을까? 그걸 감안하면 내 음악 나이는 연로한 편이다.


#요구르트_스왈로스_시집 은 매번 지기만 했던 한 야구팀에 대한 찬가이자..

그 팀을 응원하면서 20대를 살아낸 스스로에 보낸 찬가, 그리고 그 팀이 우승했던 해에 소설가로 데뷔를 한 자신에게 보낸 찬가다. 나 또한 과거 LG트윈스의 팬이었다. 김재현, 서용빈, 노찬엽, 김영직, 김용수가 한 팀에 있던 시절이었다.


#사육제는 사람의 심연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의 외모가 어떻든 간에 그 사람의 심연은 겉으로 다 알 수 없다. 그 매력이 그 외모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떠오르는 일이 있다. 대학교 2학년때인가, 국어교육과의 일일 호프에 갔었다. 당시 기숙사에는 국교과가 몇 명 있었기에 예의상 갔었다.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고, 소개팅을 주선해 달라고 했다. 다들 너무 예쁜데 괜찮겠냐고 걱정들을 했다. 뭐 일단 만나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만나고 난 후, 난 인생의 중요한 교훈 몇 가지를 얻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하고는 마주 앉지 말자. 여자든 남자든 외모로 판단하지 말자.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 뒤로 미팅을 한 적은 없다.


#시나가와_원숭이의_고백 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소설집,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들 전체가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온천에 갔더니 말을 하는 원숭이가 등을 밀어준다,라는 설정 자체가 황당한가? 그러나 낯선 타자는 신기한 원숭이만큼도 우리 주목을 끌지 않는다. 원숭이 같은 낯선 이도 외롭다. 그러니 타인의 뭔가를 훔칠 수밖에 없다. 허락하지 않는 타인의 존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는 이름을 취한다. 그러나 이름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그저 사회생활을 위한 플래카드에 불과하다. 그러니 원숭이는 인간 세계를 아직 이해 못 하고 있는지도. 그래서일까? 저 앞에 <돌베개에>서 주인공은 하룻밤 잔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 못 한다. 그러나 그녀가 쓴 단가 몇 개는 평생 기억하며 산다.


#일인칭_단수처럼 모든 기억은 사적이다.

나와 네가 같은 사건을 겪었더라도 공동의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라쇼몽>이나 이언 피어스의 <핑거 포스트>와 비슷하다. 작가의 불안, 더 나아가 개인의 불안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나이 들수록 개인의 성찰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내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어긋나지는 않는지, 그 시기, 그 상황의 해석이 다른지 않는지, 그 상황에서 나의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는 않았을지 돌아보는 것이다. 그 성찰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회개로 이어지고, 불교식으로는 참회이자 업보를 푸는 수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을 다르게 기억한다.

불과 몇 안 되는, 나와 인연이 있던 여성을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목소리로, 누구는 향기로, 누구는 촉감으로, 누구는 마지막 대사로, 누구는..... 흠.. 그만하자.. 수위를 조절하자... 어찌 됐든 내게 기억된 사람이 그러하듯 나 또한 파편적으로 누군가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 파편들이 그녀, 또는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꾸며줄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조각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낱개로 보면 형편없는 조각이지만 멀리 떨어져 보면 "하.. 저 인간도 참 나름 좋은 추억이었어." 하며 어물쩍 나에 대한 기억도 좋은 추억으로 분류되어 주길 바랄 뿐이다.


위드 더 비틀즈는 청소년 시절의 소녀들이 이미 할머니가 됐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아마 나랑 사귀었던 대부분은 학부형이 됐을 것이다. 내가 좋다고 따라다녔던 후배의 여동생도 두 아이의 엄마가 돼서 함부로 이름 부르기 곤란해져 버렸으니 말이다.


나이 탓인지 이번 단편집을 읽는 내내 서글펐다. 하루키의 가장 자전적 단편집이지 않을까?

이렇게 고베가 배경으로 등장한 그의 소설이 또 있었을까?


나이가 들면 묻어 두었던, 잊고 싶었던, 말하기 곤란했던 추억도 평양냉면처럼 심심하고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얘기하면서 너무 많은 기억이 없어진데 놀라면서, 이런 얘기를 왜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따로 적어두지 않았을까 후회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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