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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02. 2023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동해선에서 읽은 책 3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사랑과 배반을 똑같이 잊고 속삭였거나 외쳤던 말을 잊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잊는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나 자신 한두 명과 연락이 끊어졌다.", <노트 쓰기-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198.

....

 <그것이 알고 싶다>의 결말이 모처럼 개운 했던 밤.

4년 전, 양산에 살던 모녀가 사라졌다. 신용카드도, 통신내역도, 여섯 살짜리 딸이 입원한 기록도 없다. 남편이자 아빠도, 경찰도 못 찾았다. 생활반응이 없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한 종이에 남겨진 여러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조합해 딸의 SNS 계정을 찾았고 그것을 단서로 모녀를 찾아냈다. 결말은 전문가의 교훈적인 조언이었다. 


그렇게 이 팀이 모녀를 찾는 추적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속보 자막이 떴다. 애들이 클럽에서 놀다 다쳤나 보다, 가볍게 생각하고, <그것이 알고 싶다>의 모처럼 개운한 결말을 안고 잤다. 


다음날, 조앤 디디온의 책을 읽으려 애썼다. 읽으면 읽을수록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무기력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결국엔 딸과 함께 박물관에 가서 기획전시실을 서성였다. 조선시대 부산 화가들의 그림을 봤고 오는 길엔 과자와 술을 사들고 들어 왔다. 오후 네시쯤부터, TV는 켜지 않고, 켜더라도 <차이나는 클라스>같은 온 가족이 볼만한 프로를 보면서, 몇 시간 술을 마셨다. 


잊기 싫은 사람은 쓸 수밖에...

이 책엔 디디온의 60년대 중반의 글이 실려 있다. 그러나 어쩐지 동시대적이다. 히피를 다룬 글도, 극좌파 리더를 다룬 글도, 하와이나 뉴욕에 관한 글도, 조엔 바에즈나 존 웨인에 관한 글도 요즘 일어난 일을 취재한 느낌이다. 


세상이 변한 듯 안 변했고, 변하지 않은 듯하면서 알게 모르게 변할 때,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 디디온은 그런 사람이다. 화제의 중심에 있지 않고, 무리의 중심에 있지 않고, 세상의 관심사가 아닌 뉴스와 지역, 사건에 달라붙어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있다. 디디온은 그런 사람이다. 

창문 바로 앞, 직박구리

"비가 내리고 나면 봄이 와서 열흘쯤 머물렀다.", <캘리포니아의 딸이 쓰는 단상-세크라멘토>, 244.


"그날 아침 웨블리 에드워즈가 끝없이 반복해서 하던 말은 "이것은 공습입니다. 대피하십시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였다. 그 자체로 비범한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을 기억한다는 건 비범한 일이다.", <낙원에서 보낸 편지-북위 21도 19분, 서경 157도 52분 : 하와이>.,272.

....

쓰는 사람...

페북을 보면, 기자나 기자였던, 정치인이거나 정치인이었던 사람은 쉴 새 없이 파고들고 쓰고 떠든다. 그게 그들의 직업이다. 그러나 출판 일을 하거나 기자가 아닌, 다른 글을 쓰는 것이 업인 사람들은 침묵한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우습게도 국가의 명령 아래 모든 공연과 이벤트가 취소된 후에도 여자/남자 프로농구는 계속 진행됐고 오늘은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도 열렸다. 


물론 나도 어제 수영을 했고 서점에 가서 책을 샀으며 술을 마셨고 저녁을 먹었다. 오늘도 수영을 했고, 점심에도 혼자 밥을 먹으며 술을 마셨고, 오후엔 딸에게 독감 예방주사를 맞혔고, 바로 지하철로 이동해서 홈플러스 센텀시티점에서 아내와 장을 봤다. 


무슨 가전제품을 사고 받은 상품권 덕에 평소라면 사지 않았을 것을 몇 개 샀다. 딸은 감말랭이 두 상자, 난 캐슈넛 두 봉지, 딸이 다시 빼빼로 데이를 대비한 빼빼로 몇 박스, 낫또, 라면 두 봉지, 맥주 몇 캔, 주먹밥, 냉동 꼬치구이, 냉동 만두, 파스타 소스 두 병, 펜네 한 박스.. 기타 등등...... 빌어먹을... 그렇게 먹고살 거라고 잔뜩 샀다. 


그래도... 점심과 딸을 데리러 가기 전, 그 사이, 칼럼 하나, 초고를 썼다. 원래는 일하다 죽은 이에 대해 쓰려고 메모했던 글인데... 더 많은 죽음에 대해 써버렸다. 쓰는 사람은 그렇게 쓰는 걸로 자기 몫의 추모를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기회가 허락 됐으면 한다. 


(이 글은 이태원 참사 다음 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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