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 읽은 책들 5
"운명은 죄를 감안하지 않기에,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무자비해질 수 있었다."
-<남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원한 맺힌 흉터 하나가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칼의 형상>,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에셔의 그림이 표지로 있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었다. 진중권 전에도 보르헤스를 언급한 이들은 많았는데, 다들 왜 보르헤스, 보르헤스 했는지 알 것 같다.
우리가 참과 신에 다다르는 길은 무엇인가? <픽션들>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 전반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 실린 소설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전반부에 실린 소설들은 세상에 없는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에 없던 제2의 돈키호테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에 없는 작가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에 각주를 단다. 심지어 언급한 작가나 학자 중에는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이 교차한다. 친절하게도 지금의 번역본에는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을 가려주지만, 이 소설이 나온 40년대에, 만약 이 각주가 없이 이 소설을 읽은 이라면 그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골치깨나 썩었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왜 그랬을까? 그는 이성의 강박, 학문의 강박을 비웃는다. 원전을 찾아내려는 강박, 세상의 모든 문제의 답을 알아내겠다는 강박, 세상의 모든 문제의 답을 갖고 있는 어떤 종교나 진리가 있다고 믿고 그걸 찾아내려고 하는 강박.
그 기원을, 그 진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바벨의 도서관>처럼 불가능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바빌로니아의 복권>처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추첨에 의해 운명 지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린 그건 눈치챌 수 없다고, 절대로 우리 인생의 엄청난 비밀을 찾을 수 없다고, 그것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음을, 보르헤스는 말한다.
최근 "보고 싶다."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절감하고 있다. 이 깨달음은 이제 겨우 사전을 벗어나 내 감정의 울림을 통해 그 목소리를 얻고 있다.
처음엔 딸이었다. 어느 해부터인가 밖에 있다 해가 지면 딸이 보고 싶어졌다. 그저 단순히 밥은 먹었는지, 학교를 잘 갔다 왔는지 궁금한 차원이 아닌, 얼른 집에 가서 보고 싶다,라는 감정이 들었다.
이 감정이 너무 생소해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리고 이 생소한 감정에 난 "보고 싶다."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보르헤스가 지적한, 우리가 이성으로 알고 있는 개념들은 그저 개념들 뿐임을, 이 순간의 울림의 반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식이 보고 싶다."라는 문장의 울림을 몇 해전 알았다면 화요일에 안 "보고 싶다."라는 문장의 감정적 울림은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미망인 박영희 여사를 인터뷰하고 돌아오던 길, 딸이 보고 싶었고, 그 생각이 불쑥 어머니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그런 종류의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최소한 기억할 수 있는 시절까지는 그렇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신지 이십 년이 다 돼 가지만 그동안 화요일에 솟아오른 감정과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잘 계시는지, 잘 사시는지, 근황이 궁금한 정도였다. 명절 때가 되면 명절은 잘 지내고 계시는지 정도였다. 아프다고 하시면 잘 치료는 받으셨는지 정도였다.
그러나 화요일에 느낀 감정은 그 감정과 다른 감정이었다. 순수하게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단어가 가진 울림과 느낌을 쉰이 다 돼서야 느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2021년 11월 16일, 포항에서 울산으로 돌아오던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다. 겨우 한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다.
"딸이 보고 싶다."라는 말끝엔 미소라는 느낌표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 끝엔 울컥, 이라는 마침표가 찍힌다.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도전한 건 앎이, 상식이, 순리적 흐름이 우리 인생에 기준이 될 수 있는지이다. 어떤 잣대도, 어떤 구조도, 어떤 경험과 지식도 우리 인생의 내일을 예견하고 그려낼 수 없음을,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미로의 다음 코너에 답을 줄 수 없음을, 내일이라는 어둠에 빛을 던져 줄 수 없음을... 그걸 말하고 있다.
2021.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