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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13. 2023

알레프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동해선에서 읽은 책 6


한 작가나 예술가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소문은 그들이 남긴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소문에 불과하다. 그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읽거나 본 작품들이 있다. 영화, 그림, 소설, 여러 책들...


보르헤스를 읽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또 그 작가들을 평하는 다른 작가들의 글에서 끊임없이, 보르헤스, 그 이름을 언급했다. 마치 과거, 아무 카페에나 걸려 있던 고흐의 그림이나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의 포스터처럼 말이다.


픽션들을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알레프>에 담긴 소설들은 더 많은 영화들,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한 종의 원형이 되는 짐승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아래에 예를 들어 봤다. 


<죽지 않는 사람>은 <하이랜더>와 <올란도>가 생각난다. 죽지 않는 이만이 겪는 고통과 운명을 그린 원조 같다고나 할까?  <죽은 사람>은 케빈 코스트너가 나온 영화 <리벤지>가 생각난다. <신학자들>은 평행이론을 다룬 거의 모든 영화와 소설이 생각난다. <전사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 <늑대와 춤을>이 생각난다. 그리고 당연히 <라스트 모히칸>도. <엠마 순스>는 복수를 다룬 거의 모든 추리소설, 그리고 범인이 피해자로 둔갑해 빠져 나가는 모든 소설의 힌트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나를 찾아줘> 같은.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는 영화 <카케무샤>와 그 비슷한 소설,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야말로, 상투적으로, 보르헤스의 소설에 많은 후대 작가들과 영화감독들이 신세를 지고 있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또는 지엽적으로 그의 작품은 이 시대의 다양한 작품 속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책의 번역은 울산대학교의 송병선 교수님이 번역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울산은 송병선 교수 보유 도시다.


아래의 글들은 보르헤스의 문장에 내가 달은 생각의 꼬리들이니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된다.


"열병과 마술이 대범하게 칼날을 열망하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죽지 않는 사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역설적이게도 언제나 용기 있는 자가 먼저 죽는다.


"나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내가 가졌던 얼굴을 찾고 있다." 예이츠, <나선계단>; 보르헤스의 <타데오 이시도르 크루스>에서 재인용.

...

난 이 문장에 굵은 두 줄을 긋고 싶었다. 어쩌면 모든 공부의 진정한 이유, 모든 종교의 근본적 이유, 모든 사랑과 방황의 근본적 이유를 이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 할지라도, 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 <타데오 이시도르 크루스>, 보르헤스의 알레프, 71.

....

그래서... 삶은 내가 누구인지만 알면 해결되는, 답을 얻게 되는, 출구를 찾게 되는 커다란 미로이자 퀴즈이자 문제이지 않을까? 그 답을 못 찾으니 우린 그렇게 범퍼카처럼 사는 거겠지. 쿵, 쿵, 쿵.


"유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보다는 발견자라는 것입니다.", <아베로에스의 탐색>, 보르헤스의 알레프 중에서, 126.

....

모든 창작자,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우리가 얼마나 지루한 일상을 살았겠나.


"관념론의 가르침에 의하면 '살다'와 '꿈꾸다'라는 동사는 모든 점에서 동의어이다.", <자히르>, 보르헤스의 알레프 중에서, 146.

...

그렇다.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한 구절 같다. 삶이 꿈인지, 꿈이 삶인지. 천상병 시인의 <소풍>이라는 시도 생각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운명이 우리에게 현자들을 금지한다면 바보를 찾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가의 남자>, 보르헤스의 알레프 중에서, 187.

...

잠시 웃었다. 어째 이번 선거를 설명하는 문장 같기도 하고.


"고집스러운 태도에는 진실이 들어설 수 없는 법이지. 만일 알레프 속에 지구상의 모든 장소들이 들어 있다면, 거기에는 모든 별들과 모든 등불들, 모든 빛의 원천들도 있겠지.", <알레프>, 보르헤스의 알레프 중에서, 205.

....

본 사람만, 겪은 사람만 그것이 있음을 아는, 그런 것들이 있다. 단적인 예로 이성애자 여성의 열 명 중 네 명은 오르가슴이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공식적인 설문에 의한 결과라고 봤을 때 절반 그 이상이지 않을까? 어디 이것뿐인가... 일일이 말하고 설명하기 귀찮아서 침묵해야만 하는 감동과 환희가 다들 한두 개쯤은 있지 않을까?

202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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