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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16. 2023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동해선에서 읽은 책 7

장산에서 출발한 지하철..

책은 작업실에서 다 읽었기에 멍 때리다 객차 안에 있는 이들이 뭘 하는지 구경했다. 

좌석에 다 앉으면 36명. 서 있는 사람까지 합하면 얼추 50명 안쪽. 

이 중 휴대폰에 코 박고 있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


독서 모임은 많지만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 찾기는 어렵다. 

책 읽는 모습 노출하는 것이 부끄러운 건 아닐 테고..


다들 정보를 모으고 있는 건 아닐까? 아타루가 말한, 모든 분야에 대해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게 되거나 한 분야에 대해서라도 아주 잘 말할 수 있길 바라면서... 그건 시대의 혁명도, 개인의 혁명도 가져올 수 없다.  왜냐면...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에 불과하니까.


윤창중 사태부터 종편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때 신기하게 봤던 건, 패널들이 주욱 펼쳐 앉아 경쟁적으로 한 마디씩 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 궁금했다. 외교? 성추행? 중년 남자의 심리? 엉덩이와 허리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아는 해부학 전문가? 이렇게 패널들이 나와서 한 마디씩 떠드는 방송의 형태는 일본의 와이드쇼의 복사판이다. 조악한 종이 패널의 스티커를 한 장씩 떼가며 패널들의 자극적인 멘트를 양념으로 뿌리는... 아타루가 왜 TV를 안 보기 시작했는지 이해 간다.

...

책을 읽지 않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일상을 지키는 행위다. 기도 또한 그와 같다. 혁명을 바라는 기도가 있을까? 대부분의 기도는 일상의 안위와 복을 바랄 뿐이다. 즉 기도는 역설적으로 나를 지키는 행위다. 그러니 기도하는 손을 잘라내고 읽는 손, 글 쓰는 손을 이식하는 건 주체의 혁명이다.


책을 읽으면 어떤 공포가 엄습한다. 아.. 내가 이렇게 무식했구나.. 하는...

그래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아타루의 말처럼,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계속 읽고 쓰던가.. 아니면 끊던가...


가장 무서운 책은, 몇 페이지 넘겼는데..."이 양반, 나랑 만난 적 있나?" 싶을 정도로 내 생각과 유사함을 느낄 때. 특히 그 생각이 아주 반동적이어서 어디 가서 얘기하기 힘든 생각일 때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생각에 단단한 토대를 받쳐주는 그런 책들....


결국, 진짜 독서는 무지를 동반한다. 그건 세상에 대한 무지다. 그러니까 아타루, 하루키, 김정선이라는 작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 그 텍스트가 뭘 말하는지 알고 싶어 독서하기에 오히려 작가와 세상에 대한 정보에 대해선 무지해진다. 아타루 또한 자기가 읽으려 하는 것을 읽었을 뿐 그 밖의 것에 대해선, 스스로 말했듯이 무지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이 나왔을지도.


"아시아에서 다소라도-다소라도입니다.-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저자가 이 글을 쓸 때 우리는 MB정권이었다. 그래도 그들보다 우리가 나았지 않았을까? 외설적 표현과 황색저널리즘의 창궐을 자유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그는 세계의 과거는 알아도, 현재와 미래 따위엔 별 관심이 없다. 미래엔 그가 살지 않을 것이고, 현재는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부추기는 인간들이 많으니 그는 그 소음을 차단했던 듯. 그가 말하고 싶은 건 사적인 혁명의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은 읽기와 쓰기, 그 반복의 반복, 그 결과의 드러냄에 있기에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잉태된다는 것.


<야전과 영원>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야전과 영원>의 일부를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스핀 오프라고나 할까? 앞의 책이 주체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썼다면 이 책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 주체의 독서와 글쓰기의 의미, 그리고 이 세계의 유지와 미래는 어쩌면 그 개별적 주체의 읽기와 쓰기의 반복을 통해 이뤄졌고 이뤄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문장이 박력 있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러나 아타루의 문장, 주장, 논지는 박력 있다. 하루키가 샌님이라면 아타루는 깡패다. 그것도 아주 무적의 깡패. 욕하고 싶은 상대는 욕한다. 듣고자 하는 사람한테만 말한다. 듣기 싫은 사람은 안 들어도 되고, 자기 욕을 들은 사람은 불만 있으면 현피를 뜨자, 뭐 이런 분위기다. 그러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인문학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스트레스가 풀린다. 아타루의 문장이 영화 캐릭터로 태어나면 액션 영화 속의 마동석 정도 되지 않을까?


"내가 쓰고 싶은데로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계속 내가 쓰고 싶은데로 쓰기로 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쓰는 대신."


감독과의 퇴근길에 내 칼럼 중 좋아요를 많이 받은 칼럼의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니 그냥 쓰던 대로 쓰기로 했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소울메이트가 책을 써보라고 부추겼다. 자기 교회에 왠 날백수 같은 인간이 하나 있는데 책을 쓰고 강연도 다닌다고... 당신 정도면 그런 인간들보다 더 나은 책을 쓰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우연히 아주 유명한 한 국내 작가의 책을 읽고 불쑥 "이런 건 나도 쓸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읽어보니 허접하기 그지없었지만... 칼럼을 쓰면서 글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고 있다. 더 바짝 정신 차리고 쓰려고 더 바짝 정신 차리고 책을 읽고 있다.


얼마 전 울산의 한 심사에 참여했었다. 어쩌다 보니 심사위원장까지 했다. 나이 든 느낌이더라... 나잇값 하려면 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1.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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