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자유
삼촌의 이른 입학 선물 - SWAG 있는 캡
*2019년 1월 첫 주(8일)
오늘, 은채는 어린이집에 모자를 쓰고 갔습니다.
한 은행의 모바일 플랫폼 시스템 구축을 위해 대구에 장기 출장 가 있는 삼촌에게 놀러 갔을 때 삼촌이 숙소 근처에 있는 아웃렛에서 사 준 모자입니다. 챙이 큰 야구 모자로 챙은 핫핑크, 전체적으로 검은색이지만 이마 부분엔 멋진 글씨가 큼지막하게 써져 있습니다. 저런 모자를 언제 쓸 일 있나 싶어서 삼촌의 지갑을 적당히 말렸지만 조카에게 약한 삼촌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습니다.
은채는 집에서 틈틈이 그 모자를 쓰고 랩퍼 흉내를 냈습니다. 아이들의 애창곡이라는 위너의 <사랑을 했다.>를 완곡하거나 블랙핑크의 어느 노래의 랩 부분을 부르기도 했죠. 그걸 보면서도 설마 저 모자를 밖에 쓰고 다니진 않겠지 생각했습니다.
아빠와 은채의 모자에 대한 인식 차이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아마 많은 중년 남자들이 모자란 머리 감기 싫을 때 쓰는 것이고, 군대 있을 때 쓰는 것이고, 여름에 눈부실 때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전 야구 모자, 즉 캡을 사면 챙을 둥그렇게 구부려 길을 들이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나 은채의 챙은 구부리는 순간 그야말로 스왝이 사라지죠. 그걸 알기에 구부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 일 테고요.
모자를 사고 두 주 후에야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는 오늘 아침을 먹고 등원 패션을 준비하면서 모자를 쓰고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 그러라고 했죠. 걸어서 오 분 밖에 안 걸리는 거리인데 구지 모자를 쓸 필요가 있냐고 말릴 이유가 있나요? 어차피 어린이집에 들어가면 사물함에 벗어 놓을 것일 테니까요.
아이는 자기가 가진 모자들을 신중하게 비교 했습니다. 그 중 한 모자는 미국 텍사스에 사시는 친할머니가 보내준 모자인데 디즈니의 유명 공주들이 이마 부분에 볼록하니 튀어나와 있는 핑크색 모자입니다. 마치 경주 칠불암의 마애불처럼 말이죠.
삼촌이 사 준 모자와 함께 두 모를 찬찬히 써 보고 거울을 본 딸은 내 의견을 물었습니다. 전 대구에서 산 모자가 더 스왝 있다고 명쾌하게 말해 줬죠. 딸은 “아 그래?”하면서 내 의견을 받아 들였고 그걸 쓰고 어린이집에 갔습니다.
아이가 옷을 고르게 한 건 대략 서너 살 때부터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색이 생기고 패션의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죠. 하나의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개성이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섯 살이 되자 아이는 본격적으로 상하의를 여러 개 골라 와 경우의 수를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죠. 비슷해 보이는 핑크색과 비슷해 보이는 레깅스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의 시간을 말이죠. 아빠가 기다려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빠의 의견을 묻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무거나 입어.”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다시는 아빠에게 의견을 묻지 않을 수도 있죠.
이건 마치 결혼 할 때 아내의 웨딩드레스를 골라주는 것만큼 신중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드레스가 같아 보여도 예비 신랑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간파해내어 어떤 게 예쁜지 자기 의견을 말해줘야 합니다. 설령 그 의견을 사뿐히 무시당하고 신부가 원하는 걸 고르더라도 그 의견 제시는 인내와 관심의 종합적인 표현이기 때문이죠. 오늘 아침엔 그 인내와 관심의 표현이 딸의 모자에 집중 됐던 것이고 말이죠.
아이는 색의 선택에서 자유로운 편입니다. 미국에 사는 친할머니와 이모가 선물로 보내주거나, 이모의 딸, 그러니까 이종사촌이 입던 옷을 보내줘서 받아보면 일단 그 색깔과 무늬의 현란함에 멈칫합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습니다. 특히 내 어머니, 그러니까 은채의 친할머니는 레깅스에 나비가 수백 개 날아다니고 꽃이 수백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서슴지 않고 보내주십니다. 이왕 보내 주신 거 안 입힐 수도 없으니 놀라면서도 입혀서 키웠더니 아이는 색과 무늬에 대한 터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대학 동기들과 캐나다 여행 갔을 때 쇼핑몰에서 은채 옷을 고르는 걸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합니다. 색과 무늬가 너무 화려해서 말이죠. 은채는 그렇게 옷을 입을 때 색과 무늬의 향연을 즐깁니다.
이런 아이들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 무책색만 입는다고 합니다. 지금 막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접어든, 미국에 사는 딸의 이종사촌 언니도 무채색의 세계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만국 공통인 모양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은 사회화 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존재를 은폐해서 사회의 구성원과 동일해지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존합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엔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툴툴대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엔 아주 안전한 색깔의 옷만을 입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거의 모든 여중생, 여고생들이 검은색의 롱 패딩을 겨울마다 입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온 그 유령, 가오나시를 연출하는 것이고 말이죠.
은채도 언젠가는 무채색의 세계로 나갈 것을 알기에 지금 선택하는 모든 현란한 패션을 허락하고 심지어 부추기고 있습니다. 발레복을 닮은 레이스 달린 치마, 리본이 아빠 손바닥 만 한 머리띠, 형광색의 반팔 티, 불이 반짝이고 날개까지 뒤로 나온 운동화. 이런 모든 것들의 선택을 스스로 하게하고 스스로 입게 하는 것이죠. 그 선택을 하는 아이가 어쩌면 사회화되기 이전의 진정한 그 아이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그 예뻐 보이는 것들의 선택, 그 과잉 된 것을 선택하면서도 일말의 두려움조차 없는 아이를 지켜보고 그 선택을 지지해주는 것이 딸을 가진 부모의 의무일지 모르고 말이죠. 그리고 그 선택이 결국 아이의 창의성을 만들어 주는 것 일 테고요.
무채색의 사회로 진입해버린 사춘기 딸이 제주도 여행에서도 검은색 패딩을 입고 가는 것을 속상해 하기 전에 형형색색의 옷을 함께 입고 많은 사진을 찍어둬야 합니다. 그래서 전 아이와 여행 갈 때면 항상 밝은 색의 옷을 준비합니다. 얼마 전 제주도 여행 때는 오렌지 색 다운 점퍼를 준비해 갔죠. 아이는 아빠가 좋아하는 색을 아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오렌지색이죠. 아빠가 오렌지색의 패딩이나 티를 입고 다니는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그런 색 옷을 입으면 늙어서 주책이냐고 핀잔 듣지 않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세뇌를 시켜놨죠.
색과 디자인의 선택은 한 인간의 취향의 외적 표현입니다.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한 인간의 취향, 더 나아가 인격의 억압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오늘 선택하는 옷을 지켜봐야 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말이죠. 아이는 그러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