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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Feb 24. 2023

고객이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37

첫 시사회

-작년 말에 시작한 시립 예술단 홍보 캠페인 영상이 완성되어 시사회 일정이 잡혔다. 내가 작업실에 도착한 건 열 시 반, 감독이 쓰던 대형 모니터 하나가 포장되어 있었다. 감독은 오전부터 다른 서류 관련 일로 정신없이 바빠서 작업실에 열한 시가 넘어서 나왔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8K 화질의 생생함을 제공하기 위해 모니터를 가져가려고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감독은 이렇게까지 하는 편이다.


예술회관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예술회관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했다. 올해 첫 시사회, 떨리기보다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오후 두 시, 예술단 단장님 이하 여러 관계자들이 동석한 가운데 단장실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카피의 목적

-카피를 써서 감독에게 보낸 후에도, 가편집본을 보면서도, 감독이 보내준 완성본을 본 후에도, 그리고 시사회에서 상영을 시작하기 전에도, 또 하는 중에도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다. 영상미야 아름다우니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피를 수정하자고 할 것 같았다. 카피가 좀... 뭐랄까... 다른 광고에 비해 난해했다.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카피는 긴 시간의 숙고와 여러 경험에서 나왔다. 장소 헌팅과 촬영을 하는 동안 무대와 백 스테이지에서 객석을 바라볼 때, 관계자들과의 미팅과 잡담에서, 각 예술단의 개별 연습실을 둘러보며 들었던 생각과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나왔다.


우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술을 하는 그 순간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순간엔 말이다. 그러니까 폭죽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게 터지는지 모르지 않을까? 꽃은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게 피는지, 파도는 자기의 소리가 얼마나 멀리 퍼져나가고 그 세기가 얼마나 큰지 모르지 않을까? 어쩌면 예술가도 그런 존재 아닐까? 예술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발현되는 그 순간, 그 예술의 순간, 예술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두 번째 목적은 불꽃처럼 뜨겁고 별처럼 아름다운 무대 위의 순간을 위해 예술가들이 얼마나 열정과 시간을 들여 준비하는지 말하고 싶었다. 세 번째 목적은 이러한 이들의 예술의 순간과 그 순간을 위해 바치는 열정과 예술 혼이 도시의 자랑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그 카피였다. 그러니까, 일부러 난해하게 쓰자고 작정하고 쓴 것이 아니라 내가 겪은 예술단과 그들의 공간, 무대, 그들의 사연 속에서 캠페인의 목적도, 영상의 콘셉트도, 카피의 플랫폼도 정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카피가 나왔다. 그렇게 나온 것이 난해하고 일반적인 않을 뿐, 난해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카피를 쓰려고 작정하고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하는 사람, 예술에 관련된 사람

-여하간 시사를 한 후 단장님은 물론이고 각 예술단의 간부들과 이하 관계자분들은 카피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배경 음악이나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만 의견을 제시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영상이 시작되고 1,2초 정도는 묵음으로 가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단장실에서 나와 실무자와 마무리 회의를 할 때 한 고위 관계자는 “전 이 카피가 너무 좋으니 이 멘트의 목소리를 좀 살리기 위해 음악의 볼륨을 좀 줄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예술가나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이랄까, 마인드는 일반적이지 않구나 새삼 느꼈다.  


시사회가 끝나고 시청으로 이동, 올해 첫 미팅을 했다. 일종의 시즌 오프너 격인 미팅이었다. 야구의 개막전 같은. 회의는 간단했다. 주무관의 설명을 듣고 일정을 의논하고 예산 범위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랬다. 


첫 미팅의 모양새

이 날은 여러모로 중요한 날이었다. 바뀐 예술단 단장님과 첫 대면이자 올해 첫 시사회였고, 올해 첫 시청 출입이자 담당 주무관과의 첫 대면이었다. 행운을 가져오고 나쁜 기운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이런 일을 오래 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그래서 우릴 처음 대하는 고객에게 알게 모르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옷차림을 하려 했다.


일본 아가씨들에겐 승부 속옷이라는 게 있다. 오늘은 어쩐지 그 남자와... 흠.. 모종의 승부를 볼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날 입는 속옷이다(이게 말이 되는지 여부는 각자 판단하자. 참고로 지역별로 선호하는 색이 다르다. 내 브런치 북 사물의 우연에 이것과 관련하여 쓴 글이 있다). 개인적으로, 승부 속옷 같은, 어떤 의식적인 차림새가 있다. 중요한 미팅, 특히 이런 첫 미팅이나 고객과의 첫 만남에서 하는 차림새가 있다. 


속옷부터 양말, 이너와 아우터, 가방, 손수건, 그리고 향수와 반지까지 신경 쓴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이런 일을 오래 한 사람처럼 보이는 차림새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런 차림새의 교본이 있을 리 없다.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입었을 때 카피라이터답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차림새다.


우선, 평소엔 입지 않지만 고객을 만나는 미팅을 할 땐 꼭 챙겨 입는 특정한 디자인(이건 말하기 좀 곤란하다. 양해를 구한다.)의 속옷을 챙겨 입었다. 또,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양말이 남아 있기에 일부러 그걸 신었다. 일고, 여덟 개가 있는 터틀넥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브라운 색을 이너로 골랐다. 아우터는 왁스처리 된 천으로 만든 카 코트를, 바지는 카멜색의 모직 바지를 챙겨 입었다.


평소엔 전혀 쓰지 않지만 일 때문에 움직일 때만큼은 꼭 챙기는 손수건은 가장 맘에 드는 걸로 챙겼다. 아내가 연애 시절 선물해 준 티타늄 반지(일련번호가 있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고 아내가 말했었다. 확인할 수도, 확인한 적도 없다)도 챙겨 꼈다. 평소엔, 그러니까 집에 있거나 예정된 미팅 없이 작업실에 갈 때는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다.


스킨과 로션도 아내가 사준 은목서 향이 나는 걸로 발랐다. 향수도 아내가 사 준걸로 살짝 뿌렸다. 특히 향수는 미팅이 있는 날엔 잊지 않고 뿌리려 하는데, 특히 담당 주무관이나 고객이 여성일 때는 꼭 뿌린다. 물론, 뭐, 꼬시겠다는 의도는 아니고 흰머리에 삭막하게 마른 얼굴을 가진 남자의 딱딱한 느낌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다. 가방은 몇 년 전 아내가 생일 선물로 사준 토트백을 든다. 의외로 남자 주무관이나 고객이 이 가방을 좋아한다. 실제로 브랜드를 묻고 사진을 찍은 이도 몇 명 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잘 신지 않는 윙팁 구두도 신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후배에게

-앞서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규모가 있는 대행사는 각 부서별 옷차림의 유형이 있다. 기획사도 그 나름대로, 우리 같은 제작사/프로덕션도 그 나름의 옷차림이 있다. 교수는 교수의 옷차림과 분위기가 있고 개발자는 개발자만의 옷차림과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딱히 어떻게 입으라는 규정도, 조언도 없지만 안팎에서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업계에서 버티다 보면 자연스레 닮게 된다. 


그러나 요즘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몇 년 전 후배 작가가 하소연을 했다. 이 후배는 삼십 대 초반으로 이십 대 중반부터 이 업계에서 활동해 왔다. 이 후배가 한 번은 부산 시청의 한 부서에 일 때문에 들어가게 됐다. 자신은 외주 작가로 남자 감독과 동행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남자 감독의 옷차림이었다. 크록스였는지 슬리퍼였는지를 신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점퍼와 청바지를 입고 시청에 들어갔다고 한다. 가뜩이나 평소에도 제법 옷차림에 신경 쓰는 후배가 고객을 만나러 가는 데 얼마나 옷차림에 신경을 썼겠나. 이 상반된 두 사람을 보고 담당 주무관의 인상이 안 좋았다고 한다. 게다가 미팅하는 내내 그 감독은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몇 년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우리 프로젝트에 함께 할 울산의 젊은 감독을 소개하기 위해 역시 울산 시청에 들어가게 됐다. 그때가 여름이었지만 감독과 나는 가벼운 재킷에 시어서커 느낌이 나는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반면 젊은 감독은 운동화 차림에 청바지,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프로의 모양새

-비단 이들만 이런 건 아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젊은 후배들 중엔 방금 PC방이나 자취방에서 나온 듯 한 옷차림으로 작업실도 가고 고객도 만나는 이들이 있다. 외모보단 실력 아니겠는가, 일의 결과가 좋으면 됐지 첫인상이나 옷차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우린 나름의 영상 세계를 갖고 있는 아티스트인데, 아티스트는 좀 자유분방하게 입어도 되는 거 아니냐, 그것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꼰대 아니냐, 하는 생각들도 하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린 아티스트는 아니다. 고객의 돈을 받고 고객의 목적 달성을 위한 효과적인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아트를 빌려오고 사용할 뿐, 우리 작업의 결과 그 자체가 아트는 아니다. 얼마 전 김성근 감독이 한 야구 예능에서 말했듯이 돈을 받으면 프로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프로는 돈 값을 해야 하고, 돈을 받을만한 사람인지 입증해야 한다. 그 입증은 첫인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일의 마무리까지 계속 반복된다.      


물론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매일 양복을 입고 다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고객을 만날 때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들도 안다. 우리가 평소엔 어떻게 입고 다니고 촬영 현장에선 어떤 차림인지 대충은 안다. 그런 사람들이 나름 차려입고 비즈니스 상황에 걸맞은 가방을 들고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중하게 명함을 건네고 자기소개를 하고 신중하게 다이어리를 꺼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그들은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가늠한다.      


첫인상, 첫 느낌의 중요성

대부분의 고객은 우리와 같은 업종의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전화를 하고 메일을 주고받은 뒤부턴, 고객은 나와 감독을 상상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이미지에 걸맞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면 의외로 고객들은 크게 안도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대로라고 좋아하기도 한다. 딱 이런 일 하시게 생겼다고 하면서...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옷차림과 이미지가 그 사람에 대해, 한 직업에 대해, 경력에 대해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그것 말고는 첫 대면에서 한 인간의 느낌과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다. 그 대면의 순간 이후, 회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우리의 진면목을 깊이 알게 되겠지만, 그 진면목을 확인하는 회의 시간에 오가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는 대체로 우리의 이미지를 본 순간 얻은 판단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말과 행동을 통해 얻은 한 인간의 정보는 대체로 첫인상을 받은 순간에 내려진 판단을 강화하는 쪽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광고 학과에서 가르치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에도 관련 이론이 있다.     


그러니, 미팅을 나갈 때 무방비하게, 아무렇게나 나간다면 첫인상을 망칠뿐더러 그 이후의 커뮤니케이션과 메시지 수용, 관계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합리적인 인간이라지만, 의외로 많은 판단은 3초, 또는 그보다 더 짧은 순간에 이뤄지고 그 이후의 정보는 재차 말하지만 그 판단을 강화하는 쪽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작업실에 가지 않는 날에는 대체로 같은 옷을 며칠 씩 입어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곤 한다. 아마 수영을 안 했으면 샤워는커녕 세수도 며칠씩 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객을 만나러 나갈 땐 단장한다. 고객이 기대하는 카피라이터와 작가, 전문가의 모습으로 나간다. 그 기대를 충족시키면 그 뒤의 대화는 일사천리다. 그야말로 첫 단추를 잘 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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