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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23. 2023

취향 차이의 틈에서 일하는 법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39

현재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하나는 프레젠테이션 상황에 필요한 영상이다. 광역시도 및 시군구에서 대형 기반 시설 공사를 진행할 때, 지자체의 예산과 국비가 사용된다. 이렇게 국비가 사용될 경우 타당성 조사라는 걸 한다. 예비타당성 조사부터 시작해서 수차례 이뤄진다. 최종 타당성 검토를 할 때는 기획재정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소위 경쟁 PT와 유사한 발표를 한다. 이때, 필요한 영상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서 현재 진행 중이다.      


다른 하나는 지역 지자체의 홍보 영상이다. 지자체장이 바뀐 지 만 일 년이 아직 안 됐지만 어찌 됐든 민선 8기의 임기가 해를 넘긴 상황에서 전임 단체장 시기에 만든 홍보 영상을 계속 사용하는 건 이래저래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관청 안팎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필자가 사는 소위 부산/울산/경남 지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지역의 시군구가 그럴 것이다. 이 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요 몇 주 재미있는 현상을 새삼 겪고 있다.


고유의 색깔이 있다.

기업이든 관청이든, 일반 회사원이든 공무원이든 나름의 색깔이 있다. 기업의 경우엔 우리가 흔히 분류하는 업종에 따라 남성적인 기업이 있고 여성적인 기업이 있다. 대학에서 이공계 남학생과 인문대 남학생의 차이처럼 기업의 성격에 따라 직원의 분위기도 좀 다르고 그에 따라 그 기업의 성격이 더 굳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엔 좀 덜하다. 예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만 해도 소위 우리나라 대기업이 선호하는 외모와 옷차림, 헤어스타일까지 특집으로 다룬 신문 기사나 잡지 기사가 흔했다. 친구의 외모만 보고 어느 회사가 어울릴지 농담 삼아 얘기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기업문화가 거의 군대와 비슷한 기업도 많았고 직종, 직군, 직급에 따라 여성이 차별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뭐,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런 기업이나 관청은 아직 많다.      


여하간, 지금도 기업이나 관청, 또는 각 부서마다 고유의 어떤 컬러라고나 할까,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도시 인프라를 주로 담당하는 교통, 건축, 건설, 토목 관련 부서, 또 경제나 산업을 담당하는 투자, 산업, 수출입 관련 부서들은 약간 남성적인 면이 강하다. 이들은 홍보 영상을 의뢰하면 대체로 선이 굵은 걸 원한다. 가끔 자기네 부장이나 국장이 좋아하는 영상이라고 해서 보면 딱딱한 남자 성우의 목소리로 “위대한”, “도약”, “도전”, “리더”, “글로벌”, “앞서가는” 등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반면 같은 도시 관련 부서라도 경관이나 공원 및 녹지 관련 부서, 문화와 교육, 복지 관련 부서는 섬세한 느낌이 있다. 이건 담당자의 성별에 상관없는 부서의 업무와 지향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 전자의 부서들은 실적이나 성과가 숫자나 현물로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후자의 부서들의 경우엔 주민들의 삶의 질과 관련이 높기 때문에 그 필요를 설득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섬세한 수사학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리더가 바뀌면 색도 바뀐다.

공공기관이나 관청의 경우엔 단체장과 정권의 성격에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소위 진보 성향의 단체장의 임기동안엔 여성, 가족, 복지, 문화, 관광 정책의 비중이 높아지고 이와 관련된 시설도 많이 지어진다. 예를 들어 도서관, 노인복지관, 육아 및 교육 관련 시설들이다. 또 여가에 관한 시설도 많이 늘어난다.      


반면 보수 성향의 단체장의 임기 동안엔 상대적으로 경제, 산업, 건설 건축 및 토목 공사를 정책 1순위로 놓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측근들의 성향 또한 약간은 남성적이고 보수적이다. 물론 부산/울산/경남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만 이런 경향이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내가 겪은 바로는 그렇다.      


두 개의 부서, 두 개의 색깔

우리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두 개의 프로젝트는 이런 성향이 상반 되게 나타난다. 우선 도시 인프라 관련 영상을 준비하고 있는 부서에선 국장부터 담당 주무관까지 다 남자다. 그 팀으로 한정하면 과장-계장-차석-주무관이 다 남자다. 그 국의 다른 부서엔 물론 여자가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남성의 숫자가 많다. 우리한테 의뢰한 내용도 심플하다. 사실 위주로, 임팩트 있게 호소하는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고객의 주요 의뢰 상황이었다. 이런 요구사항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통일되고 일관된 의견이기 때문에 일하기 편하다.     


반면 지자체의 홍보 영상 의뢰의 경우엔 지자체의 홍보실에서 발주된 건이다. 홍보실의 인력 구성은 공무원들의 순환근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남자 계장도 있고 여자 계장도 있다. 과장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담당 주무관은 여성이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단체장과 그 측근, 그리고 홍보실장은 남성이면서 남성적이며 보수적이다. 취임 슬로건 또한 남성적이다. 색깔 또한 당연히 붉은색이 중심이다. 작년 가을 취임 백일 영상을 만들었을 때, 단체장의 취향에 따라 아주 굵은 목소리의 남성 성우로 바꿔 다시 녹음해 줬을 정도였다. 반면 담당 주무관은 뭔가 섬세하고 감각적인 홍보 영상으로 만들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 경우,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아주 남성적인 시놉시스를 보여줬다. 당연히 여성 주무관은 너무 직설적이고 치적 위주라고 지적했다. 그럴 줄 알았다. 다음번엔 아예 시나리오를 만들어 갔다. 적절한 중간 지점을 찾아 들어간 시나리오였다. 주무관은 맘에 들어했다. 이번 주 홍보실장 앞에서 내가 직접 시나리오 브리핑을 했고, 측근인 홍보실장이 메모해 둔 단체장의 강조 사항을 전해 들었다. 그 사항을 시나리오에 추가해서 넣기로 하고 작업은 진행하기로 했다.


담당자와 의사결정자 사이에서

담당자가 의사결정자가 아닌 경우 담당자의 취향에 전적으로 맞추는 건 의미 없다. 전반적인 고객의 분위기, 그러니까 기업이 됐든 관청이 됐든 그 조직의 성격과 이미지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그 조직을 이끄는 수장의 철학, 정치적 성향을 분석해 그에 맞는 크리에이티브를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담당자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된다. 결국 일을 진행하면서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은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의견을 받아들인 흔적이 일의 초기 단계부터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나 방향성이 아니어도 된다. 부제나 표현 방법이나 대상에 그것이 반영 됐음을 느끼게 하면 된다. 담당자가 그걸 느끼게 되면 당연하게도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게 된다.      


관청의 경우, 담당자는 대체로 홍보나 영상 관련 전문가이기는커녕 전공도 하지 않았고 그전에 관련 부서의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다. 주무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장이나, 심지어 과장도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 만나 자리에서부터, 업계에선 상식인 것들을 질문할 때가 많다. 이때, 아주 정성껏 대답해줘야 한다. 여러 대안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      


설령 우리 영역을 벗어난 질문, 예를 들어 인쇄나 출판, 디자인 분야의 질문을 해도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을 해주고 더 구체적인 정보를 원하면 우리가 아는 전문 회사가 있는 경우엔 소개를 해주기도 한다. 물론 소개를 해준다고 해서 우리한테 이득이 되는 건 없지만 고객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생각해 준다는 믿음을 줄 수 있다.


우리 일은 결국 사람 놀음이다.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영상이 선택된 것이고, 그 영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같은 사람을 부른 것이며, 우리를 부른 조직 또한 결국엔 사람들의 무리다. 그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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