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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Jan 27. 2023

혼자만 살겠다는건가?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32

큰 형님의 생태계 교란 

최근 페이스북에 뜨는 광고다.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광고 대행사의 프로모션 광고다. 카피라이터 초년병 때는 업계의 독보적 1위였다. 업력이 25년은 넘었을 것이다. 페이스북의 광고를 클릭해서 들어가 보면 제작비를 무료 지원해 주겠다는 페이지가 뜬다. 10초짜리 TV자막 광고 제작 무료, 라디오 광고 제작 무료, 20초 영상광고 제작 무료다. 모델이 들어갈 경우엔 협의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아놨고 샘플 영상도 링크시켜 놨다. 물론 제작비 무료의 조건은 있다. 3개월 동안 광고를 집행하는 경우다. 그러니까 라디오, TV 광고를 3개월 동안 하는 경우에만 제작비를 안 받겠다는 것. 프로모션 기간은 3개월이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이 회사가 부산에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오래된 회사, 즉 업계의 큰 어른, 맏형님 격인 회사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게 왜 문제냐고? 이런 프로모션은 업계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행사는 그야말로 광고를 대행해 주는 회사다. 드라마에도 나오듯이. 제작은 제작사에 맡긴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대형 광고 회사의 경우엔 다 갖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역의 경우엔 흔치 않다. 제작 팀을 갖고 있는 경우라도 제작비를 안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안 받으면 제작만 해서 먹고사는 프로덕션들이, 당연하게도 망하기 때문이다. 가격 경쟁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렇게 부산의 맏형님 격인 이 대행사는 왜 제작비를 안 받는 걸까? 대행 수수료만 받아도 그럭저럭 수익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광고제작물의 품질로 수익을 내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광고가 미디어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될수록 수익을 내는 구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동안 대행사는 뭐 하냐고? 뭘 뭐 해. 광고주에게 전화해서 광고 대행 연장하시라고 독려하고, 그렇게 연장하면서 계속 수수료 챙기는 거지.      


양아치 짓의 기원

이런 짓을 지역 업계에서 최초로 한 곳이 지역 케이블 TV 송출 업체였다. 대기업 계열사로 통합되기 전, 지역의 케이블 TV 업체들은 수익 구조 창출의 벽에 막혔었다. 망은 깔릴 대로 다 깔렸고 지역 광고 유치는 제자리걸음이고 그러니 당연히 광고 수익도 적었다.


결국 이들은 2천 년대 초반, 지역에 쏟아진 광고나 영상 관련 학과 졸업생들을 끌어 모아 제작팀을 확충하고 앞선 대행사처럼 <제작 무료+방송 3개월 이상>이라는 상품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지역의 광고 및 영상 업계의 무한 출혈 경쟁이 시작됐고, 영상 제작 단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떨어진 단가는 콘텐츠 코리아랩이나 관련 학원에서 영상을 맛보거나 배운 사람들이 쏟아지고, 그런 사람들을 모아 차린 회사들의 난입으로 더 떨어졌다. 그 경쟁 속에서 직원들 월급을 많이 줄 수 없으니 지역의 광고와 영상 전공 학생들의 서울 및 수도권으로의 엑소도스(Exodus)가 이어졌다. 그 연쇄는, 업계의 말라죽음, 고사(枯死)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후배들이 좋아요를 누른 이유

이어지는 글은 작년에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다듬은 것이다. 내 페이스북 글 중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우리 지역의 동종 업계 후배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동종 업계 종사자들도 있었다.


지난해 있었던 일이다. 그 지난해 우리가 제작했던 한 공공 프로젝트 관련 홍보 영상의 후속작 제작을 위한 브리핑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담당 주무관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위의 계장이 바뀐 탓이다. 그 자리에서 담당 주무관의 하소연을 들었다. 혹시라도 업계 후배들이 보게 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때 나눈 대화의 내용과 이어진 생각을 남겨본다.    

 

적은 예산 VS 낮은 퀄리티

사연은 이렇다. 작년 봄에 이미 E회사가 만든 영상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새로 온 담당 주무관이 업무 파악으로 바빴기 때문인지 우리말을 흘려들었던 모양. 그 후 그 영상을 보게 됐고, 뚜껑이 열려서 그걸 만든 업체를 불러들였다. 작년에 전임 주무관이 적은 예산으로 네 편을 만들 수 있냐고 E회사에게 물었고, E회사는 당연히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주무관은 다른 부서로 가고, 새로운 주무관이 와서 그 결과물을 본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영상을 유튜브로 미리 봤기 때문에 애들 여행 브이로그 같은 영상을 보면서 "이걸 누가 오케이 했노."하고 걱정했었다.

주무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이걸 어따 써먹겠습니까? 개인 블로그나 유튜브에 올리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아니 시의 공식 채널이 무슨 개인 블로그도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VS 할 수 있습니다.

천만 원에 2분 정도의 영상 네 편을 만들 수 있다. 아니 백만 원에 네 편도 가능하다. 단지 품질이 안 좋을 뿐이다. 얼핏 영상이 거기서 거기지 뭐 다를 게 있겠나 싶을 거다. 그러나 사람 눈은 다 똑같다. 우린 영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제조업이나 일반 기업이 홍보 영상이나 광고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일단 가격별로 영상 샘플을 갖고 간다.


가격대별로 CG의 퀄리티, 성우의 퀄리티, 투입된 장비의 수준, 촬영 횟수 등에서 차이가 난다. 그걸 한 편의 영상만 보면 티가 안 나는데 가격대별로 비교해서 보면 티가 난다. 그건 짝퉁과 명품 가방의 차이 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그렇게 보고 나면 당연히 우리에게 묻는다.

"천만 원으로 오천만 원짜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린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러나 천만 원 수준에선 최고 퀄리티는 보장합니다."라고 확언해 준다.


누가 양아치인가?

자, 그러면 돈 오백만 원 견적을 던지고 오천만 원짜리 퀄리티를 원하는 고객이 양아치인가? 아니면 오백만 원으로 그 정도 퀄리티를 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영상 업자가 양아치인가? 이 던지기를 영상을 잘 아는 고객이 한다면 고객이 양아치다. 그야말로 갑질이고, 마른걸레도 짜서 물을 빨아먹겠다는 양아치다. 반면 영상을 전혀 모르는 고객이 그런 던지기를 한다면 "당연합니다.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한 영상업자가 양아치다.


누가 손해를 보는가?

우리는 어떤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감독은 울산에서 그 업계 어른 축에 속하기 때문에 자기가 단가를 낮춰버리면 후배들이 고생한다는 걸 안다. 부산엔 그런 선배, 어른답게 구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울산에도 그런 상도를 지키지 않고 푼돈이라도 벌겠다고 고객 앞에서 무조건 "됩니다."라고 설레발치고, 후에 퀄리티 낮은 영상을 던지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엄청난 후폭풍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고객은 다시 그쪽과 일 안 하겠다고 다짐하는 게 전부고, 공무원은 어찌 됐든 완료계를 제출해야 하고, 일의 마무리를 어떤 형태로든 해야 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안 그러면 자신의 인사고과나 평판에 막대한 흠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그 영상업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


직업과 업계의 윤리

나나 감독이나 돈 버는 재주는 없다. 그냥 잘하는 일을 이십 년 가까이하고 있고 그 업으로 식구들 먹여 살리는걸 다행이라 여길 뿐이다. 나 같이 고향 없고 애향심 없는 사람은 그런 마음이 없는데 감독은 고향 울산을 사랑한다. 애향심이 엄청나다. 그래서 시의 일, 관공서 일이라면 울산의 얼굴을 만든다 생각하고 납품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들인다. 이게 이렇게까지 품을 들일 일인가 싶어서 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과 십 오 년 같이 일하다 보니 나도 그렇게 변하게 됐다. 예전엔  카피나 콘티, 시나리오, 기획서를 던지면 뒤도 안 돌아봤다. 요즘엔 녹음할 때까지 들여다본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잘해놔야 감독의 고향, 동종 업계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을 돈벌이로 생각한다면 이윤을 먼저 봐야 한다. 일의 개수를 세어야 한다. 그러나 천직으로 생각한다면 기초부터 튼실히 하고 고객 앞에 정직해야 한다. 아주 국가주의적인 구호일지 모르지만 현대중공업 정문에서 보이는 건물 외벽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사실 영상이나 광고 업자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광고주, 고객이 잘 돼야 지역 경제가 잘 돌아가고 그래야 우리도 일을 하나라도 더한다. 각자의 영역에서 양아치 짓 안 하고 성실하고 담백하게 일을 해나가는 것... 그게, 어쩌면 이 일을 몇 십 년 해 먹을 수 있는 노하우 중 하나라면 하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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