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자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머리는 텅 빈 속물들이다. 이들은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관광지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이는 거지가 구걸할 곳을 찾아 헤매는 것과 유사하다.",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51.
하~진짜....
세상에는 언제나 나보다 더 독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만...
이 책에 실린 저자의 인자한 모습이...
글하고 매칭이 안 된다는게 함정...
평일의 스키장
-목요일, 아침 아홉 시, 주차장이 만차였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가깝지 않고 경남과 전북에 걸쳐 있는 그 산에 전날밤부터 왔을 청춘남녀, 가족, 애 어른들이 스키복, 스노보드복, 스키화를 신고 따각거리며 돌아나디고 있었다. 휴게실과 카페테리아, 물품대여소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오픈런을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런 풍경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뉴스에선 경제가 어렵다, 살림살이가 팍팍하다고 매일 떠드는데... 뭐 그렇지도 않은가 보구나... 나라에 텐션이 떨어진다고 걱정들을 하던데 이 정도 열심이면 그것도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다들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열심히 살고 있구나... 어쩌면 난 좀 심심하고 데면데면하게 삶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니 그런 곳에서 하다못해 눈썰매도 안 타고 산이나 구경하고 사람 구경하고... 저녁엔... 나보다 이런 성향이 더 해서 무심하게 리조트 안의 사우나에서 한 시간 동안 목욕이나 하고 온 처남하고 술이나 마시고 잤구나.. 싶었다.
우주의 의지, 물자체, 실재
-우리의 욕망은 엄청나게 개별적이고 취향적인 것 같지만 사실 거기서 거기다. 인간의 욕망은 쇼펜하우어가 간략하게 추려 말했듯, 자기 보존, 종족 보존, 쾌락의 추구... 여기에 세 가지 행복의 조건.... 즉 참된 자아, 물질적 자아, 사회적 자아의 동시 추구로 점철되어 있다. 수천 년 전에도 그랬고... 몇십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위의 단어들은 라캉의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데... 우리는 어떤 거대한 의지,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이, DNA를 보존하여 전달하가 위해 신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어떤 우주적 의지, 거대한 의지에 종속되어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표현하는 욕망들은 이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명덕신민(明德新民)
-오늘 본 다큐, <어른 김장하>의 주인공 김장하 선생님이 세우신 학교의 교훈이다. 찾아보니 사서의 대학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풀이를 하면 참나를 찾아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뜻.
쇼펜하우어가 성격에 대해 얘기했듯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산다. 눈앞에 있는 것에 집착하고 이루지 못한 꿈에 후회하며, 욕망의 실현에 잠 못 든다. 나 또한 아직 그렇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의 실체를 살려는 의지로 봤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욕칠정도 결국엔 이 생에서, 현생에서, 오늘의 일상에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만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에서 발생한다. 그 탐욕을 버리고 속세의 욕심을 버리고 나서야 저 욕망을 끊을 수 있다. 그 뒤에 깨달음이 오고.... 그 깨달은 뒤에야 저 명덕신민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욕망으로부터, 이 속세의 덧없음으로부터 자기를 먼저 구제해야 중생의 구제도 가능하다는 말...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래서 불교의 철학과, 또 니체의 철학과, 더 나아가 프로이트와 라캉의 철학과 맞닿는다. 근대의 도구적 이성을 철저히 비웃었던 이들과 말이다.
아무나 되는 게 아니어서 큰 어른이다.
-불교에선 안거라는 것이 있다. 일 년의 두 번, 화두를 붙잡고 정진하는 시간이다. 보통은 큰 절에 한데 모여하곤 한다. 몇 년 전 해인사에 갔을 때, 마치 하안거의 해제하는 날이었다.
스님들이 매일 새벽 예불을 드리고 낮에는 공부와 울력을 하고 때마다 안거를 하는 이유도 결국엔 저 명덕, 일체의 욕망을 끊고 자신을 속세에서 움직이게 해온 우주의 의지를 간파한 뒤, 그것을 초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 뒤, 그 깨달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번, 일 년, 또는 평생의 수행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정진하는 것일 것이다. 불교에도 이 모든 것을 이룬 큰 스님이 있듯이, 세상에도 큰 어른이 있다. 아무나 이뤄낼 수 없는 경지이기에,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살았기에 그리 부르겠지.
그래도 좀 편하게 살려면
-좀 괜찮은 사람, 아빠, 남편.. 더 나아가 어른으로 살고 싶은데 쉽지 않다. 어째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직업의 기술은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이 더디게나마 눈에 보이는데 사람 노릇은 그렇지 않다. 그런 욕심도 포기하고... 아요.. 그냥 내 욕심대로 살아재껴버리자 싶다가도... 나무도 나이를 먹으면 그 품과 그늘이 넉넉해지는데 사람도 좀 그리 돼야 안 되겠나 싶은 마음이 들어 다시 마음을 수습하다가도.... 에라이... 뭐 그러길 반복하고 있다.
저자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 말하듯이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선과 마음을 좀 부드럽게 하고 싶건만, 어째 요즘엔 더 뾰족해진다. 책에 나오는 고슴도치처럼 말이다. 그 탓에 아내와 딸, 처남과 감독 말고는 인연이 없으니... 누굴 탓하겠나....
이번 주, 읽은 책이다. 여행을 갈 때도 넣어 갔다. 오늘도 김장하 선생님 다큐를 본 두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잡고 있었다. 좀 나은 사람이 되라고 격려하는 책과 다큐를 본 하루... 그게 그런 격려로 될 것 같았으면... 의지로 될 것 같았으면....
오늘 다큐에선 김장하 선생님의 건물에 세 들어 있는 자전거포 주인이 그랬다. "선생님 같은 분이 다섯 사람만 지역에 있으면 그야말로 장땡이지. 그런데 한 사람 밖에 없어서 지역이 아직 불행한 거라." 어째, 소돔/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던 신의 약속이 떠오르지 않나?
그래... 그 다큐에 나온 사천의 식당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최소한 의인은 못 되어도.. 흉내는 내며 살자.. 아니... 그런 의인들의 응원단장이라도 하며 살자...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만 총총.
아... 참고로... 2020년의 한 기사를 보니 "풀소유"의 아이콘 혜민 스님은 2008년 조계종 승려가 된 이후, 안거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2023. 1. 8
(*부산 토박이 딸이 눈을 보고 싶어해서 이 주간에 스키장에 갔었다. 나도 딸도 스키장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