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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4. 2023

들뢰즈 제대로 읽기-고쿠분 고이치로

동해선에서 읽은 책 20

어쩌면, 들뢰즈는, 초월적 존재, 또는 자아를 만들어낸 그 원초적 무엇을 탐구하는 무리의 막내쯤 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 막내에 대해 꼼꼼하게 쓴 고쿠분 고이치로는 내 또래다. 아즈마 히로키, 지바 마사야,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이 책을 읽으면서 뭔가 모를 불안감이랄까.. 그런 것이 들었다. 저쪽의 90년대 학번과 지성으로부터 결락된 그 뒤의 학번들과의 간극... 그 간극이 만들어낸 지금의 일본... 그 현상을 어쩌면 우리도 겪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철학은 어디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화와 영혼의 동요를 필요로 하는 모든 자를 고발하는 것,  그저 그뿐이라고는 해도, 대체 다른 무엇이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인가."-<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 들뢰즈;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P45에서 재인용.


철학의 구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어떤 개념이나 유명한 이의 구절을 대화에 끼워 남발하거나 누군가의 삶의 문제에 그럴싸하게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과 철학의 역할은 아니다. 문제의 제기, 질문의 연속, 개념에 대한 의심... 그리고 다시 질문을 하는 것이 철학의 본질이다. 


그래서 하나의 생각의 줄기를 따라 사유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질문을 가진 이들, 선배 학자들, 현인들, 작가들의 질문의 릴레이에 끼어드는 것이다. 아니... 이어 질문한다고 해야 할까? 


추적과 용의자

이 책을 읽으면서-새삼스럽지도 않지만-그전에 읽었던 책들을 선택했던 건, 또는 읽었던 건 우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단락에서 밝혔듯이 어떤 질문의 계보의 저 말단, 또는 질문의 성전의 문 밖에 나도 모르게 끼어 있거나 서성이고 있구나 느꼈다.


이정우 선생님의 책에서 만난 라이프니츠와 들뢰즈의 이론, 지바 마사야가 공들여 쓴 <너무 움직이지 마라>에 담긴 흄과 라캉, 들뢰즈의 이론, 사사키 아타루가 쓴 <야전과 영원>에서 다뤄진 역시 라캉, 그리고 르 장드르와 푸코의 이론... 이 이론들이 이 책 한 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마치 추리를 하듯, 들뢰즈라는 하나의 사건의 추이를 조심스레 추적한다. 그의 연구방법, 철학하는 법에서 시작한 추적은 초월론으로 나아간다. 


흄-칸트/프로이트-라캉/라이프니츠

지속적으로, 그러나 느긋한 아마추어 추적자로써 내가 추적해 온 자아와 주체의 문제는 결국 그 근간에 있는 무엇, 초월적 무엇에 대한 논의로 응축된다. 흄은, 간단히 말하면 경험주의다. 칸트는 앞서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초월적인 존재/무엇을 "상정"한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소환한다. 사건의 미세한 것들... 하나의 개념이나 언어로 수렴되지 않은, 경험의 밖에 존재하는 자잘한 사건들. 책에서 예를 들었듯이 개별 물결들은 저마다의 모양을 가진 채 저 대양으로부터 밀려와 해변에 닿지만 파도로 함축되어 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미세한 것들, 경험으로 수렴되지 않은 것들은 사건의 표면이 아니라, 이정우 선생님도 관련 책에서 강조했듯이 일종의 주름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 안에,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무의식 안에 촘촘히 박혀 있다. 언어로 소환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무의식 속에 퉁쳐 넣어버린다. 그 감금의 간수를 원억압이라 부르면서. 그러나 그 감금의 공간에 수많은 물결, 욕망의 물결,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수많은 것(정신분석에선 s라고 통칭한다.)들이 존재한다. 


라캉은 그걸 팔루스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수많은 S를 대표하는 하나의 그것을. 그러나 그것은 결여되어 있다. 결여되어 있어서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지만 욕망되는 것이기에 우린 그 결여를 결여되지 않은 것으로 채운다. 기호의 호출이 반복된다. 


그 이유는... 알다시피... 하나의 개념은 다른 개념들로 채워진다. 김정선이  자신의 책(동사의 맛인지, 다른 책인지 분명치 않다.)에서 말했듯이 낱말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낱말이 설명되기 위해선 다른 낱말이 필요하다. 기호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기호가 의미를 갖기 위해선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가 필요한데 기의, 즉 표상된 것의 의미 또한 언어, 즉 기호로부터 부름 받기에 어떤 기호도 욕망 그 자체, 결여된 그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이 기호와 욕망의 연쇄적인 미끄러짐이다. 


들뢰즈의 의심

우린 여기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초월적 무엇, 즉 원억압을 만났다. 들뢰즈는 이걸 의심한다. 그게 정말 있는 건가? 우리의 욕망이 억압되어 있기에 우리가 미쳐서 사는 게 아니라 미쳐서 살기에 우린 그걸 상정하고 있는 거 아닐까? 만약 그걸 무너뜨리면, 그러니까 그 원억압의 상정을 무시하면... 그것이 없다고 가정하면 우린 이 상태, 이 삶 그 자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이 질문은 구조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구조, 방식의 근간에 대한 회의는 그야말로 그 뒤의 거의 모든 이론들... 그럴싸한 영화 비평과 문예 비평들까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들뢰즈의 의심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종속되길 원한다. 지배받길 원하고 스스로 억압의 상태를 감수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이 의심하고 추적한 것과 그 경로를 같이하며, 들뢰즈도 같은 용의자를 추적한다. 의심한다. 아니 도대체 왜 미쳐 사는 거야... 정상적이라면 중세엔 봉건 영주를 죽였어야 했어. 제정신이라면 파업이 벌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러나 우린 왜 이걸 감수하고 사는 거냐고... 들뢰즈는 이제 푸코를 소환한다.


푸코는 이걸 권력으로 설명했다. 담론적 권력과 비담론적 권력... 다스리는 힘과 그 힘을 실현하는 장치들.. 후기에는 생-정치와 그 미시적 실천을.... 들뢰즈는 여기서 개인에게... 욕망에 눈을 돌린다. 우리에게 내재된 욕망... 그 욕망에 대한 이해 없이는 권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원화된 권력이 우리를 지배해서 종속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어떤 욕망이 이렇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생활 전반에 퍼져 있는, 확산되어 있는 권력의 규율과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한 개인 안에 내재된 해결되지 않는 욕망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걸 마르크스주의적 정신분석이라 칭했다.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 들뢰즈가 그랬듯이 답을 주는 사람은 의심해야 한다. 질문을 품고 세상과 상황, 시대를 응시해야 한다. 도대체 우리와 나와 당신의 어떤 욕망이 이 세상을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왜 이런 무너져 마땅한... 갈아엎어 마땅한 이 세상을 인지하지 못하고... 또 설령 인지한다고 해도 고작 <헬조선> 같은 단어 따위로 자조하듯 욕하며 견디는지... 그 견딤의 내재적 욕망은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사족....

결국 다시 지바 마사야로... 다시 이정우 선생님으로.. 그리고 마치 예상하고 사놓은 듯한 다른 책들로 간다.... 한 십여 년 전부터 추리소설을 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정말 흥미진진한 대하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다. (원제는 <들뢰즈의 철학 원리>다. 원제가 내용에 더 어울린다.)/202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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