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21
이전에도 이런 얘길 한 것 같은데, 처음 읽는 책인데 읽었나 싶은 책이 있다. 어째 문구마다 내 생각인 것 같고, "오, 그렇죠.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면서 맞장구를 치면서 읽는, 그런 책이 있다. 그래서 "언제 읽었었나?"다시 의심하면서 생각을 뒤져보는 그런 책이 있다.
이 책도 그런 책이어서 읽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아닌 것 같다. 20세기의 고전이어서 말을 많이 들어봤겠지만... 글쎄.. 분명 안 읽었다. 그러다 저자 소개를 다시 읽다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가 눈에 띄었다. 그 일당의 면면을 살펴보니.. 역시나 학교 다닐 때도, 그리고 요즘도 종종 읽는 학자들이 나왔다. 늘 읽다마는 하버마스는 물론이고,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그리고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마르쿠제까지... 어쩐지... 책의 내용이...
오늘 아침, 페친이신 송철호 선생님의 칼럼을 읽었다. 지난해 명품 소비 1위, 연구입액 40만 원 이상으로 압도적 세계 1위.... 선생님은 묵자의 말을 인용하여 가난한 이웃,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여, 이럴 때일수록 근본을 강화하고 쓰임새를 절약하라 말하셨다.
선생님의 바람은 쉽게 이뤄지진 않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하나의 명품이 사라지면 새로운 명품을 찾아내고 모든 명품이 사라지면 다른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소비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이 나온 건 1941년이었다. 알다시피 전체주의의 광풍 속에 세계대전이 절정이던 시기였다. 그때, 저자는 전체주의, 특히 나치즘이 저 이성적인 국민인 독일 국민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답을 찾고자 했다. 이 책은 그 답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이 사라지고 공화정이 된 독일처럼... 우리에게도 어느 날 느닷없이 자유가 주어졌다. 돌이켜보면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민주화가 됐으며 직접 선거를 독려받고 지방자치가 부활했다. 통행금지가 없어졌고 교복과 두발이 자율화 됐으며 금기시하던 에로 영화와 비디오 산업도 갑자기 풀어졌다. 막았던 해외여행도 갑자기 풀어줬다. 심지어 대학도 마음대로 세우라고 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도 될 것 같은 시대가 갑자기 열렸다.
그 이후, 우리에게 명품의 시대가 열렸다. 투기의 시대가 열렸고 승용차의 시대가 열렸으며, 호화 결혼식과 축제와 잔치의 시대가 열렸다. 프로 스포츠의 시대가 열렸고 개신교는 급작스레 성장했다.
에리히 프롬이 독일 사람인 걸 기억하자. 심지어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도. 히틀러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폐쇄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시카고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독일의 학자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가 공부를 할 때 목격했던 건, 나치즘이 독일에 수용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제3자 입장에서도 기가 차다. 그야말로 정치적 기반도, 이렇다 할 이론도, 이념도 없이 그저 무뢰배 같은 사람들이 한 연약한 인간을 중심으로 뭉쳐서 정권을 잡았다. 쿠데타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다. 놀랍게도 선거에 의해서였다. 아주 천천히, 몇 번의 선거를 거쳐서 말이다. 프롬이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식은 저 때 잉태됐을 것이다. 도대체 왜? 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인가....
프롬은 중세와 교황의 시대, 르네상스, 신흥 시민 계급과 자본가의 등장, 종교개혁과 신교의 역할을 짚어가며 사회와 인간에게, 대중에게 새로운 차원의 자유가 주어질 때마다,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이 열릴 때마다, 그래서 하나의 개체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인간과 대중이 어떻게 그 기회를 등지고 권위와 권력에, 치졸하고 졸렬하며 조잡한 조직과 단체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는지 파헤친다.
또, 사도마조히즘을 중심으로 자신의 자유와 존재를 불안하게 여기는 주체가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또는 기꺼이 그 억압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유로부터 발생하는 그 불안을 해소하는지 짚어간다. 그래서 폭력을 구사하는 사람이나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규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일과 성공, 성취, 조직, 회사, 직업, 직함, 그리고 소비와 사물, 명품과 여가 등을 통해 자신을 불안을 숨긴다. 자신이 하나의 주체로서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또 그 고민 뒤에 등장하는 불안을 저 앞에 나열할 것들 속에 묻어버린다. 술과 마약, 도박과 같은 모든 중독성 있는 것들도 그런 공동묘지의 역할을 한다.
"개인이 자발적인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세계와 관련시키면, 그는 고립된 원자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와 세계는 구조화된 전체의 일부가 된다...... 자신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는 사라진다. 이러한 의심은 그가 따로 분리되어 있고 삶이 좌절당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가 강박적으로나 자동적으로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살 수 있을 때 이 의심은 사라진다. 그는 자신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고, '삶의 의미는 하나뿐이라는 것, 즉 산다는 행위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판본, P203~204.
자발적으로 사는 것, 그리고 산다는 행위 그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는 것.... 어째 실존주의 같지 않나? 니체의 분위기도 풍기고... 주체는 미래에서 도래한다는 백상현과 라캉의 말도 생각나고... 그렇다. 예전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어디에도 메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고.. 그러나 사랑해야 될 사람을 사랑하고.. 삶의 매 순간에 충실하면서 사는 거다... 그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