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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07. 2023

더 패치;두려움 가득한 작업실에서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동해선에서 읽은 책 23

작가는 존 맥피다.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어마무시한 저널리스트로 소위 뉴저널리즘의 대표 작가다. 참고로 동시대, 같은 흐름에 올라탔던 작가들로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관음증자의 모텔>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게이 털리즈, 6,70년대 글쓰기 스타일의 아이콘인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를 쓴 조앤 디디온 등이 있다. 이들의 명성에 비해 번역된 책은 몇 권 없다.


와 관련한 역사나 이론, 또는 이들의 글쓰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내가 읽은 책 중에서는 <하버드 니먼재단의 글쓰기 가이드 - 진짜 이야기를 쓰다.>를 추천한다.


요즘 존 맥피의 <이전 세계의 연대기>를 읽고 있다. 이 재미없는 지리학 이야기, 그것도 거의 천 페이지나 되는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굳이 이런 책을 읽어야 할까? 싶었지만... 존 맥피의 글이어서 읽고 있다. 저녁이나 밤에, 딱히 할 게 없을 때 몇 페이지씩 읽고 있다. 올해 안에 다 읽을 수 있으려나? 20230306


이 책은 말 그대로 퀼트, 우리식으로는 조각보다.

자서전이 아니지만 자서전적인 이야기다. 한 사람이, 위대한 논픽션 작가가 살면서 겪은 거의 모든 일들이, 살면서 쓴 모든 문장들의 파편들이 이 책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메타 자서전이다.


1부는 스포츠에 관한 글들인데 대체로 최근의 글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2010년대보다 과거지만 말이다. 먼저 독자들에게 충고를 해주자면 여기에 담긴 스포츠는 절대로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그러니까 국민 대부분이 그 규칙을 알거나 스타 선수 한 두 명쯤은 아는 그런 스포츠는 아니라는 것이다. 낚시, 골프, 미식축구에 라크로스-검색해 봐라.-등이 이어진다. 여기에 뉴저지 주에 사는 곰들에 대한 이야기, 여기에 골프 코스를 벗어난 골프공을 줍는 이야기까지. 이게 스포츠야?라고 외치고 싶을 것이다. 스포츠다.


2부는 멀게 잡으면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써진 문장들을 재조합한 글이다. 그러니까 썼으나 세상에 나오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로 새로운 글을 만든 것이다. 나도 종종 이런 짓을 하니까 상상을 못 하는 건 아닌데 이 정도 분량의 책으로 만드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의 문장들은 감정과 떨어져 있다. 세상을 보고 참여하고 경험하고 바라보고 관찰하고 그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해서 글을 쓰는 것이 분명하지만 거기엔 어떤 감정의 실오라기도 없다. 눈물도, 함성도, 폭소도 유도하지 않는다. 읽는 이로부터 그저 나올 뿐이다. 담담히 써 내려간 문장, 그 행간에서, 그 문장의 마침표에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이, 그가 그 사태와 상황, 그 현장과 순간에서 느꼈던 감정이 툭 하고 건네진다. 마치 비대면 배송이라는 구실로 문 앞에 몰래 놓고 가는 택배처럼 말이다.


옮긴이는 이 번역에 대해 졌잘싸, 즉 졌지만 잘 싸운 게임이라고 자평했다. 괴로웠던 모양이다. 어제 처제가 내 서재에 들어와서 "형부 <1Q84> 재미있어요?"라고 물었다. 이어서 "난 번역한 책은 못 읽겠더라"하고 구시렁거렸고, 옆에 있던 아내는 "그래서 교수들이 원문으로 읽는다카지 않더나."하고 맞장구를 쳐줬다. 4페이지짜리 영어 논문의 브리프라도 번역해 본 인간들은 절대 이런 말 못 한다. 최소한 대한민국 평균-평균은 네 권 정도다- 이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은 못 한다. 이 집안 종특이다. 대책 없이 확답을 갖고 있는 것. 아마 그래서 나같이 답 없는 인간과 잘 사는지도 모르겠다.


아래의 문장은 엄청나게 많은, 멋진 문장 중에서 몇 개만 대표선수로 착출 한 것이다. 그러니 안 읽으셔도 된다. 물론 그 문장에 사족처럼 따라붙은 내 코멘트 또한.


아.. 마지막으로.. 책 사진에 자꾸 맥주를 오버랩시키는 건 어쩐지 책만으로는 심심해 보여서다. 그렇다고 일부러 맥주를 사 와 마시며 사진을 찍는 건 아니고 서재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책이 보이면 한 두 페이지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겸사겸사 사진도 찍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코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것도,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도 아니라.. 그냥 사고처럼, 해프닝처럼 맥주와 책이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인을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두 마리의 애완견이 늘 같이 찍히는 사진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병실에는 남향으로 난 창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의사의 면전에 있었다. 그가 한 말은 그 기간 동안 벌어진 다른 모든 일처럼 빗물같이 어머니에게 퍼부어졌다가 당신에게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두려움 가득한 작업실에서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더 패치>, 존 맥피, 24.

....

낚시 얘기에서 아버지 얘기로... 그리고 다시 낚시 얘기로..


"충동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만, 왜 우리를 찾아온 건지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같은 책, 존 맥피, 48.

....

내 말이....


"1000개의 디테일이 합쳐져 하나의 인상을 만드는 겁니다.", 캐리 그랜트, 존 맥피의 <패치>에서 재인용, 151.

...

아직도 오프닝 시퀀스를 고민하는 감독에게.


"희끗희끗한 수염으로 내 청춘을 감췄다.", <패치>, 334.

...

호기심을 갖고 있다면 청춘이다라고 길게 쓸 걸 저렇게 한방에 해결했다. 존경스럽다.


"글쓰기는 다섯 달이나, 심지어는 5년이나 걸리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그는 단 5분밖에 안 되는 사이에 그 글의 이곳저곳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글을 쓰는 이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패치>, 386


"한 명의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대대적인 이벤트다. 한 사람의 개인은 우편으로 도착한 책 한 권과 비슷하다.", <더 패치>, 388.

...

모든 광고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새겨둬야 할 말... 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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