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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13. 2023

힘 있는 글쓰기-피터 엘보

동해선에서 읽은 책 26

몇 번 말했듯이, 가끔 그런 책이 있다. "내가 예전에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나?"싶을 정도로 이미 내가 그 책에 써진 대로 하고 있거나 그 내용에 익숙한 책. 이 책이 그런 책이다. 내가 하는-카피라이터로서 일하는 방식과 쓰는 일-방식이 맞나 의심이 들 때, "맞아."라고 답하는 글. 딱 내가 하는 방식, 내가 해 온 생각,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정확하게 해주는 글과 책. 이 책은 서문부터 그렇다.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라는 딜레마에 굴복해서 한 근육이 지배하면 다른 근육은 반드시 쉬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아도 된다. 글쓰기 과정을 두 단계로 구분하면 이 두 개의 상반되는 근육을 한 번에 하나씩 활용할 수 있다. 먼저 힘을 빼고 열린 마음으로 빠르게 초고를 쓴다. 그런 뒤 쓴 것을 퇴고할 때는 비판적이고 강한 마음가짐으로 한다.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면 이 두 가지 기술이 전형 상충하지 않고 오히려 상생한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힘 있는 글쓰기>, 피터 엘보, P47.


그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간다. 

야만적으로 생각을 늘어놓고 메모를 하고 써 내려간다. 다 써 놓고 보면 속된 말로 글이 산에 갔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나는 전설이다.>를 소재로 쓴 칼럼의 주제는 원래 "고독"이었다. 이 시국이 끝난다고 우리의 고독이 끝날까? 뭐 그런 물음에서 시작했었다. 그런데 소설을 다시 읽다 보니 "집"의 의미에 꽂혔고 결국 저 집의 의미가 뭘까에 집중해 쓰게 됐다. 그 사이 고독은 안녕...


때로는 두 개의 생각이 달리기도 한다.

내 오래된 MP3 플레이어와 옛 워크맨을 소재로 쓰려했던 주제는 오래된 물건의 노스탤지어였다. 그래서 그렇게 써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글이 환경 문제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최근에 다회용 컵에 관한 페친의 글도 봤고, 가전제품 쓰레기를 수입해서 거기서 금을 캐는 노동에 시달린다는 가나 어린이들에 관한 페친의 글도 봐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어찌 됐든 쓰다 보니 노스탤지어와 환경보호가 경쟁하고 있었다. 뭐 결국은 노스탤지어 단락들을 전부 삭제해 킵해 놓기로 하고, 이번 칼럼은 환경 문제에 관한 칼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온 세상이 충격에 빠지더라도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진실한 것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에게서 받아야 할 성원을 우리 내면에서 찾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힘 있는 글쓰기>, 85.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최근 아프간 기여자 자녀들의 등교에 관한 페북 글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 인상에 이어 생각난 것이 우크라이나 난민 초등학생이 이탈리아 나폴리의 초등학교에 첫 등교하는 영상이었고, 이 두 개의 사건의 그러해야 함을 설명하는 영화로 <블라인드 사이드>가 떠올랐다. 이렇게 세 개의 각기 다른 텍스트를 묶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풀어갔다. 결론엔 심지어, 내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십사 하고 아직 공부 중인 칸트와 데리다, 레비나스까지 초대했다.


"극히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눈부신 글을 써낼 수 있지만, 눈부신 퇴고는 오직 상흔을 안은 늙은 프로만이 할 수 있다.", <힘 있는 글쓰기>,216.


카피라이터의 삶은...

수정당하고 버려지는 글이 태반인 삶이다. 초년병 때는 소위 날아오는 재떨이도 피해 봤고, 허공에 흩날리는 종이를 맞아보기도 했다. 다섯 개 시안 중에 하나만 통과되는 건 당연했고 오히려 하나라도 통과된 것에 안도했다. 그래서인지 난 내 글에 대해서도 대체로 무자비하다. 한두 줄 드러내도 시원찮으면 그냥 단락 전체, 심지어 반 장도 걷어낸다. 단락의 위치도 수시로 바꾸고 제목, 서두도 부담 없이 바꾼다. 그래도 맘에 안 들면 "넌 다음 기회에"하고 다음 달, 심지어 몇 달 뒤로도 미룬다.


아직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오늘 아내랑 인테리어 공사에 대해 얘기하면서 집에서 버릴 물건들을 언급했다. 난 내 싸이클을 버리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저걸 내가 원하는 데로 탈만큼 반사신경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다는 게 내 이유였다. 한 때는 저걸 타고 철인 3종 경기를 나가는 게 꿈이었지만 말이다. 아내가 그런다. "당신은 몸이 안 따라주면 그렇게 잘 접더라.". 그렇다. 그렇게 축구도, 농구도, 마라톤도, 스포츠클라이밍도 접었다. 신체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나 지적인 능력은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다. 글쓰기도 좀 더 애쓰고 갈고닦으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사족, 또는 사과?

울산 사무실로 출발하기 전에 알라딘 울산점에 새로 들어온 책 목록을 살핀다. 다른 곳에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번 주 월요일 밤에 보니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이 들어와 있었다. 오호...

행여나 퇴근길에 가면 누가 사갈까 싶어 출근하는 길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얼른 책만 사고 환승해서 작업실에 갔다. 혹시라도 이 책을 "오후에 슬슬 나가서 사 볼까.", 생각했던 울산 시민이 있으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해야 하나?... 어찌 됐든 약간의 미안함이 있다. 저번에 봤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읽던 여학생도 생각나고...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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