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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훈 Mar 24. 2023

나는 전설이다 - 리처드 매드슨

동해선에서 읽은 책 33

페이스북이 작년의 일을 알려줬다. 어제 올린 책의 흐름을 이어받기도 하고 해서...


두 번 이상 읽는 소설은 거의 없다. 하루키의 소설 중 몇 개, 김훈의 소설, 카뮈와 폴 오스터, 히가시노 게이고 단편... 이렇게 말해 놓고 나니 거의 없다기보단, 버리지 않은 소설은 종종 다시 읽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중에 딸이 좀 크면, 심심할 때 읽으라고 <모중석 스릴러클럽>과 <밀리언셀러클럽>의 소설들, 그리고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덱스터 시리즈 세 권, 스티븐 킹의 소설도 남겨 놨다. 책꽂이와 천장 사이에 있다. 칼럼을 쓰기 위해 다시 읽었다.


영화는 소설과 다르다.

"폭풍이 있고, 그리고 모기떼의 습격. 그러더니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세상이 지옥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어. 마치 악마의 저주 같아."P.63.


핵전쟁이 있었고 모래 폭풍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 흡혈귀가 되어,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가 됐다. 그들은 산 사람을 물어 죽였기에 사람은 모두 죽고... 결국 로버트 네빌만 남는다. 소설 속 그는 영화에서처럼 의사도 군인도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체계적이지도, 잘 배웠지도, 노련하지도, 개를 키우지도 않는다. 그는 혼자 남겨진 후 혼자서 3년을 집에서 버틴다. 


인간은 다 알지 못한다. 저 도서관을 통째로 들이마셔도.

"그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조용한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구에 버려진 지성의 잔재들, 정신세계의 무익한 오바이트, 쓰레기, 잡탕...... 이 수많은 책들 중에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던 것이다.", P.96.


소설의 네빌은 무지하고 무식하다. 생존하기 위해 애쓰다 3년째가 되어서야 원인을 밝혀내려 한다. 그래서 대학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절감한다. 여기 있는 수많은 책들도, 인류가 쌓아놓은 지식도 멸망을 막지 못했음을... 결국 혐오감을 느낀다.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지식인이 있는가. 정치인은? 이 네트워크 된 글로벌 시대에 우린 멀리서 난 전쟁을 볼 수는 있어도 막지도, 멈추지도 못한다. 네빌이 도서관에서 느낀 무력감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도 인류는 희망이 있지 않을까?


우린 교만할 수 없다.

"박테리아는 돌연변이를 한다.", P.202.


온 인류가 팬데믹의 뒤를 쫓았다. 액션 영화에 나오는 경찰차처럼, 단 한 번도 추월해서 그 앞을 막지 못했다. OJ심슨의 그 지루한 추격전처럼, 우린 이 추격전을 2년 넘게 봤다. 이 돌연변이의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예언됐다. 


네빌은 왜 집을 떠나지 않는가?

"그 집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게요. 습관처럼 말이야. 그냥..... 그냥 습관처럼.... 그 집에 익숙해 있었소.", P.214.


"새로운 세계란 늘 원시적이죠. 그 점을 아셔야 해요.", P.215.


난 그게 궁금했다. 영화에선 주인공이 좀비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아주 근사한 연구실을 집에 차려 놓았기 때문에 집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럼에도 난 납득되지 않았다. 모든 좀비 영화,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주인공의 목적은 생존이었고, 생존을 위해 안전한 지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소설 속 네빌의 저 말에, 난 설득당했다. 집이 없는 인간, 가정이 없는 인간, 뿌리 없는 인간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습관은 어쩌면 인간다움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생존이 인간다움의 조건이 아니라.


매드슨은 뭘 보고 두려워했던 걸까?

"알아요? 당신이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 당신이 죽고 나면 이제 당신과 같은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P.217.


매드슨은 26년생이다. 54년이면 아직 서른도 안 됐을 때다. 그런데도 새롭게 도래할 뭔가를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행간에 드러난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알았겠지만...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30여 년 간 거짓말 같은 풍요를 누렸다. 매드슨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냉전시대를 살며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매드슨의 공포는 12년 후 조지 로메로의 영화를 통해 새롭게 부활한다. 매드슨의 공포는 자신을 위협할 새로운 사고를 가진 세대의 도래에 대한 예감에 기인한다. 반면 로메로의 공포는 아무 생각 없는 미국 소비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반지성주의에서 느낀 공포였다. 그리고 지금, 우린 이 두 사람의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2.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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