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선택의 고통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30

by 최영훈

딸은 요즘 덕질을 하고 있다.

아이브를 좋아한다. 집에 CD 플레이어도 없는데 앨범을 사줬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든 멤버들의 사진 때문이었다. 그런 사진을 포토 카드라고 한다. 연말에는 시즌 한정 굿즈를 사고 싶어 하기에 삼촌이 주문해 줬다. 제 방의 서랍장 위에 아이브의 작은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보고 있다.


딸만 그런 건 아니다. 딸의 친구들 중에서도 아이브를 비롯해서 아이돌을 덕질하는 애들이 있다. 아즈마 히로키 같은 사람의 이론을 빌어 와 덕후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뒤, 그 덕질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단어를 쓰라고 하고 싶지만 관뒀다. 그 단어는 그 아이들의 것이어서 오십을 넘긴 아빠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앞서 말한 포토 카트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중고장터에서 서로의 물건을 사고판다. 딸이 보는 유튜브 채널 중에는 오직 이 포토 카드의 구매와 물건의 언박싱, 전시, 소개만 하는 채널도 있다. 딸의 말로는 그 채널의 주인은 대체로 중학생 정도라고 한다.


며칠 전, 딸이 긴 영상 통화를 했다.

단짝 친구 지유와 한 시간이 넘게 영상 통화를 했다. 이날 아침에도 긴 통화를 누군가와 했었다. 지유와는 방학 내내, 자주 영상 통화를 했었다. 문 밖으로 들리는 통화 내용은 뻔했다. 둘 다 좋아하는 아이브에 관한 내용이었다. 좋아하는 멤버에 대해 얘기하고, 각자가 갖고 있는 포토 카드를 교환할 수 있는지, 그런 실랑이를 하는 것이 통화 내용의 전부였다. 한 시간의 통화는 아내가 퇴근하여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끝났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아내가 딸이 먹고 싶다는 치킨을 주문하는 동안 난 딸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물었다. 딸은 솔직히 말했다. 아침에도 지유랑 통화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등교 준비로 바쁜 시간, 20분 정도 통화하고 방에서 나오기에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했냐고 물었었다. 딸은 같은 반 환희라는 친구와 통화했다고 했다. 아침부터 무슨 내용이었냐고 물으니, 학교 일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이때 이미 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학교와 학급 일, 숙제와 과제에 대해서 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친구는 없다. 그것이 궁금해서 친구가 딸에게 전화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딸이 친구에게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침에 통화한 사람도 지유였다. 내용도 뻔했다.


딸에게 말했다. “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지? 그때 아빠가 뭐라고 했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지? 평범해지는 건 너무 쉽다고. 그냥 친구들 하는 데로만 하면 된다고 그랬었지?”,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다 쓸데없는 짓을 해. 그 짓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따지고 보면 아빠가 맥주를 마시는 것도, 돈을 써가면서 수영을 하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야. 돈을 벌지도 못하고 명성을 높여주지도 않아. 그러나 그게 재미가 있고 사는 데 활력이 되기 때문에 하는 거지. 그런데 그거 때문에 정말 해야 될 걸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토요일 오후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배운다.

수업이 끝난 후 백화점 내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백화점 옥상 공원에서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 부녀의 루틴이다. 음료수를 마시다가 딸이 물었다.


“아빠, 뇌의 용량이 백이면, 아빠는 어떤 게 차지하고 있어? 그러니까 관심 있는 거, 생각하는 거 말이야. 몇 퍼센트씩 차지하고 있는 거야?”

“아빠야, 뭐, 너랑 엄마가 한 90퍼센트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십 퍼센트는 책이나 글쓰기, 일 같은 거에 쓰는 거지.”

“그러면, 아빠는 내가 뇌를 어떻게 나눠 썼으면 좋겠어?”


이 질문에 길게 대답했다. “아빠는 네가 공부를 못해도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덕질을 하고 그걸로 친구랑 오래 통화하고 관련 유튜브를 보는 것도 놔둬. 아빠는 네가 행복하고 건강하면 그걸로 만족해. 그런데, 넌 시험을 보면 항상 백 점을 맞고 싶고 성적도 반에서 1등을 하고 싶잖아. 원하는 성적이 안 나오면 스트레스를 받고. 그러면 그걸 잘하고 싶은 거고, 그걸 잘하기 위해선 거기에 시간을 투자해야 해.”라고 말했다.


계속 말을 이었다. “은채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시간 밖에 없어. 너나 아빠는 천재가 아니어서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해야 돼. 아빠도 집에 있을 땐 그냥 술이나 마시고 TV나 보고 싶어. 그런데 글도 잘 쓰고 싶고 일도 더 오래 하고 싶으니까 책도 보고 계속 글도 쓰고 하는 거야. 타고난 것이 없으면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딸에게 물었다. “네가 덕질하는 것이 네가 원하는 성적을 내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그러니까 덕질과 공부를 함께 다 잘할 수 없다면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우선순위를 둬야 하지 않을까?” 딸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요즘 술을 좀 줄였잖아.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수영 때문이야.”, 십 년 만에 다시 수영을 시작한 것이 지난여름이었다. 한두 달, 마스터 B반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여성들과 함께 운동하면서 수영 체력을 만들었다. 그러다 11월 중순쯤, 우리 반의 1번 주자 아저씨가 급한 수술 때문에 한 달 정도 운동을 쉬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스터 A반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열한 시 클래스의 마스터 A반은 템포가 빠르고 운동량이 많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 반의 1번 주자가 맨 끝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바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이 반에서 버틸 수가 없어 할머니들과 운동하는 마스터 B반으로 내려가거나 시간을 바꾸곤 했다.


나도 처음엔 힘들었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수영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과 함께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수영만큼 좋아하는 술을, 특히 맥주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겨울에 접어들면서 주량을 줄였고 주종을 바꿔갔다. 또 수영하는 내내 힘들어도 쉬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 결과, 해가 바뀌고 나서는 꽤 괜찮은 3번, 또는 4번 주자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상호배타적일 때가 있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과 덕질의 마음은 시간과 돈을 사이에 두고 상호배타적이다. 딸에게 그랬다. 네가 덕질을 위해 사고 싶은 음반과 좋은 성적을 위해 사고 싶은 책이 있을 때, 돈이 많다면 다 사면된다. 그러나 용돈은 한정적이니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덕질에 들이는 시간이 많아져서 성적에 지장을 준다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시간 또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가능한 사람은 그래도 된다. 술을 마시고 싶을 만큼 마시면서 수영 체력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된다. 덕질을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친구와 몇 시간씩 영상 통화를 하고 짬이 날 때 공부를 해도 원하는 성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난 그런 사람은 아니다. 돈도 시간도 체력도 뻔 한 사람이다. 어떤 건 표준 이하다. 그렇다면 선택을 해야 한다. 아껴 써야 한다. 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사는 삶은 흔치 않다. 꿈을 꾸면 다 이뤄진다는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다. 재능이나 집 안의 부유함의 정도가 우리의 출발선을 다르게 한다. 빌 게이츠가 말했듯이 인생은 불공평하다. 그나마 공평한 것이 있다면 시간 밖에 없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이길 원하는지에 따라 오늘 하루의 시간의 씀씀이 바뀐다.


딸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한다.

1등이 하고 싶고 학생회장도 되고 싶고 유학도 하고 싶고 꽤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천재인가? 체력이 엄청나게 좋은가?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한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만드는 건 나 밖에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쪼개어 쓰는 건 결국 나다. 지난 며칠, 딸에게 이런 냉혹한 삶의 진실을 말해줬다. 어쩌면 추운 날 할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게 배반당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에 비하면 요즘의 혹한은 따뜻한 축에 속한다. 그 배반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렇게 모진 말을 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