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딸의 손님들이 왔다. 소년 두 명. 한 명은 지한이, 한 명은 주원이... 지한이는 같은 반이고 주원이는 2반이다. 학교 도서관에선 매년 책을 낭송하는 대회를 하는데, 그냥 낭송이 아니라 책의 내용에 따라 일종의 구연동화 수준의 연기도 요구된다.
딸은 1학년 때부터인가 이 대회를 꾸준히 나갔는데 올 해는 좀 색다르게 하고 싶었는지 이 두 명을 캐스팅했다. 그렇다. 딸이 이 두 놈을 캐스팅한 것이다. 지한이는 같은 반 부반장이고 어머니가 국악을 하신다. 3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는데 그때 반 아이들을 공연에 초대했었다. 지한이 별명은 빌런 토끼인데 외모와 별명이 이렇게까지 매칭이 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실물을 보니 별명 그 자체였다.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오빠랑 똑같이 생겼.... 흠....
주원이는 키가 크고 곰같이 생겼다. 신발 사이즈가 260. 딸 말로는 작년에 같은 반일 때, 국어 시간에 주원이가 발표하는 걸 보고 내년엔 얘랑 나가야겠다고 작정했다고 한다. 흠... 외모는 씨름 선수 같은데 연습하는 걸 엿들으니 연기가 기가 막힌다. 사람은 역시 외모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
아날로그 놀이
두 소년과 한 소녀는 뭐 하고 놀았을까? 주원이가 시외에 나갔다 오는 바람에 한 시간 정도 늦었는데, 그 사이 먼저 온 지한이와 수학 문제를 함께 풀었다. 솔직히 내 자식이고, 그 자식의 친구지만 둘 다 이해 안 간다. 그래도 나중에 지원이가 온 뒤에는 집에 있는 두 종류의 보드게임을 꺼내어 열심히 했다. 하나는 모노폴리, 하나는 모동숲을 소재로 한 비슷한 게임이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셋이 깔깔대면서 웃는데 서재에서 그 소리를 듣는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지한이의 웃음소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기에 딸에게 말했더니 흉내 내기도 어렵단다.
소년의 먹성
-두 소년의 엄마는 간식을 챙겨서 보냈다. 빵집에서 고급 롤케이크와 과자를 그야말로 한 보따리 보냈다. 뭘 이리 많이 보냈지 하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그야말로 오판이자 오산이었다. 아내가 점심으로 떡볶이를 해줬고, 애들이 그걸 다 먹기도 전에 또 과일 한 접시를 내왔다. 난 속으로 “아니 애들이 다 먹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뭔 과일을 이리 많이.”하고 생각했었는데 둘 다 동시에 사라졌다.
그 후, 셋이서 놀라고 하고 아내와 잠시 인근으로 산책을 나가 꽃구경을 했는데.... 그 사이 간식으로 보내온 빵도 먹고 어제 사다리 타서 걸린 주원이가 쏜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고 한다. 셋 다... 통통하다.
라일락, 명자나무, 수양벚꽃
집 앞에서 삼색동백을 보고 박물관 뜰을 지나 지름길로 문화회관 앞 잔디밭으로 나가려 했다. 그 사이 화사하게 핀 벚꽃을 보고 몇 개 안 남은 별목련, 명자나무를 봤다. 아내가 유엔묘지로 들어가자고 했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수양벚나무가 있다. 넓은 잔디밭에 그 나무가 서너 그루 멀뚱히 서 있는데 묘하다. 아름답고 화사한데 쓸쓸하다. 그 앞에 두 개의 왕벚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핑크, 하나는 흰색이다. 그 대조도 볼만하다.
아내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까지 충전해 왔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에서 무슨 꽃 사진 대회를 하는 모양이다. 후문으로 나와 집으로 가는데 라일락이 보였다. 유엔묘지 정문 바로 안쪽에도 몇 그루 있는데 조각공원에 있는 나무가 더 크고 향도 진하다.
아침의 라일락
딸을 데려다주면서 라일락의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어? 어디서 맡아봤는데...", 딸은 강아지처럼 갸우뚱거리면서 킁킁거렸다. 껌이나 향수, 샴푸, 비누, 섬유 유연제에서 쉽게 맡아볼 수 있는 향이 이 향이라고 말해줬다. 아이유가 그렇게 열심히 불렀던 라일락이 바로 이거라고. 딸은 "아~"하면서 다시 킁킁 댔다.
그 사이 딱새가 날아왔다. 라일락과 벚나무 사이에. 내가 사진을 찍고 있으니 딸은 그러려니 하고 잠시 기다려줬다. 매화와 목련, 벚꽃 순으로 지고 있다. 대신 명자나무가 오렌지색, 붉은색, 흰색으로 올라오고 있고 모과꽃도 올라오고 있다. 발 옆엔 제비꽃도...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큰 것 같다. 그러나 계절 따라 변하는 풍경의 이면에 자연의 기다림과 나름의 애씀이 있는 것처럼 딸도 성장의 매 순간마다 나름의 고민과 고통을 겪으며 열두 살이 됐다. 3학년 때까지는 남자 애들하고 투닥투닥거리는 같더니 이제는 남자 애들이 놀려도 그러려니 한다. 심지어 남자 애들하고 얘기하고 노는 것이 여자 애들하고 노는 것보다 더 편하다고 한다. 아마 뒤 끝없고 솔직 담백한 녀석들이 많아서인지도.
그래도 이때까지 집에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온 적은 없다. 집에 친구를 데려 온 적도 거의 없다. 단짝인 지유만 몇 번 왔을 뿐이다. 딸이 낭송 대회 연습을 위해 집에 친구를 데리고 와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내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어쩌면 이 날을 위해서, 그러니까 딸이 아무 거리낌 없이 친구를 집에 초대할 수 있도록, 또 그렇게 해도 아내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 지난해 인테리어 공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내도 산책길에 설핏 그런 마음을 내비쳤다.
이제 막 5학년이 됐는데 4학년 때와는 너무 다르다. 학교에 있는 시간도 길어졌고 영재에도 합격해서 주말엔 더 바빠졌다. 다이어트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라고 했다. 여학생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체력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꾸준히 해 온 음악 줄넘기도 계속하라고 했다. 올해, 딸이 고급 3급을 따면 학교 최초로 졸업 전에 그 수준에 도달한 여학생이 된다. 어쩐지 난, 다른 성취보다 이 성취가 뿌듯할 것 같다. 줄넘기에 그 급수의 띠가 둘려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