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성적과 사람에 흔들리지 마.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35

by 최영훈

달리기

작업실에 있을 때 카톡이 왔다. 체력 측정 하는 날이었는데, 50m 달리기를 반에서 삼등 했다는 내용이었다. 집에 와서 물었다. "너보다 빠른 애는 누구야?", "여자애인데 말랐고, 내가 걔랑 한 조였어. 같이 뛰다 보니까 나도 빨라졌나 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 어제 무리했나 봐. 삭신이 쑤셔."하고 하소연한다. "그러게. 그게 뭣이라고 죽을 둥 살 똥 뛰냐..", "그러니까. 다른 여자애들은 끝에 가서 걷는 것처럼 뛰던데... 하... 아빠, 난 왜 이렇게 다 잘하고 싶은 걸까?", "뭘 새삼스럽게. 넌 1학년 때부터 쭉~ 그랬어. 적당히 해라."


학원

편육에 맥주로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데 수학 공부를 끝낸 딸이 공부방에서 나와 엄마와 나 사이에 앉는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 나 미술학원 그만 다니고 수학 학원을 다녀볼까?", "응? 왜? 이번에 수학 성적이 네 맘대로 안 나와서?",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그러면 약간 자존심도 상할 것 같고. 애들이 항상, 넌 어떻게 학원도 안 다니면서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고 하는 말이 내 자부심이었거든."


옆에서 듣고만 있던 내가 한마디 했다. "딸... 시험 한번 못 쳤다고 너무 요동칠 거 없어. 넌 어린이집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성실하게 혼자 공부하면서 성적을 유지했어. 아빠는 네가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미술도 했으면 좋겠어." 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관성과 꾸준함

"다혜처럼 학원 좀 다녀서 갑자기 수학 실력이 늘 수도 있지. 그런데 너 일관성 알아?",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오늘 감독님이랑 시청에 미팅을 갔어. 시나리오 브리핑하러. 두 시에 약속을 잡았지. 아빠가 오늘 셔츠에 재킷에 좀 각 잡고 갔잖아. 여하간 담당 계장하고, 주무관 하고 높으신 분한테 올라가서, 시나리오 한번 설명 들으시죠, 했더니, 높으신 분이 우리가 와 있는데도, 일단 영상 만든 다음에 한번 봅시다, 하면서 우리랑 말도 안 섞고 내보내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그 양반이 작년 가을에는, 이번 영상은 정말 잘 부탁드린다. 이거 좀 넣어 달라, 저건 좀 빼 달라. 기간이 좀 부족하지만 잘 만들어 달라. 하면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더 말을 많이 했던 사람이란 말이야. 취임 1년 차 하고 2년 차, 그 사이에 사람이 변한 거지."딸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네 장점이야 여러 가지지만 아빠가 보기에 가장 큰 장점은 일관성과 꾸준함이야. 여기에, 못하는 것, 그러니까 약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보완하려는 거고. 아빠는 못 하는 건 포기하고 잘하는 것에 의지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이야. 그런데 넌 아빠를 안 닮아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고 훈련해서 부족한 걸 보충하려고 하지. 그런 자세만 계속 유지해." 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수학은 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봐주신 눈높이 선생님하고 상의해서 잘 해왔잖아."

"아, 오늘 선생님이' 은채야.'라고 카톡을 보내셨어."

"어? 어쩐 일로?"

"내가 '네?'하고 답장을 보냈더니. ‘보고 싶어서. 금요일에 보자.’ 하시더라."

"후후.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넌 애제자야. 그 세월 동안 쌓아온 수학 실력이 있으니까, 시험 한 번에 요동 치지 마. 여름 방학 때까진 학원 다닐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던 데로 해."


기 빨리는 친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빠, 지유가 이번 과학 단원 평가에서 하나 틀렸거든. 수학은 저번에 백점 맞았잖아. 그런데 나한테 와서 '아, 과학 시험은 망쳤어."이러는 거야."

"야. 걔는 밉상이구나."

"저번에 영재 과제는 나한테 먼저 보여주면서 조언을 해달 래."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걔는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마음이 편한 애야. 뭐, 흔한 한국 여자 애지. 영어로 티피컬리. 은채야. 아빠가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 이런 조언은 좀 웃기긴 하지만, 네가 지유랑 오랜 친구라고 하지만, 널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굳이 친구로 둘 필요 없어. 어차피 사회 나가면 그런 인간들은 차고 넘쳐. 그러니까 학교에서부터 그런 인간 상대해 주면서 에너지 낭비 하지 마. 아빠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배를 둔 적 없다.

시청에서 그런 일을 겪고, 또 딸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감독은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그러려니 하면서 멘털 챙기고 다른 프로젝트의 견적서를 작성했다. 나도 마감이 임박한 칼럼을 손 봤고.


경험상, 언제나 복수의 기회는 온다. 물론 그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그때가 온 건지,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고 지나간다. 그리고 복수는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나이를 먹어보니 그렇다.

회의가 끝나고, 홍보실 주무관이 00 디자인의 신 00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 사람이 감독님 하고 작가님한테 많이 배웠다던데요.", 내가 한마디 했다. "전 그 사람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저하고 관련 없습니다. 그런 젊은 애 허풍에 귀 기우이실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말로 두들겨 팰 계획이다.


나한테 뭔가를 배웠다는 사람은 학교 밖의 사람으로 한정한 경우엔 서너 명 정도다. 그리고 현재 날 선배라고 부르고, 때가 되면 인사하고, 좋은 일, 나쁜 일 있으면 연락해서 상의하는 후배는 딱 한 명뿐이다. 여러 복 중에 의외로 여복은 많은데 인복은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에 대해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다. 또 날 불편하게 하는 인간을 곁에 둘 필요도 없고. 떡이나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인간이랑 옥신각신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딸이 이런 인생의 진실을 일찍 알았으면.(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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