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세계, 아빠의 세계, 우리의 세계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36

by 최영훈

사춘기의 징후들 - 취향

사춘기의 징후들이 보인다. 우선 취향이 도드라지고 있다. 아이가 크는 동안 취향이 변하는 것도 지켜봤다. 다른 글에서 썼듯이 만화는 뽀로로 시작해 또봇을 거쳐 시크릿 쥬쥬와 프리파라로 갔다가 어느 순간 만화를 끊었다. 엄마 옆에 앉아 드라마를 함께 보고 <쇼미더머니>나 <스ㆍ우ㆍ파>를 보기 시작했다. 공개 음악 방송 프로그램과 <지구오락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유튜브를 보기 시작하더니 <흔한 남매>를 보다가 아이돌 관련 콘텐츠를 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소위 덕질이라는 것도 하기 시작했다. 4학년 때부터 <아이브>와 <르세라핌> 등의 음악을 듣고 춤을 따라 했다. 그러더니 아예 랜덤 플레이 댄스 영상을 틀어 놓고 춤을 추는 걸로 운동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 영상이 재미있는 것이 대략 30분 정도의 영상 안에 여러 아이돌의 음악이, 소위 킬링 파트만 연이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딸은 그 부분의 춤을 기억하고 있다가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춘다. 곡이 바뀌면 금세 춤을 기억해 내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이걸 영상이 끝날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한두 곡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춤을 외우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엔 남자 아이돌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데뷔를 하는 팀이라고 하던데 팀 이름이 <제로 베이스 원>이라고 한다. 어느 사이트에서 주문했는지 그 친구들 사진을 활용한 다양한 상품이 담긴 패키지가 집에 날아왔다. 그 친구들 팬 밴드에도 가입해서 업데이트된 소식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아빠랑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 지난, 겨울 방학 때도 <씽 2>를 함께 봤다.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올드 팝을 좀 들었다는 아빠도, 팡팡 울리는 리듬을 좋아하는 딸도 만족했던 영화였다. 또 뻔 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만든 시나리오도 좋았다. 캐릭터도 완벽했고 노래들도 당연히 좋았다. 주토피아와 라스베이거스의 환상을 잘 버무린 도시 배경과 라스베이거스에 하나쯤 있을법한 극장과 공연이었다. 윤도현의 목소리도 반가웠고.

사춘기의 징후들 - 까칠함

이 영화 시작 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예고편이 나왔다. 광고의 문구는 “올해 최고의 영화”였다. 그러자 딸이 그랬다. "아빠, 웃기지 않아? 올해가 이제 시작했고 앞으로 어떤 영화가 더 나올지 모르는데 최고 영화라는 게?" 암만, 틴에이져 말이 맞다.


이젠 제법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앞뒤 안 맞는 광고나 사회의 부조리를 다룬 뉴스를 보면 흥분할 때도 있다. 음악과 콘텐츠도 취향이 있듯이 음식, 사람, 옷차림 등 삶의 여러 면에서 나름의 주관과 철학이 형성 됐다.


그렇다고 마냥 까칠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맘에 안 드는 친구 하고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관계를 유지할 줄도 알고 어른들에겐 인사치레도 할 줄 안다. 아이들을 카리스마로 제압할 때도 있지만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설득을 할 줄도 안다.


사춘기의 징후들 - 예민함

엄마나 아빠가 무심히 자신의 외모나 성적, 친구에 대해 평가를 하면 발끈한다. 비합리적인 비판이나 지적이라고 생각돼도 그렇지만 그저 자신의 약점이나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 여과 없이, 소위 팩트를 나열해도 기분이 상한다. 어떻게 가족이 이럴 수 있냐는 분위기다.


딸이 서운해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항의하면 아내는 딸을 똑바로 보며 “엄마고, 내가 낳았으니까 이런 소리 하지, 누가 이런 소리 해주니?”하고 위로도, 사과도 아닌 어정쩡한 말을 한다. 그럼 딸은 “그래도. 기분 나쁘다고.”하고 말하며 엄마를 본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째려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억울한 눈빛이다.


이것 말고는 딱히 예민한 부분은, 아직 없다. 피부에는 좀 신경 쓰는 것 같던데 몸무게나 헤어스타일엔 아직 무심하다. 체육이 있는 화요일과 목요일엔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가고 5월에 접어들자 반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딸이 구두를 신을 걸 아직 본 적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신겨 본 이후, 최근 몇 년 간 딸이 그런 신발을 사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러나 가끔 신발장에서 엄마 구두를 소재로 아내와 이야기하는 걸 듣곤 한다.


사춘기의 징후들 - 친구

친구들과 소통하고 어울리고 노는 시간이 늘었다. 특히 자기들끼리 약속을 정해서 제법 떨어진 친구 집에 방문하거나 대학가 앞에 나가서 이런저런 곳에서 쇼핑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영어로 말하면 그야말로 “hang out"을 하는 것이다.


신세계를 마주할 때

내 세계는 더 커질 게 없다. 이미 형성된 세계다. 아이의 세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언제까지, 얼마큼 커질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너무나 다른 세계다. 아이는 이제 만화 채널이 몇 번부터 몇 번까지 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이에 맞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세계와 내 세계가 다른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두 세계 사이에 장벽이 생기는 건 문제가 된다. 아이의 취향과 세계가 나와 다르다고 그 세계를 비판하면, 아이는 내 앞에 커다랗고 견고한 벽을 세울 것이다. 그러면 난 그 세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테고 말이다.

딸의 세계가 형성되고 변하고 성장하는 걸 보고 있다. 그 세계를 만들어가면서, 딸은 때론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딸의 세계와 내 세계 사이에 아직 벽이 없어, 그렇게 서로의 세계를 넘나들며 배울 건 배우고 알건 알고 가져갈 건 가져가고 있다. 그러면서 딸의 세계가 더 커지고, 동시에 내 세계에도 변화가 있다. 다 만들었다고 생각한 세계에 새로운 물결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딸의 세계가 커지고 바뀌는데 동참하면서 내 세계 또한 커지고 변화한다. 서로에게 열린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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