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은 오지 않았지만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SP

by 최영훈

입춘이 지난 뒤에도 눈을 기다렸다. 올 겨울에도 첫눈이자 끝눈은 내리지 않았다.


부산에서 눈다운 눈을 본 건 부산에 살기 전이다. 연애시절, 20여 년 전 어느 해 1월 말이었다. 송정 해변의 한 호텔에서 맞았던 아침, 바다에 내리는 눈을 봤다. 바다에 내리는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도심에 내리는 눈은 말 그대로 부산을 마비시켰다. 산복도로들은 모처럼 찾아온 눈을 버거워했다.


그 뒤로 한참 눈다운 눈을 보지 못했다. 몇 년마다 한 번씩 지역 뉴스엔 어디 산동네에 잠시 눈발이 날렸다는 소식이 호들갑스럽게 나왔지만, 그건 그저 풍문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산에 사는 동안 아쉬운 건 오직 하나, 눈뿐이었다. 어린 시절 파주와 의정부에서 만났던 그 폭설을, 20대를 보낸 평택에서 보곤 했던 추수가 끝난 논과 눈이 어우러져 만든 적막한 설경을 그리워하곤 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아내는 종종 눈이 많은 곳을 여행지로 고르곤 했다. 올 1월 말에는 제대로 된 눈을 본 지 꽤 오래된 딸을 위해 무주까지 가서 눈을 보고 왔다.

2009년 겨울, 삿포로의 골목

2012년 2월, 결혼 7년 만에 태어난 딸이 자라는 동안, 부산에 내리는 눈을 본 건 딱 한 번이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았다. 통통했던 볼이 살짝 들어갔고 뭐든 잘 먹던 식욕도 잠시 주춤거렸다. 감기가 다 나아가던 어느 날, 어린이집을 안 가 집에서 꼼지락거리며 노는데 창밖으로 눈이 날렸다. 젊은 시절, 폭설을 치우다 지쳐 눈삽을 던져본 적 있는 아빠 입장에서는 눈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다운 점퍼에서 삐져나와 떨어지는 오리털처럼 가벼운 눈이었다. 연유와 팥에 금세 녹아내리는, 잘 갈린 얼음 부스러기 같은 눈이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교회의 휑한 주차장에 쌀가루 같은 눈이 덮여 있었다. 쌓인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꺼풀 덮여 있었다. 딸은 나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잔설처럼 남은 감기 기운을 억울해했다. 그 억울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보니 안쓰러워, 옷을 단단히 입히고 두툼한 털모자를 씌우고 낄 일 없어 어디다 뒀는지 잊고 있던 장갑을 어렵게 찾아내 끼인 후 함께 나갔다. 딸은 너풀대며 날리는 가벼운 눈을 좋다고 쫓아다녔다. 그 가벼운 눈을 그러모아 정성껏 뭉쳐 놀았다.


딸을 키워보니, 아이들은 부산 사람이 눈을 반기듯 친구를 반긴다는 걸 알았다. 늘 보는 친구도 첫눈 만나듯 했다. 어젠 함께 등교한 친구를 오늘 아침에 또 만나도 두 손을 마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쉰이 넘은 아빠가 그 마음을 이해할리 없다. 어디 이런 마음뿐일까. 마흔에 낳은 딸이 열한 살이 됐다. 어린이에서 소녀로 나아가고 있다. 크면 클수록 딸의 세계는 점점 커질 테고, 그렇게 소녀를 거쳐 숙녀가 되면 아빠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더 줄어들 것이다.


조만간 아빠가 상상치 못했던 크고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어린 딸을 볼 때마다, 저 예쁜 녀석이 나중에 크면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사랑을 할까 궁금해진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처럼 반갑게 맞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첫눈이자 끝눈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강원도나 홋카이도처럼 겨울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눈처럼 사랑이 펑펑 내려 쌓여, 설경처럼 사랑이 일상의 풍경이 되어도 여전히 볼 때마다 설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집을 나가 일하다 퇴근한 뒤 맞이한 저녁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도 아주 오랜만에 본 사람처럼 그이의 반가운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제가 그 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그 이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으면 좋겠다. 그 사람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이었으면 좋겠다.


기다리던 첫눈처럼 온 딸이어서 일까? 사는 날 동안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자기 또한 찾아든 귀한 인연을 첫눈처럼, 늦눈처럼 고마워하고 반가워하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나이 든 아빠의 앞서가는 바람이다. 올 해도 눈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사랑처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더 반가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퇴근할 시간, 저녁 준비를 하러 간다.


올 2월에 써서 보낸 원고가 6월호에 나왔다. 이제 7월호가 나왔을 테니, 글에 나왔던 에피소드가 담긴 사진 몇 장과 함께 전문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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