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늘 진짜 빡치는 일이 있었어. 우리 반 일은 아니고 딴 반일인데 들은 일이야."
"응? 무슨 일?"
"우리 학년에 약간 발달이 늦은 애가 두 명 있단 말이야. 한 명은 아빠도 아는 지수, 한 명은 남자 애 재준이. 그런데 난 재준이랑은 한 번도 같은 반 된 적이 없거든. 재준이가 이번에 5반인데. 거기에 아영이랑 지선이가 있거든, 걔네가 15일에 창의공작소에 간다 말이야. 우리는 얼마 전에 갔었잖아? 걔네는 그때 가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아빠 사진 봤잖아. 우리 거기 가서 뭐 만들 때 조를 짜서 했잖아? 그 조를 오늘 걔네 반이 짰다는 거야. 그런데 아영이랑 지선이가 재준이랑 같은 조가 됐는데 같은 조가 돼서 계속 챙겨야 된다고 진짜 펑펑 울었다는 거야."
"응? 진짜?"
"응. 어이없지 않아?"
"그러게."
"이 얘길 수지한테 했더니 수지가 이해한다는 거야. 어이없지 않아? 아니 나 1학년 때 지수랑 같은 반이었잖아."
"그렇지. 지수 없어지면 너랑 하영이랑 막 찾으러 다니고 그랬잖아."
"맞아. 그리고 그때 내가 알림장 대신 다 써주고, 준비물도 알려주고 그랬단 말이야."
"그랬구나."
"아니. 우리가 4학년 사회 시간에 차별과 편견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배웠는데, 애들이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야, 학교에서 배운 데로 살면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겠냐."
"그런가?"
"애나 어른이나 학교에서 배운 데로만 살면 무슨 문제가 있겠냐."
아주 오래전,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었다. 난 그 책을 읽지는 않았는데... 그 제목의 의미를 이제 좀 알 것 같다. 지행합일인가? 배움과 삶이 일치되는 삶을 말하는 사자성어가 아마 이걸 것이다. 하... 그러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겠나. 애보다 못한 어른이 많은 세상이다. 경북 영주였나? 지 새끼 편하게 내려주겠다고 녹색어머니회의 신호도 무시하고 스쿨 존을 지나친 엄마가 있었다. 그 차에 탄 자식이 뭘 배우겠나. 바르게 커서 바른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일단 나부터....(4월 6일)
반장답다?
담임선생님이 일주일간 출장 가셔서 임시 담임선생님이 왔다. 정년퇴직한 지역의 선생님이 오셨다고 했다. 그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딸이 좋아했다. 며칠 전 음악회 단체 관람을 갔다 왔는데, 그 후기를 적어낸 걸 보고 "역시 반장 할 만하네." 하셨다고 한다. 흠... 글만 보고 그게 보이나? 과거에 나도 중학교 땐, 전교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학생이었지만 어느 선생님도 반장감이라고는 얘기 안 하셨는데...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다.
서울로 대학 갈 사람
어제, 아내가 늦게 와서 딸과 둘이 마주 보고 저녁을 먹었다. 딸이 얘기를 꺼냈다. 임시 담임선생님이 어제 아이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서울로 대학 갈 사람, 하고 물어보니, 아이들 몇 명이 손을 들었다. 물론 딸도 들었다. 딸이 그러는데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고 한다.
"아빠, 몇 명이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너 네 반에서? 글쎄, 너 네 학교 앞에 서울대 몇 명 보낸 고등학교에 붙은 플래카드 기억하지?"
"응"
"거기에, 아빠 기억에 한 50명 정도가 서울로 간 것 같던데. 그렇게 따지면 너네 반에서 한두 명? 많아야 서 너 명."
"그럼 서울대는?"
"글쎄 그 학교에서 여섯 명인가 갔다고 했으니 남구 지역 너 네 학년 전체 학생 중에서 한 두세 명?"
"아..."
장래 희망
"아빠. 그 고등학교 플래카드에 의치한약이라고 써져 있었잖아..."
"그렇지.."
"그럼 지방에 있는 의대는 공부 잘해야 가는 거야?"
"그렇지. 그런 친구들은 전공을 이공계로 바꾸면 서울에 어지간한 대학에 거의 과수석으로 갈걸?"
"아. 그럼 부산에도 의대가 있어?"
"동아대에 있나? 부산대 있고.. 국립대니까..."
"국립이 뭐야?"
"아.. 국공립 대학이라고 나라나 지역에서 세운 대학.."
"부산에도 있어?"
"있지. 엄마가 나온 대학, 부산대, 그리고 두 개 더 있지? 어딜까?"
"힌트..."
"하나는 선생님 되는 대학"
"아.. 아! 교대. 그런데 하나는 진짜 생각 안 나는데.."
"해양대... 그런데 대학도 중요하지만... 전공이 중요하지..."
딸이 장래희망 이야기를 꺼냈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거하고.. 내가 잘하는 거하고 맞는 것도 있고 안 맞는 것도 있어..."
"안 맞는 꿈은 뭔데?"
"안 맞는 건 해양과학자, 환경과학자"
"그건 왜 안 맞아?"
"이공계는 수학을 잘해야 하잖아..."
"어이, 별 걱정을 다하네. 그리고 아빠가 요즘 <이전 세계의 연대기>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 지질학자들이 나오거든. 그런데 해양지질학자가 너무 되고 싶었는데 배 멀미가 너무 심해서 결국 육지에서 지질학 연구하는 사람이 나오더라고. 그러니까 지금 뭔가를 잘하거나 못한다고 해서 그 일을 잘할 거라든지 못할 거라든지 지레 짐작하고, 겁먹지 마. 그런데 맞는 건 뭐야?"
"아, 애들이 인정하는 건 글쓰기거든.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것도 잘한데. 그래서 작가나 선생님도 하고 싶고."
"그래? 그럼 해양과학자가 돼서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면서 동시에 아빠가 읽는 이런 책을 쓰면 되겠네. 그러니까 벌써부터 어떤 길을 포기할 필요는 없어."
과잠, 과티, 백팩 그리고 2호선
서울에 있는 대학 이야기를 하다가 딸이 말했다.
"난 연세대학교 과잠이 예쁘던데."
"아 그래? 아빠 때도 그랬어."
"아빠 때도 있었어?"
"아, 우리 땐, 그러니까 우리 주산하러 갈 때 아빠가 드는 가방 있지? 이스트팩. 그게 아빠 대학 시절 유행했었거든. 그래서 대학들이 그거 카피해서 백팩에 대학로고 넣는 게 먼저 유행했어.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서울에 지하철 2호선이 있거든. 그게 순환선이야. 순환선 알지? 이렇게 한 바퀴 도는 거. 그게 그런데 주요 역이 서울의 주요 대학을 거쳐.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가 있는 신촌. 그리고 한양대, 건국대, 서울대랑 동국대도 갈 수 있었던가? 여하간 그랬는데. 자기 학교 백팩 메고 가다가 같은 칸에 연대나 서울대 애타면 다른 칸으로 넘어간다고 그랬지."
"왜?"
"쪽팔리니까... 과잠도 마찬가지고.. 아빠가 수영하러 가서 보면.... 경성대 애들은 뭐 주변에 대단한 대학이 없으니까 열심히 입고 다니는 거 같고. 출근할 때 보면 울산대 애들도 뭐 지들밖에 대학이 없으니 폼 나게 입고 다니더라. 아마 서울의 어지간한 대학 애들은 학교 밖에선 입지 못할걸?"
그건 당연하지 않다.
저녁을 먹고 정리를 한 뒤 입시 이야기, 장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내가 그랬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뭐 그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내일이 세월호 9주기인가 그렇거든. 그 애들 고등학교까지 다 키우고 그렇게 될 줄.... 그러니까 자식이 커서 학교 가고 대학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 애까지 크는 걸 보는 거... 그건 당연하게 아냐. 야, 아닌 말로 희귀병에 걸려봐. 너 저번에 TV에서 봤지. 약 하나에 몇십 억하는 병이 있는 거. 애가 그런 병에 걸리면 대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그냥 건강하게 커서 어른이 되어주기만을 바라는 거야. 미국 할머니 봐. 너 태어나는 것도 못 봤고 너 크는 것도 챙겨서 못 보시잖아. 아빠 아버지는 아빠가 어른이 되는 것도 못 봤고 결혼하는 것도, 당연히 네가 태어나는 것도 크는 것도, 아니 네가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를걸? 너 네 고모도 널 못 봤고. 그러니까 그런 건 절대 당연하게 아냐. 그냥 건강하게 하던 데로 해.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다시 말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낮에 일하다 유튜브에서 세월호 부모님들이 부르는 <너를 보내고>를 들었다. 우크라이나 출신 쌍둥이 자매가 몇 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해서 서울에서 행복한 시간을 갖다가도 서로 눈만 마주쳐도 우는 영상도 봤다. 손주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 댁에 깜짝 방문하는 영상도 봤고, 친정에 처음 온 조카를 보기 위해 만삭의 몸으로 운전해 친정에 와서 친정엄마의 잔소리와 미친년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조카를 보는 이모의 영상도 봤다. 당연하지 않다. 인생의 모든 순간은 당연하지 않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겨우 이런 걸 알게 됐다. 아이를 키우면서... 갑자기 불쑥 소녀가 되어 자기 방의 문을 열고 나오는 딸을 보면서 깨닫게 됐다. 사는 것도, 삶의 순간들도, 소중한 모든 것들도 당연하지 않다.
사족...
딸의 담임 선생님은 출장이 아니라 신혼여행 중이시다.(4월 15일)
흔들리는 마음
동네에 새로 문을 연 치킨 집에 테이크 아웃을 하러 딸과 함께 갔다. 골목에 접어들 때, 딸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빠, 아빠는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 있어? 다른 사람도 그래?"
"야, 당연하지. 여기 자동차 보이지. 이 자동차 주인이 이거 살 때 진짜 고르고 골라서 최고로 맘에 드는 거 산거거든. 그런데 한 6개월 지나면 좋아 보이는 차가 수두룩 해. 차만 그런 게 아냐. 사람도 그래.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걸 참는 거지. 예전에 아빠 대학에서 강의할 때 애들이 누구랑 사귄 지 몇 달 됐다, 남자 친구가 군대 갔다 그러면 헤어지라고 했어. 지겨울 때 됐고 눈에 안 보이는 사람 뭐 하러 기다리면서 시간 낭비하냐고."
"진짜?"
"응... 아빠가 그땐 좀 그랬어."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그럼 만약에 아빠도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아빠 정도 나이 되면 그게 귀찮고 번거로워서 그냥 모른 척 하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정말 예쁜 아가씨가 아빠를 좋아한다고 하고.. 또 아빠도 그 아가씨가 좋아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뭐 이혼을 하고.. 그런 것이 힘들다고. 그것이 옳고 그른 걸 떠나서 그냥 그게 힘든 거지. 그래서 안 하는 거지."
"사실은 아빠. 내가 지안이한테 호감이 있거든."
지안이는 은채의 남사친이다. 앞에 글을 찾아 읽으면 알 수 있다.
"지안이 괜찮지."
"내가 괜찮다는 남자 애가 몇 명 없거든. 지안이가 그중에 한 명이야."
"야, 그런데, 그냥 호감하고 어떤 남성적인 매력, 그러니까 아빠가 저번에 얘기한 성적인 매력 하고는 좀 다른 거야. 물론 니 나이 또래에 그런 게 있으면 더 이상하지만. 여하간 친구로 끌리는 거랑 남자로 끌리는 거랑은 다른 거야."
"음.."
"그리고... 지안이가 진짜 좋다고 해서 주현이한테 가서 난 이제 지안이가 좋아졌으니까 너랑은 끝이야, 하고 말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니들 중학교 가면 다들 헤어지잖아."
"그렇지."
"그때까진 그냥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 지안이나 주현이 모두 오래 곁에 둬도 괜찮은 애들이야. 그냥 친하게 지내. 주현이랑 지안이도 친하잖아. 그냥 그렇게 지내."
아빠의 관심사
딸은 이 대화를 통해 약간 마음의 평화를 얻은 듯했다. 치킨을 주문한 후 슈퍼에 들러 맥주와 음료수를 샀고 치킨이 튀겨지는 동안 내 옆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했다. 그 후 따끈한 치킨을 함께 먹으며 엄마와 아빠와 함께 한참 수다를 떨었다. 우린 저녁을 먹는 동안엔 TV를 끈다.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여러 얘기를 했다.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이 소재에서 저 소재로 맥락 없이 튀어 나갔다.
그러다... 내 관심사 이야기가 불쑥 나왔다. 아내가 임창정의 주식 사건을 물었고 내가 아는 만큼 얘기했더니, 아내가 "당신도 잘 모르는구나." 했다. 그러자 딸이 "아빠는 연예인 얘기에 별 관심이 없어. 내가 그런 내용의 유튜브 보면 그런 걸 뭐 하러 보냐고 그래", "그렇지 너네 아빠는 자기 외엔 관심이 없지."
그때 내가 그랬다.
"아빠는 관심 가는 사람이 딱 이 정도야." 하면서 내 앞에 있는 두 여자만큼 손을 벌렸다. 그때 딸이 "맥주와 치킨?" 해서 한바탕 웃었다. 그 후에 말을 이어갔다. "아빠는 너하고 엄마한테만 관심 있어. 삼촌이나 이모나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 신경 쓰는 것, 막 삼촌이 좋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고 이모가 좋아서 그러는 건 아냐. 이모가 미국에서 들어와서 우리 집에서 자게 하는 것도 그냥 그렇게 아빠가 신경 써야, 그래야 엄마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아빠가 알기 때문이야. 엄마 마음이 편해야 아빠 마음도 편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네 마음이 편해야 아빠 마음이 편한 거고..."(4월 27일)
7월 초 어느 날, 딸이 불쑥 물었다.
“아빠도 엄마랑 권태기가 있었어?”
“응? 권태기?”
“응.”
“있었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넘겼으니 지금이 있겠지.”
“나도, 주현이랑 권태기가 있었거든.”
“아, 그래?”
“그냥, 주현이 단점만 보이고 그러더라고.”
“그렇지. 그때는 그렇지.”
“그런데 좀 지나니까. 괜찮아졌어. 지금은 서로 디스 하면서 티격태격 지내고 있어.
하나의 질문, 가능한 모든 대답
딸은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딸의 친구 중 하나는 벌써 생리를 시작했다. 딸이 어린이에서 더 소녀에 가까워질수록, 질문의 난이도와 깊이는 더 심오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는 소위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이상한 아빠의 이상한 대답을 정정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거.
그래서일까... 여과 없이 내 생각을 담담히 말해준다. 딸도 가끔은 '이 양반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제 나름의 가치관이다. 즉 딸의 세계와 내 세계는 종종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딸의 의견을 고쳐주려 하진 않는다. 나와 아내는 의견을 내놓고 함께 고민한다. 딸은 그 답들 속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