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은 자존감을 모른다.

딸 바보의 시간이 끝난 뒤 33

by 최영훈

학부모 총회

학부모 총회는, 당연하다는 듯이 평일 오전에 열린다. 일하는 아빠나 엄마는 오지 말라는, 또는 정 오고 싶으면 반차라도 내서 오라는 이야기다.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아내의 회사 상황상 휴가를 내기 애매해서 참석 여부를 결정 못했다. 그런데 이게 또 반장의 엄마이기에 안 가기도 뭐 한 데다가, 반장 엄마가 소위 그 모임의 회장을 맡는 것이 일종의 관례이다 보니 아내가 딸에게 물었다.


"딸, 엄마가 학부모 총회 가는 것도 그렇고.. 회장 맞는 것도 바빠서 고민되네. 네 생각은 어때?"

"신경 쓰지 마. 한가한 부반장 엄마한테 하라고 하면 되지. 안 와도 돼."


물론,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내는 총회는 안 가도 회장은 맡을 듯...

"당신 못 가면 내가 대신 갈까?", 내가 물었다.

"당신이? 괜찮겠어? 다 엄마들일 텐데?"

"뭐, 어때. 대부분 엄마들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태어나지도 않았었는데 뭐. 애들 수다 좀 들어주고 오지 뭐"


그래서.. 결론은... 총회는 아내가 가고, 그 이후 정기적인 학교의 부름에 아내가 참석 못 할 경우 내가 참석하기로 했다. 젊은 아줌마들하고 놀아준다는 기분으로..


그날의 옷차림

학부모 총회에 뭘 입고 가면 되는지 묻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게 또 웃기다. 허세로 폼 잡는 건 1학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서로를 파악 못하는 시기, 공부와 외모와 예체능 능력 등의 서열이 정해지지 않는 시기에나 부모가 옷차림과 명품 가방으로 어깨에 힘줄 수 있다는 거다.


한 반에 20명 좀 넘고, 때문에 어지간한 학교는 한 학년에 백 명 안팎이어서, 몇 년 학교 다니다 보면 지들끼리 안다. 운동하면 누구, 공부하면 누구, 반장은 당연히 누구, 나는 딱 부반장 수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딸 반의 한 남자애-딸 앞자리에 앉은 애인데, 별명이 빌런 토끼다. 딸을 좋아하는 듯 하나, 불행히도 같은 반에 남친이 있다. 흠~ -가 반장이 아닌 부반장에만 출마했는데... 딸이 그 이유를 물어보니 "넘지 못할 벽이 있어."하고 말했다고...


오마카세

오마카세, 카푸어, 명품... 뭐 이런 것들의 구실이야 뻔하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 일본 언론에서 우리나라 젊은 애들이 오마카세 좋아하는 걸 비웃었다더라. 허영과 허세에 찌들었다고."

내 말을 듣던 아내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말했다. "아니 그거.. 우리 집에서 내가 하는 거잖아.", "응?", "집에 있는 걸로 내 맘대로 막 만들어주는 거.. 그게 오마카세지.", 한참 웃었다. "그래. 정마카세해라. 정마카세"


사실 뭐, 따지고 보면 전주의 막걸리 한상이나 통영이나 마산의 다찌집 시스템, 또 부산의 실비집(푸짐한 집) 시스템이 다 오마카세 아닐까? 아니면 말고.


자존감/거품

딸이 씻기 귀찮아할 때마다 아내는 날 타박한다. 애 어린이집 보낼 때부터 대충 막 보내서 그렇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양치하고 머리만 빗고 보낼 때가 많았다. 뭐, 딱히 늦게 일어나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원래 학교는 대충 하고 가는 거다, 깨끗하면서 편안 옷 입고 가면 된다, 거기 가서 무슨 외모 자랑하는 거 아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물론 잔뜩 꾸미고 오는 애도 있다. 그야말로 공주처럼 말이다. 딸 친구 중에도 그런 애가 있었는데 수업에 집중 못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으면 "야, 서희야. 뭐 해.. 집중해."하고 딸이 타박한다면서 선생님이 웃으며 말하신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애들은 초등학교에 가서도 그렇게 입고 온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 공지 사항에 종종 "꼭 편한 옷, 운동복 입고 오기"가 올라올 때가 있다. 이렇게 공지를 해도 꼭 지가 입고 싶은데로, 아니면 엄마가 입히고 싶은데로 입고 오는 애가 있기 때문이다. 난 1학년 때만 이런 공지가 오고 말 줄 알았는데, 5학년이 된 지금도 이런 공지가 온다.


난 딸에게 "야, 너같이 예쁘고 키 큰 애들은 그냥 대충 입고 가도 돼. 학교 가서 옷에 뭐 묻을 까, 그런 거 걱정하는 건 시간낭비야."하고 어린이집 때부터 주입시켜 놨다. 그래서 지금도 아주 특별한 경우-개학 첫날 같은-가 아니면 아주 편한 옷을 입고 간다.


학교에서의 자존감은 결국, 실력이다. 최소한 초등학교 수준에선 그렇다. 물론 그 이후론 아파트 평수가 어떻고, 차가 어떻고 하겠지만 그것도 자기 하기 나름이다. 자존감 챙길 시간에 더 창의적인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애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애한테 쓸데없이 "넌 특별한 아이야."라고 뻥치지도 않는다. 다만 "넌 고유한 존재야."라는 말은 한다. 너답게 사는 것이, 네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도 해준다. 자존감이나 자신감은 지가 알아서 챙기고 있는 것 같다. 자기가 학교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투쟁의 역사를 통해.


꽃 사진

오늘은 바이올린도 안 들고 가고, 예림이랑 중간에 만나서 함께 가기에 혼자 가라고 했다. 예전엔 그래도 걱정돼서 학교에 도착하면 인증 사진 보내라고 했는데, 그걸 한 적이, 당연히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예림이 만나면 학교 가는 길에 피어 있는 예쁜 꽃 좀 사진 찍어서 보내."하고 부탁처럼 말했다. 꽃을 좋아하는 아빠의 부탁이려니 생각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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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시 십오 분쯤 가족 단톡방에 꽃 사진이 올라왔다. 어떤 사진은 초점이 안 맞기도 했다. 올라오기 시작한 벚꽃, 빨간 동백, 노란 개나리, 활짝 핀 목련... 그리고 친구의 얼굴까지. 아마 중학교, 고등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서도 그럴 거다. "아빠, 궁금하니까 연락하고 인증샷도 보내고"하면 절대로 안 보낼 거다. 대신 "요즘 거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궁금하니까 꽃 사진 좀 찍어 보내라." 하면 잔뜩 찍어 보내지 않을까? 사진을 찍는 딸을 보며 친구들이 "야, 너 뭐 해? 아줌마처럼"하고 타박하면, "아유. 우리 노인네가 꽃 좋아해서 그래." 하면서 말이다.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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