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9년 지기 친구 지유와 손절했다. 내 나이 또래의 표현으로 하면 절연 정도 되겠다. 서너 살 때부터의 인연이니 쉽지 않았을 텐데 딸이 손절을 통보했다고 한다.
조짐
-작년, 그러니까 4학년이 되면서 지유 반의 분위기가 좀 특이했다. 담임은 쉬는 시간에는 스마트 폰 사용을 허락했고 수업 시간에도 그것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쉬는 시간마다, 당연히 시끄러웠고 수업 시간에도 조용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반에서 지유는 소위 아이돌 덕질을 하는 애들과 친해졌고 그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덕질의 세계로 넘어갔다. 또, 그 아이들이 쓰는 비속어, 욕 등을 대화 중에 섞어 쓰기 시작했다.
조짐 2
-둘은 토요일 오전, 방과 후 교실 음악 줄넘기를 같이 했다. 열한 시에 끝나면 지유는 학교에서도 그 단지가 보이는 아파트 단지로 가고, 딸은 후문 쪽에 있는 내게 온다. 문제는. 서로 반대 방향이어서 체육관에서 나오자마자 헤어져야 한다는 것. 이때마다 지유가 딸을 끌고 갔다. 자기가 가는 방향으로 걸어가게 하기 위해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친구의 조건
그러던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집에 걸어오며 딸에게 물었다. "지유는 너랑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렇다고 했다. 다시 물었다. "근데 지유는 집도 가까운데 너를 걔네 집 방향으로 끌고 가더라. 이유가 뭐야?", "아~ 내가 좀 돌아가도 집이 나오지 않느냐고 하더라고."
그때, 딸에게 말해줬다. "그런데, 딸, 친구랑 더 오래 있고 싶으면 친구가 가는 방향으로 함께 걷다가 돌아가면 되는 거 아냐? 아빠가 예전에 연애할 때, 서로 바래다 주기를 반복하고 그랬거든. 상대방을 좋아하면 내가 좀 희생하는 게 희생처럼 안 느껴지니까."
초딩의 남혐?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내게 말했다. 지유는 남자가 싫어서 아들을 낳으면 버릴 것 같다고... 자기는 여대, 그것도 이화여대에 갈 거라고 했다고. 이화여대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닌 것 셋째 치고. 도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남자 혐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혹시나 해서 물었다. "남자애들하고 뭔 일 있었대?", "아니" 참고로 그 집 엄마, 아빠 하고도 잘 아는 사이다. 그 집 아빠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 삼십 대 후반의 그냥 전형적인 한국 남자다. 딸 둘과 아내를 신줏단지 모시듯 모시고 사는.
원하는 것에 대한 집요함
-그러나 최근, 일련의 일이 있기 전까지 난 지유가 몇 살 터울의 동생으로 인해 자기만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나 지분을 확보하려는 욕심이 좀 있나 보다, 뭐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다.
딸도 아이브 덕질을 소소하게 시작하면서 음반을 몇 개 샀다. 그중엔 작년 연말, 소위 시즌 한정판, 시즌 그리팅 앨범도 있다. 품절 위기였는데 어렵게 삼촌이 주문해 줬다. 당연하게도 그 앨범엔 그 한정판만의 포토 카드가 들어 있다. 멤버들의 예쁜 모습이 담긴.
딸이 시즌 그리팅 앨범 구매에 성공했다는 걸 알게 된 지유는 딸이 가진 포토 카드를 원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카드와 바꾸자고 했다. 리미티드 에디션과 연중 판매하는 제품과의 교환, 저자 싸인본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교환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게다가 딸의 앨범은 삼촌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것이니 안팎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난 단호하게 거절하라고 했다. 거절했지만 지유의 요구는 몇 달간 계속됐다. 옵션을 바꿔가며 틈만 나면 자기가 원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요구했다. 딸의 단호한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원하는 걸 얻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몇 가지 예언
-그 뒤로, 내가 지유와 관련해서 했던 몇 가지 행동 예측이 들어맞았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친구나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이코 패스까진 아니어도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트리거, 하나의 사건
-그동안 몇 번, 딸은 지유한테 이런저런 아쉬움이나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건은 엊그제 있었다. 딸은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영어 참고서를 사면서 자신의 용돈으로 아이브의 앨범 하나를 샀다. 그 안엔 당연히 포토카드가 있었는데, 나온 것이 딸이 가지고 있는 것과 중복되는 것이었다. 지유한테 그 사정을 말했더니 지유가 자기가 갖고 있는 다른 것과 바꿔 준다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우선 월요일에 준다는 카드를 포장이 안 됐다는 이유로 가져오지 못한다는 톡을 보냈다. 난 딸에게 너도 가져가지 말라고 했다. 지유는 딸의 생일 선물도 주문했다고 해놓고 한 달이 넘도록 주지 않고 있다. 난 그것도 주문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지유가 준다는 카드가 다른 친구가 생일선물로 준 카드였다는 것. 게다가 선물 받은 포장 그 상태, 그대로 줬다는 것. 여기서 그야말로 딸의 뚜껑이 열렸고 손절을 선포했다.
손절의 아픔을 위로해 줄 수 없다.
"아빠는 인연을 끊어 본 적 있어?"
"아빠? 아빠 많지. 대학교 때 친구들도 그렇고. 뭐... 솔직히 아빠는 너 속상한 걸 위로해 주긴 그렇다. 공감도 잘 안 되고.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하나뿐인 동생 하고도 안 보고 지내고 할머니도 친구 차단하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9년을 사귄 친구인데.."
"몇십 년 산 부부도 이혼하는 마당에. 야, 헤어지고 사람이 죽어도 배고프면 밥 넘어가. 그게 사람이야."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인연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인연의 끊어짐에 애가 닳아하진 않는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타자의 의도 때문에, 그 마음과 행동 때문에 인연이 다하는 것도, 또 나 때문에 그러는 것도 결국엔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딸에게 그런 삶의 태도를 가르칠 생각은 없다. 다만 내 맘대로 안 되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삶을, 일상을 망가뜨리거나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단단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