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꼰대와 베테랑 그 사이 41

by 최영훈

5월에서야...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청이나 구청, 산하 공공기관의 예산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는 건 5월부터다. 이때서야 지방의회의 예산 심의가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과 일하는 기업들은 4월부터 바빠지기 시작해서 5월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진다. 이렇게 본격적인 예산 집행이 늦어지다 보니 겨울마다 여기저기 도로 공사를 하는 것일 테지. 우리 팀 역시 4월부터 바빠지기 시작해 5월 스케줄은 빡빡하다. 한 도시의 홍보 영상 의뢰를 받아 감독은 여기저기 분주히 오가며 촬영하고 있다. 이 사이 자잘한 영상 편집과 제작도 하면서 말이다.


야경의 스폿

도시의 홍보 영상을 위해 관련 이미지와 영상을 찾아보다 기가 막힌 야경을 보게 됐다. 지역의 거의 유일한 대교의 사진이었다. 이 지역 토박이인 감독도, 이 지역을 드나든 지 십여 년이 넘은 나도 대충 어느 각도에서 찍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위성 지도를 봤다. 주변에 차나 사람이 갈 수 있는 길도, 장소도 없었다. 가까운 어딘가에서 등산을 해서 접근하지 않았을까 추론했다. 검색을 해보니 사진 애호가들의 히든 스폿이었다. 감독은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며칠 전 집에 있는 데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그 장소를 찾았다는 전화였다. 스폿을 찾고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헤매다가 좁은 등산로 비슷한 것이 보여 가보니 앞이 트인 장소가 나오는데 딱 그 앞에만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더란다. 바로 그곳이 묘지였기 때문. 보통 해가 잘 드는 양지여야 하는 묘지엔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다. 그렇기에 그렇게 특별한 각도에서 훌륭한 야경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감독은 저녁에 혼자 가면 무서울 것 같다면서 종종 협업을 하는 조감독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숲 속을 함께 걸으며

어제는 나와 숲 속에 있는 문화재를 촬영했다. 같은 사물을 하나의 방향에서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촬영하여 일조량과 그 각도에 따라 피사체의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타임 랩스 촬영을 먼저 했다. 세팅을 해놓고 감독은 바로 드론을 띄웠다. 난 그저 촬영 장소까지 장비를 들어다 주고 말동무를 해주는 게 다였다. 그렇게 숲 속에 있는 두 개의 문화재를 거의 네 시간 넘게 촬영했다. 촬영 중, 잠시 짬이 날 때 동시에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콘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카피의 방향에 대해 얘기했고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표현 전략에 대해 논의를 했다. 이 논의는 촬영이 끝난 뒤, 작업실에 와서도 계속됐다.


능력이 안 되는 후배의 욕심

이날 촬영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감독이 이런 얘기를 했다. 과거 우리가 만든 영상에 꽤 괜찮은 CG를 한 구청의 홍보실 계장이 사용할 수 없겠냐며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 구의 홍보영상을 감독도 아는 J회사에 의뢰했는데 그 회사는 그런 능력도 안 되고 설령 된다 해도 CG까지 만들 견적이 안 되어서 부탁 아닌 부탁을 한 것이다. 감독은 후배 회사가 하는 일이니 흔쾌히 수락하여 소위 자막이 없는 클린 본을 건네줬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 그 후배가 전화를 하여 CG 소스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 같은 비 영상 전문가를 위해 심플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당신과 내가 이웃하여 식당을 하고 있다. 난 중화요리, 당신은 백반집이다. 백반집에 네 명의 손님이 왔는데 그중 한 명이 짬뽕을 먹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고 혼자만 가서 먹기엔 좀 그러니 백반집 사장에게 부탁을 한다. 배달시켜서 여기서 먹을 수 있겠냐고 말이다. 백반집 사장이 전화를 건다. 손님이 먹고 싶어 하니 혹시 짬뽕 한 그릇만 배달해 줄 수 없냐고. 그런데 다음 날, 다른 손님이 또 짬뽕을 찾는다. 백반집 사장은 아예 짬뽕을 메뉴에 추가할까 생각한다. 중화요리 집에 전화를 걸어 짬뽕의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게 바로 영상과 소스의 차이다. 영상엔 자막 정도만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소스엔 다른 변형이 가능하다. 짬뽕에 고춧가루를 더 뿌리는 것과 기존의 레시피에 자기만의 취향을 추가하는 것의 차이다.


양아치가 아직 많다.

감독이 열심히 촬영한 영상을 거저 쓰려는 업계 사람들이 있다. 속된 말로 양아치다. 이런 양아치는 나이도 안 가린다. 애나 어른이나 날로 먹으려는 사람은 흔하다. 일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은데 그 과정은 귀찮다. 심지어 재주도 없다. 그래도 감독이라는 명함, 작가나 카피라이터라는 명함은 버리고 싶지 않다. 결국 일 잘하는 선후배에게 빌붙거나 그들이 한 일을 슬쩍 가져와 얼기설기 엮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저작권법이 엄격해진 이후 이런 종류의 양아치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긴 하나 지역에선 여전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선후배의 정, 일을 준 기관이나 공무원의 위세를 빌어 남에 영상을 훔쳐가면서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예전엔, 감독이나 나나,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열받아하곤 했는데 요즘엔 그러려니 한다. 감독은 측은한 마음도 있는 것 같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이 업인 선후배들이 어떻게 하든 일을 해야 먹고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어제도 결국 그 후배에게 소스를 줬다고 한다.

그러려니 하는 나이

감독이나 나나 나이가 들면서 변했다. 이상한 슬로건이나 문구, 영상을 넣어달라고 하면 담당자와 실랑이를 하고 어쩔 수 없이 넣어주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했는데 요즘엔 그러지 않는다. 넣어달라고 하면 넣어주고 빼달라고 하면 빼준다. 요즘 지역의 몇몇 시나 구에선 의미도 없고 문법도 이상한 슬로건을 만들어 홍보하는데 우리 영상에도 넣어달라고 할 것 같았다. 어제 감독과 이동 중에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쪽에서 이야기 꺼내기 전에 그냥 우리가 알아서 넣어주자고 했다. 감독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바로 그러자고 했다.


지킬 건 지키고 포기할 건 포기할 줄 아는 나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깜냥도 제대로 모르면서 먹고살겠다고 이 바닥에서 뛰어다니는 동료 선후배들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나이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소위 수도권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서, 몇 치 건너면 아는 사이이기에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지역에서 이 업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고, 가르친다고, 타이른다고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때론 험하고 먼 길을 만났지만, 그래도 묵묵히 참고 온 그 길과 시간이, 그 여정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감독과 난 어제 점심을 언양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먹었다. 언양에서 동해 바다까진 제법 거리가 있지만 그러려니하며 들어갔다. 난 원래 중국집에선 짬뽕만 먹고 감독은 중화밥 아니면 짜장면을 먹는다. 어제도 내가 짬뽕을 시키려 하자, “여기까지 왔는데, 삼선짬뽕 드셔보시지.”, “그럴까요? 그럼 전 삼선짬뽕.”, “내는 간짜장 곱빼기.”,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감독의 따로 나온 짜장이 특이하면서도 양도 많았다. “드셔 보소. 이게 짜지도 않고, 담백~하니, 진짜 맛이 다르다니까.” 못 이기는 척, 한 숟가락 퍼 먹었다. 담백했다. 양파 향이 구수했다. 그 후, 두 사람 다 말없이 밥을 먹었다.